Immortal RAW novel - Chapter 21
021 나도!
주설란은 겨울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진무앙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지?”
진무앙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았다.
“설란의 성격을 아는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어? 들통나는 순간 내 심장에 칼을 꽂으려고 달려들 게 뻔한데?”
주설란은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물론 진무앙이 그 칼에 찔릴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지만.
“알긴 아네…….”
중얼거린 주설란이 말을 이었다.
“좋아.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돼?”
진무앙은 주설란에게 의뢰의 내용을 가감 없이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주설란의 얼굴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차용증이 위조라는 걸 밝혀내야 한다는 거네.”
“그래. 음… 그런데 설란의 반응을 보니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낙양에서 반년 넘게 정보를 수집했는데 그런 걸 모르면 구유밀령의 단주 자격이 없지.”
주설란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훗. 무앙은 모르겠지만 유득삼이란 이름은 낙양의 사마외도들 사이에서 꽤 유명해.”
“위조능력 때문에?”
진무앙의 질문에 주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가 많은 재주잖아.”
“그렇긴 하지.”
지금과 같은 난세에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고 싶은 자들이 가장 원하는 재주 중 하나가 위조 능력이었다.
그러니 유득삼이 살아 있을 때 그를 찾는 자들이 꽤 많았으리라는 건 삼척동자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설란이 말을 이었다.
“그는 처자식이 살해당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었어. 돈도 많이 벌었고. 하지만 가족을 그렇게 보낸 후에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어. 그리고 죽을 때까지 술독에 빠져 살았지. 그가 돌연사한 것도 주독이 올라서였어.”
진무앙이 물었다.
“죽기 전에 그가 진중효에게 곡씨무가의 인장을 만들어주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주설란은 고개를 저었다.
“곡만동이 돈을 빌린 게 사 년 전이라고 했지?”
“응.”
“그럼 가능성이 없어.”
“왜?”
“유득삼의 처자식이 죽은 게 칠 년 전이라는 거 알지?”
“응. 그런데 시차가 중요한 거야?”
“중요해. 오 년 전이면 유득삼은 주독으로 수전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을 때거든. 당시 그는 곡씨무가의 인장이 아니라 간단한 도장 하나 만들지 못하는 상태였어. 손이 너무 떨려서 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했으니까.”
“폐인이었다는 말이로군. 낙양에 그 말고 다른 실력 있는 위조전문가는 없어?”
“낙양뿐만 아니라 하남성을 통틀어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주설란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천하를 뒤지면 그와 비슷한 능력의 위조전문가를 찾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일을 계획한 놈이 진중효가 맞다면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영역 밖에서 위조전문가를 구하지는 않았을 거야.”
진무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 그럼 남은 가능성은 유득삼이 후계자를 남겼을 거라는 건데…….”
“그렇겠지. 무앙, 유득삼의 후계자를 찾고 싶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뭔데?”
“송옥루의 단서를 알려주면 나도 말해줄게.”
“음, 설란이 장사꾼이었으면 거부가 되었을 거야.”
“말해줘, 무앙.”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어리둥절해진 주설란이 물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게 단서?”
“맞아.”
“나 애간장 태우려고 작정했어?”
“단번에 모든 걸 말해주면 너무 재미없잖아.”
“나와 스무고개를 넘으시겠다?”
“흥미진진하지?”
“흥, 전혀!”
“이제 그 방법이라는 걸 말해봐.”
진무앙이 더는 말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주설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받았다.
“유득삼이 죽을 때까지 그를 돌봤던 친구가 있어. 후계자가 있다면 그가 모를 리 없어.”
“누군데?”
“우리 스무고개 하는 중 아니었어?”
단서를 말하라는 뜻이다.
“흐흐흐.”
진무앙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답은 멀리 있지 않아.”
“그게 두 번째 고개?”
“응.”
“진짜 뜬구름 잡는 기분이네.”
“과연 그럴까? 의외로 구체적인 단서일지도 모르는데.”
그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주설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설란, 이제 그자의 이름을 말해줘야지.”
“노철. 도굴을 업으로 삼고 있는 놈이야.”
“어디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지?”
“몰라.”
“설란,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 아니겠지?”
“침상 위라면 몰라도 백주대낮의 거리에서 내가 무앙하고 장난하겠어?”
말처럼 주설란의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유득삼이 죽은 후 노철은 행방을 감췄어. 하지만 역시 그도 찾을 방법은 있지.”
“내게 또 다른 단서를 요구하지는 마. 저울의 무게가 달라.”
“무앙, 그럴 마음 없으니까 넘겨짚지 마. 동쪽에 있는 관제묘에 노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자가 있어.”
“관제묘?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곳은…….”
“맞아. 그곳은 개방의 낙양 분타야.”
진무앙은 눈살을 찌푸렸다.
낙양 지리를 잘 모르는 그였지만 관제묘가 개방의 낙양 분타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오래전 그가 이곳을 지난 적이 있었을 때 맺은 작은 인연(?) 때문이었다.
그가 물었다.
“도굴꾼의 행방을 아는 자가 개방 방도라는 말이야?”
“응. 팔결제자 대취개 부곤. 그와 유득삼, 노철은 한동네에서 자란 죽마고우야.”
역시 구유밀령의 요인답게 주설란은 아는 게 많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비룡무관과 양 씨 일가, 그리고 진가장에 대해 진무앙에게 말했다.
이야기 중에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것들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진무앙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이제부터 그가 찾아갈 상대는 천하제일대방이라는 개방의 방도였다. 하지만 진무앙에게서는 꺼리는 기색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주설란이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역시 거침이 없어. 내가 이래서 무앙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진무앙이 혀를 차며 말을 받았다.
“그 사내 옷이나 벗고 말을 하든지. 난 남자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거든.”
주설란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벗고? 갈아입고가 아니고?”
진무앙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관제묘에 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각났어.”
주설란이 은은한 열기가 어린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나도!”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시각.
낙양 동쪽 외곽에 있는 관제묘는 지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곳곳이 허물어지고 금이 가서 바람만 불어도 허물어질 것처럼 보였다.
한때는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인적이 끊어진 숲속의 폐건물일 뿐이었다.
멀리 관제묘가 보이는 숲속.
진무앙은 아름드리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관제묘를 보고 있었다.
그와 관제묘의 거리는 오십여 장.
“설란, 이제 좀 떨어지는 게 어떨까?”
“싫어.”
그의 팔을 부여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설란이 도리질을 했다.
여전히 유삼을 입고 있었지만, 허리를 묶은 요대는 느슨했고, 유생건은 어디에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머리를 젓자 숱이 많고 풍성한 긴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진무앙이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덥다.”
그를 올려다보는 주설란의 눈이 고양이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골로 진무앙의 팔을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거야? 풀어줄까?”
“일해야 하는데 자꾸 자극하지 마.”
주설란이 진무앙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너무해. 항산도 식후경이라던데.”
“나 배불러.”
“흥, 난 아직 고프단 말야.”
진무앙은 혀를 찼다. 이러다가는 날 샐 판이다.
그가 말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주설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앙은 오늘만 사는 남자 아니었어?”
“사별삼일이면 즉당괄목상대라는 말 몰라? 사람은 변하는 거야. 나도 내일을 생각하며 살기로 했어. 됐냐? 이제 일하자. 저기 부곤이란 놈이 있는지나 찾아봐.”
“쳇! 어울리지 않게 문자는!”
주설란은 입술을 삐죽이며 관제묘로 눈길을 돌렸다.
관제묘 앞에는 십여 명의 거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옷을 벗고 이를 잡고 있는 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기 발가락을 빨고 있는 자 등등.
반각 정도가 지났을까.
주설란이 손가락으로 반쯤 허물어진 관제묘의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 나오는 놈 보여?”
“보여. 저자가 부곤?”
“응.”
주설란의 손가락 끝에는 넝쿨처럼 엉킨 머리에 옷은 물론이고 얼굴과 손발에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중년의 거지 한 명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저녁 동냥 나가나?”
“설란은 저 눈빛이 동냥하러 가는 걸로 보여?”
“그렇긴 하네.”
두 사람과 부곤의 사이엔 오십 장이나 되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을 읽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부곤은 소피가 마려운 사람처럼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관제묘의 뒤쪽 숲으로 들어갔다.
“설란, 가자.”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놨어? 저자는 개방 팔결제자라고. 잡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입을 여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내가 도와줄까? 분근착골로 조지는 건 내가 전문이잖아.”
“설란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 친구의 자식에 관한 일인데 고문을 한다고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도 않고. 계획이 있어.”
“무슨 계획인데?”
“타초경사, 욕금고종.”
진무앙이 말한 두 개의 고사성어는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고, 큰 이득을 위해 작은 것은 과감하게 놓아준다는 삼십육계의 병법이다.
멈칫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설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
“당연하지, 누구 생각인데.”
두 사람은 바람처럼 관목숲을 헤치며 부곤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옷깃 스치는 기척조차 나지 않는, 극도로 소리가 절제된 운신술.
그들은 이런 일에 이골이 날 대로 난 사람들이었다.
가자미눈을 한 부곤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쫓아오는 방도는 보이지 않았다.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헤헤헤.”
숨겨놓은 삶은 돼지 뒷다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홍수라도 난 것처럼 고였다.
목적한 장소가 가까워지자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으으으, 분타주님의 긴급소집령이 아니었으면 벌써 뱃속에서 소화까지 끝났을 건데. 혈사당 살수들 따위가 몇 명 죽은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전 분타원을 긴급소집씩이나 해서 어디까지 조사가 되었는지 닦달을 하냐고. 뒈질 만하니까 뒈졌겠지.”
구시렁거리던 그는 넝쿨이 우거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지체 없이 넝쿨을 걷어내고 땅을 덮고 있는 나뭇잎까지 들어냈다.
그러자 기름종이에 싸인 팔뚝 굵기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삶은 돼지 뒷다리였다.
꿀꺽!
그가 기름종이에 싸인 돼지 뒷다리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퍽!
기척도 없이 날아든 일격에 뒷덜미를 얻어맞은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털썩!
쓰러진 부곤의 앞에 진무앙과 주설란이 서 있었다.
주설란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짝짝짝!
“이렇게 쉽게 잡을 줄이야. 진짜 무앙의 말대로네.”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도 이놈의 거지들은 변한 게 없네. 그 늙은 거지도 그러더니, 개방 제자들은 먹을 거 앞에서는 경계심 같은 건 개나 줘버린다니까.”
그는 부곤을 어깨에 척하고 걸쳐 맸다. 그리고 주설란에게 물었다.
“근처에 분위기 으스스한 장소 아는 데 있어? 지하면 더 좋고.”
주설란이 요염하게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런 건 내가 전문이잖아. 마침 멀지 않은 곳에 토굴이 하나 있어. 참,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내가 빈방도 만들어놨지.”
진무앙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주 바람직한 토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