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21
221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에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의 만금산장.
천하제일의 부를 가진 가문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넓고 웅장한 후원의 정자.
환한 달빛에 물든 연못을 보며 진무앙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 거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극상품의 술을 병째로 들이켠 노화자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돼지 뒷다리를 한 입 가득 물며 말했다.
“우물우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존… 우물우물…….”
“거지야, 그게 죽을죄를 지은 놈의 태도냐? 진짜 죽여줄까?”
노화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우물우물… 설마 그러시지는 않겠죠?”
진무앙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노화자의 정수리를 젓가락으로 후려갈겼다.
퍽!
“아으, 더러운 놈. 먹을 거 씹으면서 말하지 마! 튀잖아!”
피하지도 못하고 젓가락으로 얻어맞은 노화자가 머리를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무존,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립니다.”
진무앙은 새로운 젓가락을 집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개는 무니까 안 건드리는 거야.”
“그럼 제가 개만도 못하다는 겁니까?”
“나은 건 뭐냐?”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도 무림에서 전설이라고 불리는 개방의 태상장로인데…….”
노화자는 천하제일 경공대가로 알려진 비천유룡개 홍노섭이었다.
“전설? 놀고 있네. 그리고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새끼야. 나는 삼백 년 만에 내 여자한테 귀싸대기까지 맞았는데!”
“그게 제 탓은 아닌…….”
진무앙이 새로운 젓가락으로 홍노섭의 이마를 똑바로 가리키며 말했다.
“가뜩이나 심기 불편한데 자꾸 헛소리하면 네놈 이를 다 뽑아버릴지도 몰라.”
그의 지랄맞은 성질을 잘 아는 홍노섭은 냉큼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무존.”
그는 진무앙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심기가 불편하신 게 저분 때문입니까?”
말을 하며 그는 연못을 힐끔거렸다.
그곳엔 곤룡포를 입은 몽지림이 바람을 맞으며 수면을 밟고 서 있었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은색의 머리카락, 보석 같은 보라색 눈동자의 그녀는 말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홍노섭은 그녀보다 배분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함부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진무앙의 여자에 비하면 무림의 배분 따위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보다도 가치가 없었으니까.
진무앙이 잔을 단숨에 비우며 말했다.
“내 여자가 저 꼴인데 속이 편하겠냐…….”
씁쓸한 목소리였다.
몽지림은 제정신이 아닌데도 진무앙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따라오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만금산장으로 오면서 그녀에게 몇 가지 시험을 했고, 몇 가지를 알아냈다.
그녀가 절대로 그의 옆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붙어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녀에게 그와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그녀의 시야 내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가 홍노섭에게 물었다.
“내부 정리는 끝난 거지?”
“예.”
“고생했다.”
“제가 한 일은 사람들을 다독인 것뿐입니다. 무존께서 산장 사람들이 당한 섭혼술을 해제해 주셨고, 저분이 화산파 제자들을 몰살시키지 않았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시황릉을 떠난 진무앙은 일행과 함께 만금산장으로 왔다.
그들을 맞이한 건 화산파의 장로들이 이끄는 무인 일백과 섭혼술에 걸린 만금산장의 호위무사 일백이었다.
진무앙은 몽지림에게 화산 제자들을 맡겼다.
이지를 잃은 상태였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을 대법의 제물로 만든 그들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었다.
싸움은 일각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어느 누구도 몽지림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한 결과였다.
그사이 타라와 아르다반은 일백 명의 산장 호위무사를 제압했고.
그때 나타난 사람이 비천유룡개 홍노섭이었다.
진무앙의 예상했던 것처럼 금설화를 충동질해서 낙양으로 보낸 사람이 그였다.
그가 진무앙이 수향루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오괴의 일인인 생사신복 석진방 덕분이었다.
홍노섭은 죽은 석진방의 사부 무불통 포대덕과 친분이 두터웠다.
석진방은 지금은 진소혜로 이름을 바꾼 곽효림과 곽보명 부자가 사해집마부를 탈출한 사건으로 진무앙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석진방은 진무앙의 정체를 알기 위해 다방면으로 손을 썼지만 얻은 게 없었다.
그러자 그는 마지막으로 홍노섭에게 연락을 취했다.
덕분에 홍노섭은 진무앙이 중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홍노섭이 진무앙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수향루로 돌아가실 겁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
“이제 이 낭랑 그만 마음고생시키시고 수향루에 정착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진무앙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노섭아.”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거지야’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아는 홍노섭의 척추가 긴장으로 빳빳해졌다.
“예, 무존.”
“선 넘지 마라. 그러다 진짜 죽는 수가 있다.”
홍노섭은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낭랑을 생각하면 죽은 그녀의 부친 생각이 저절로 나서…….”
홍노섭은 대혼돈 시대 때 진무앙을 찾은 일곱 명의 인연자 중 한 명이다.
난향은 그들 중 한 명의 딸이고.
그래서 홍노섭은 같은 인연자 중 한 명이었던 난향의 부친을 잘 알았다.
그것도 그냥 얼굴만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동네에서 자란 죽마고우였기 때문이다.
홍노섭이 화제를 바꿨다.
“종남파와 화산파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종남파는 이번 기회에 단단하게 기틀을 잡아줄 생각이다. 황수와 자질 있는 애들 몇 명 환골탈태시키고, 실전된 무공들 전해주면 문파를 재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다.”
“대혼돈 시대 때 사해동도관에서 하셨던 것처럼요?”
“그래. 귀찮기는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마음이 찜찜할 거야.”
“화산파는요?”
“화산은… 대가를 치러야지.”
“멸문시키실 겁니까?”
“왜? 걔들이 개방과 함께 구파일방이라고 한데 묶여 불린 세월이 길어서 걱정이라도 되는 거냐?”
홍노섭이 진무앙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역사가 칠백 년이나 되는 문파가 졸지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싱숭생숭해서요.”
“거지야, 어떻게 하면 화산파의 명맥을 보존할 수 있을까 하고 잔머리 굴리는 거 다 보이거든.”
홍노섭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진무앙의 앞에 무릎을 팍 꿇었다.
그리고 애처로운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무존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들에게 자비를 좀 베푸시면 안 될까요? 천무제의 공격으로 다 망했던 화산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 무존이시잖습니까.”
매화검존 우진량도 진무앙이 사해동도숙에서 직접 가르쳤던 무림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다.
진무앙은 그를 통해 무너진 화산파를 다시 세웠다.
“내가 세운 문파, 무너뜨리는 것도 내 맘이다.”
“애써서 세우셨는데 굳이 수고롭게 다시 무너뜨리실 필요는…….”
홍노섭의 애걸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진무앙이 짜증 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신경 꺼, 새끼야!”
움찔한 홍노섭이 군에 막 들어간 병사처럼 크게 대답했다.
“넵!”
“술이나 따라. 나는 내일 하루 종남 애들 손보고 모레 날 밝으면 바로 떠날 거다.”
“며칠 더 제가 모실 수 있게…….”
“네 시중을 며칠이나 더 받으라고? 술 얹힐 일 있냐?”
“죄송합니다.”
술자리가 깊어갔다.
* * *
만금산장의 장주 거처.
금설화는 침상에 누워 있는 금진운의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그때 석채은이 손에 몇 가지 음식이 올려져 있는 소반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금설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민아에게 시켰는데 왜 석 목주가 그걸 갖고 오세요?”
석채은은 탁자에 소반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금 소저가 심심할 것 같아서 말동무라도 해주려고요.”
금설화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말동무가 아니라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오신 거 같이 보이네요.”
진무앙에 의해 금진운의 섭혼술이 해제되었고, 비천유룡개가 나서서 산장을 안정시킨 뒤라 그녀의 안색은 보기 좋았다.
석채은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금 소저는 속일 수가 없군요.”
“알고 싶은 게 진 호위의 정체겠죠?”
“그래요.”
“아쉽게도 저는 석 목주의 호기심을 풀어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금설화의 예상과 달리 석채은은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금설화가 물었다.
“이미 제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석채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 호위 같은 절대고수의 이름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있을 수 없죠. 그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의 금 소저처럼 모두 입을 다무는 거죠.”
금설화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정답이에요.”
“그럼에도…….”
석채은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떠오르는 별호가 하나 있더군요. 무림에는 그만한 무공을 가지고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절대고수가 한 사람 있죠.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한 여덟 중 한 명으로 숭앙받는…….”
금설화가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석 목주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죠. 그렇더라도 그 별호를 입 밖으로 말하지는 말아요. 그분이 원치 않는 일이니까요.”
“어차피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입에 담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별호잖아요.”
“그렇긴 하죠.”
두 여자는 마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금설화가 물었다.
“언제부터 그분의 정체를 알아차렸던 거예요?”
“좀 됐어요. 같이 환우마병의 하나인 파천혈신륜을 추적했을 때부터였으니까요.”
대경실색한 금설화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환우마병이요?”
“예.”
석채은은 진무앙과 함께했던 파천혈신륜과 겁화금종 사건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는 긴가민가했었는데 이번 일로 확신을 하게 되었죠. 진 호위가 신화가 된 그라는 걸요.”
“아…….”
탄성을 토한 금설화가 석채은에게 물었다.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뭐죠?”
“석 목주는 전부터 그분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그분에게 말을 편하게 해요? 두 분이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에요.”
“예?”
“금 소저는 그가 왜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저는 운이 좋게도 그에게서 직접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있어요.”
금설화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예? 직접 들었다고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는… 사람들의 숭앙을 받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 봤자 마음을 터놓을 친구 하나 없는 못난 놈이라는 걸 더욱 자각하게 될 뿐이라더군요.”
“아…….”
“저는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거예요.”
금설화의 안색이 흐려졌다.
진무앙과 그녀의 관계는 석채은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정체를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가 석채은처럼 그를 편하게 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석채은에게 말했다.
“오늘은 정말 석 목주가 부럽네요…….”
석채은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이번에는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군요.”
두 여자는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만금산장의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