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4
024 사고 치지 마
멀리 수향루가 보이는 맞은편 객잔.
창가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며 수향루를 보던 중년 문사는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실패했군…….”
자신도 듣기 힘들 만큼 작게 중얼거리는 문사는 북망산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 남자였다.
수향루에 들어가 소소를 납치하라고 청부를 한 사람이 그였다.
“진 가가 돌아오기 전에 하오밀문의 흑서(黑鼠:검은쥐)가 실패했다는 건, 저 안에 그를 제거할 정도의 무위를 지닌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다는 말인데…….”
그의 청부를 수락한 자, 흑서는 하오밀문의 낙양 지소에서도 손꼽히는 능력자였다.
그는 일이 성공하면 즉시 신호를 보내기로 문사와 약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호는 없었다.
게다가 문사는 방금 전 진무앙이 수향루에 들어가는 것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호위무사 정도가 흑서를 해치우는 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고… 어떤 놈일까?”
다섯 치가 넘는 수염을 쓸어내리는 그의 눈에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진가 놈이라면 지금쯤 그 아이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아냈을 텐데… 게다가 정체 모르는 놈까지… 골치 아프게 됐군……. 제기랄.”
그는 청수한 풍모와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화의 능력을 여기저기 소문낼 자는 아니니까 엉뚱한 놈들이 꼬일 일은 없을 테지만… 그나저나 기회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고… 그 아이를 빼내와야 하는데…….”
그는 구시렁거리며 객잔을 나섰다.
“흑서는 내 물건을 갖고 있는 게 없으니 소화도 나를 볼 수는 없을 거야. 그럼 진가 놈이 나를 추적하지도 못하겠지. 하오밀문 정도로 놈을 어쩌지는 못할 거고……. 젠장… 진가 놈이 끼면 일이 꼬이지 않은 적이 없는데… 그냥 청해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중원까지 와서 날 방해하냐고! 개쌍놈의 자식…….”
힘없이 걸음을 옮기며 투덜거리던 중년 문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자라면… 진무앙이 여기 있다는 걸 알면 만사 제치고 달려올 거야. 잘하면 소화에게서 진무앙을 떼어놓을 수 있을지도……. 그자가 어디에 있더라… 얼마 전에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소소는 눈을 비볐다.
“아저씨…….”
진무앙이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난향이 서 있었고.
“꼬맹아,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아냐?”
소소는 도리질을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푹 자고 있었는데 알 리가 없잖은가.
진무앙이 한 자가량 되는 단검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널 데려가려고 침입했던 자가 있었다. 이게 그자의 물건인데 만져 봐라.”
소소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아이는 몇 년 동안 강호를 떠돌며 별의별 일을 다 보고 겪었다.
당연히 침입자가 자신의 무기를 순순히 진무앙에게 주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 바로 알아차렸다.
더해서 자신이 단검을 만지면 어떤 장면을 보게 될 거라는 것도.
소소는 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며 단검을 쥐었다.
눈 몇 번 깜박거릴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하지만 진무앙은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보기만 할 뿐 제지하지 않았다.
툭!
“하악… 하악…….”
소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불로 덮여 있는 가느다란 허벅지 위에 단검을 떨구었다.
그제야 진무앙은 단검을 집어 들었다.
소소의 눈꺼풀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왔다.
그새 탈진한 것이다.
하지만 진무앙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본 걸 말해봐라.”
“하오밀문… 저분…….”
털썩.
두 마디를 한 소소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침상에 쓰러졌다.
잠시 말없이 아이를 내려다보던 진무앙이 난향에게 말했다.
“생각했던 대로군. 이상한 걸 보는 그 능력 때문에 아이의 몸이 이 지경이 된 거야. 난향, 아이가 낄 수 있는 장갑 하나 만들어줘. 그러면 쓸데없는 데 기력이 소모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일부러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예전에 그가 들렀을 때 쓰라면서 인피면구하고 같이 주고 간 물건들 중에 장갑이 한 쌍 있거든. 사람 피부와 다름이 없어서 끼어도 이물감이 전혀 없어. 아이한테 도움이 될 거야.”
“나한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놈이 난향한테는 아주 퍼주면서 살고 있었구만.”
“호호호. 그러게 그가 있을 때 좀 잘해주지.”
“남자한테 잘해주는 취미 없어.”
“흥. 그렇다고 여자한테 잘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아침부터 구박은 사양하겠습니다, 루주.”
난향이 소소를 돌아보며 진무앙에게 물었다.
“소소를 쫓고 있는 자들,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그냥 두면 계속 이런 짓을 할 텐데?”
“올 때마다 난향이 목을 비틀어 버리면 되지.”
“세상 참 편하게 산다.”
“사람 사는 방식을 비웃는 건 무례한 거야.”
“진짜 말이나 못하면…….”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이러면 내가 오히려 무앙한테서 월봉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진무앙이 양손으로 귀를 가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안 들린다, 안 들려!”
“한 대 때려줄까 보다.”
진무앙은 움찔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를 째려보던 난향이 물었다.
“하오밀문에 가보려고?”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두어도 알아서 찾아올 놈들을 내가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잖아.”
“그럼?”
“의뢰를 마무리 지어야지.”
“사고 치지 마.”
“그럴 일 없어. 차용증의 진위만 밝히기로 한 거니까. 저쪽에서 먼저 나를 노린다면 그때는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만.”
“방법은 찾았어? 진중효는 고리대금업과 대형 도박장을 운영해. 그는 흑도에 몸담고 있지만, 낙양 무림계에서 신용과 인맥이 두터워. 게다가 양일청이 그의 배후라면 확실한 증거 없이 그가 가진 차용증이 가짜라고 주장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잖아.”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향은 꼬맹이 깨어나면 보약이나 챙겨줘. 굉장히 비싼 거야. 이번 의뢰의 착수금 대부분이 그거 사는 데 들어갔다고.”
난향이 그를 곱게 흘기며 말을 받았다.
“아이한테 좀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보약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해?”
진무앙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에 씁쓸한 기색이 섞였다.
“다정? 훗. 난향, 나한테 너무 무리한 걸 원한다는 생각 들지 않아?”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진무앙은 난향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방을 나가 버렸다.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는 난향의 눈에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지금의 당신에게 무리한 요구라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정처 없이 혼자 떠돌며 사는 인생, 이제 지겨워질 때도 됐잖아…….”
* * *
진가장은 동부 대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장원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규모는 평범했다.
반면 특이한 것도 있었다.
그건 장원의 규모에 비해 드나드는 사람이 굉장히 많고, 남녀노소가 다 섞여 있었으며, 흥분과 기대로 가득차서 들어갔다가 곧 죽을 것처럼 피폐한 얼굴이 되어 휘청거리며 걸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가장은 불법 도박장이었으니까.
이곳의 주인인 진중효의 주된 사업은 두 가지였다.
고리대금업과 도박장.
진가장은 그의 사업의 근거지였고.
진무앙이 진가장을 찾은 건 해가 아직 중천에 이르기도 전이었다.
정문을 지키던 덩치는 별다른 조사도 없이 진무앙을 중앙 건물로 들여보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는 오전인데도 왁자지껄한 소음과 연초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로 가득했다.
탁 트인 백여 평의 공간, 수십 개의 탁자와 그곳에 빙 둘러앉아 도박하는 사람들, 쟁반에 술을 들고 나르는 수십여 명의 젊은 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속살이 그대로 비칠 만큼 얇은 데다 엉덩이까지 깊게 파인 옷을 입은 여자가 진무앙에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분이시군요. 새로운 고객님은 무엇을 하고 싶어서 우리 장원을 찾아오셨을까?”
몸에 착 감기는 듯 나긋나긋한 어조에 은근한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
진무앙은 여자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슬쩍 집어넣으며 말했다.
“주사위.”
여인의 얼굴이 꽃이 피듯 화사해졌다.
그녀는 진무앙의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지듯 콧소리를 냈다.
“아잉, 우리 고객님, 많이 놀던 분이셨구나.”
그녀의 말에는 과장이 없었다.
초짜나 관인, 백도에 몸담은 무인은 진무앙처럼 노골적으로 반응을 하지 못하니까.
진무앙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는 무릎을 좀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허벅지가 여인의 몸과 물샐 틈도 없을 만큼 밀착되었다.
“하아…….”
진무앙의 강인한 허벅지 근육을 몸으로 느낀 여인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무앙이 그녀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기다려. 나올 때 보자구.”
여인도 입술을 진무앙의 귀에 붙였다.
“잃지 않고 나갈 자신이 있나 봐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여인이 살짝 발을 뒤로 빼며 말했다.
“자신만만하시군요. 얼마나 갖고 오셨죠? 자금의 규모를 알아야 판을 소개해 드릴 수 있거든요.”
“은자 열 냥.”
그것은 곡은설에게 받은 착수금 중 소소를 치료하는 의원에게 지불한 대금과 보약 등을 사고 남은 돈 전부였다.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받았다.
“중급 판에 끼실 수 있겠네요.”
그녀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따라오세요.”
진무앙은 둔부를 살랑거리며 걷는 여인의 뒤를 따랐다.
입구에서 두 사람 사이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들을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도박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설령 두 사람이 질펀한 정사를 치렀다 해도 그들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을 것이다.
주사위 판이 벌어진 탁자엔 삼남일녀, 네 명이 앉아 있었다.
여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새로운 분을 모시고 왔어요. 우리 장원에 처음 온 분이지만 경험이 많으신 듯하니 모두 긴장하셔야 할 거예요.”
네 명의 남녀는 별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진무앙을 힐끗 보고 다시 시선을 탁자로 돌렸다.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재미있을 것 같군.”
보통 주사위 도박은 일대일인 경우가 태반인데 이곳은 달랐다.
규칙은 두 가지뿐이었다.
도박금은 무조건 현금일 것, 그리고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적은 돈을 걸면 안 된다는 것.
진무앙을 안내한 여인은 그가 앉자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의 뒤에 섰다.
그가 주사위 도박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시작된 이번 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들 앞에 놓인 은자를 보니 이번 판의 도박금은 다섯 냥이었다.
이백 근은 나감 직한 체구에 기름기가 번지르르 한 상인 느낌의 오십대 사내가 통을 흔들다가 안의 주사위를 탁자 위로 던졌다.
주사위는 두 개, 합한 숫자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도박이었다.
또르르르르-
멈춘 주사위 두 개의 합은 칠이었다.
상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떠오르고, 삼십대의 화려한 무복을 입은 사내가 활짝 웃으며 은자를 자신의 앞으로 쓸어 모았다.
“하하하, 경 대인, 미안하게도 이번 판도 제가 이겼습니다.”
말과는 달리 사내는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에잉! 연전연승하는 걸 보니 오늘 운은 전부 양 대협이 가진 것 같구려.”
경 대인이 투덜거리는 걸 들으며 양 대협이란 사내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이번 판은 새로 오신 분한테 선수를 드리겠소. 금전부터 거셔야 할 텐데, 얼마로 하시겠소?”
진무앙의 자리는 양 대협(?)의 바로 옆이었다.
양 대협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진무앙은 싱긋 웃었다.
인생 막장이 모이는 도박판에서 대인에 대협이라니. 말하는 꼴을 보니 같잖지도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낭에서 열 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탁!
그것을 본 네 남녀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이걸로 시작하죠.”
양 대협이란 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통이 크신 분이군. 좋소. 나는 받아들이겠소.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경 대인을 비롯한 이남일녀도 눈을 빛내며 열 냥씩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진무앙이 말했다.
“선수를 양보한다고 했으니 내가 먼저 던져도 되겠습니까?”
이미 양 대협이 한 말도 있는 터라 네 명의 남녀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진무앙은 주사위 통을 잡았다.
‘오랜만이군. 그 녀석이 죽은 이후 처음이니까 거의 이십 년 만인가. 사정을 알고 있으니 난향도 이번 도박은 눈감고 넘어가 주겠지.’
그는 천천히 주사위 통을 흔들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진가장의 도박판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진무앙은 단 두 판으로 네 명의 남녀를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첫판을 승리했고, 두 번째 판에 자신의 딴 사십 냥을 보태서 오십 냥을 걸었다.
그는 또 이겼고, 그의 앞에는 이백오십 냥의 은자가 쌓였다.
네 명의 남녀는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진무앙은 세 번째 판의 도박금으로 이백오십 냥 전부를 걸었던 것이다.
곳곳에서 도박을 하던 사람들이 손을 멈추고 주사위 판으로 모여들었다.
흥미진진해 하는 얼굴들.
만약 네 명의 남녀가 진무앙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이번 판은 판돈만 일천 냥이 된다.
낙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박장인 진가장에서도 그야말로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초대형 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는 말이 있다.
도박판은 도검이 날아다니지 않지만, 그보다 더한 싸움터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