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46
246 뭘 바라는 거냐?
사고낭산에서 남쪽으로 오백여 리를 내려오면 높이가 이천오백 장에 달하는 웅장한 산이 있다.
사고낭산을 뛰어넘는, 제국 내에서 가장 높다는 공가산이다.
이 산의 중턱을 휘감고 있는 흰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만년설에 뒤덮인 봉우리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그 봉우리들 사이의 깊은 계곡에 수십 장 높이의 얼어붙은 폭포가 하나 있었다.
눈과 두꺼운 빙벽으로 뒤덮인 계곡과 거대한 얼음 폭포는 인세에 드문 절경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 년이 지나도 찾아오는 사람 한 명 없는 오지이기 때문이었다.
두께가 석 자에 달하는 얼음 폭포를 끼고 그 뒤로 돌아가면 사두마차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동굴이 나온다.
동굴 내부도 수정처럼 투명한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진무앙은 암월도와 함께 그곳의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눈을 꾹 감은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말라붙은 피딱지에 뒤덮인 몰골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지만 사고낭산의 싸움에서 입었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구멍이 났던 심장 부위는 상처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박살이 났던 왼팔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온전하게 붙어 있었다.
그런 진무앙의 옆에는 두 명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무표정한 얼굴의 몽지림이었고, 다른 한 명은 고풍스런 장검을 손에 쥔 자의궁장여인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자의궁장여인은 전대의 천상십화 중 한 명인 몽지림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절세의 미인이었다.
그들이 이 동굴에 온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두 여인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으으음…….”
진무앙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자의궁장여인이 눈을 번쩍 떴다.
진무앙의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초점이 흐트러진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그의 눈은 곧 초점을 잡았다.
눈을 돌려 몽지림과 자의궁장여인을 본 그의 눈에 얼핏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잠시 자의궁장여인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열을 셀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진무앙은 일어나 앉았다.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몽지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색투명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깃들어 있지 않은 시선이었다.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 몽지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서는 의식을 회복한 어떤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몽지림에게서 시선을 뗀 그가 자의궁장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암혼지주.”
힐끗 그녀의 무릎에 있는 장검을 본 진무앙이 말을 받았다.
“그렇군. 거의 구백 년 만인 것 같다.”
그가 여인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삼신기 중 하나인 자전신룡검을 얻었을 줄은 몰랐군, 자양화. 아니, 그녀의 혼백은 이미 흩어졌을 테니 몸만 그녀라고 해야 하는 건가.”
자의궁장여인, 그녀는 수향칠화의 첫째이자 이화궁주의 대제자인 자양화 오청연이었다.
물론 그건 겉모습일 뿐이고 안에 들어 있는 존재는 자전신룡검의 천무령이었다.
하지만 진무앙은 편한대로 자양화라고 불렀다. 다른 이름을 생각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으니까.
오청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받았다.
“이 몸의 주인이 가진 기억 속에는 당신이 없는데, 당신은 전부터 이 아이를 알고 있었나 보군요.”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향루에서 자양화가 본 진무앙의 얼굴은 인피면구를 쓴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 지금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참고로, 천무령은 빙의한 대상의 기억을 흡수한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진무앙은 하대를 하고 자양화는 존대를 하는데 둘 다 그걸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특이할 것도 없었다.
아주 긴 세월 동안 그들은 여러 차례 만났다.
진무앙은 늘 같은 모습이었고, 자전신룡검의 주인은 매번 달라졌지만, 그 안의 천무령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무령은 등장과 동시에 진무앙에게 패해 봉인당하기를 반복했고.
진무앙은 화제를 바꾸었다.
자양화가 어떻게 삼신기 중 하나의 주인이 되었는지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싸움 이후로 며칠이 지난 거냐?”
“삼 일이에요.”
“삼 일이라…….”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불멸의 힘을 얻은 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심장에 구멍이 난 적은 없었지만 사지가 잘려 나간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런 엄청난 상처도 회복되는 데는 반각도 걸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흘이라니.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런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느려도 회복이 되니까 다행이긴 한데…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원인을 제대로 알아봐야겠구나.’
그가 다시 물었다.
“묵령은?”
“그 아이는 사고낭산을 벗어나자마자 마병환요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암월도의 도갑에 자진해서 들어갔어요.”
진무앙은 오청연의 말을 단숨에 이해했다.
그는 바닥에 놓여 있는 암월도를 잡았다.
십 년 전부터 마병은 서로의 마병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억지로 숨기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발각되는 걸 피하기 위해 묵령은 끔찍하게 싫어하는 암월도의 도갑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도갑 안에 들어가면 마병의 기운은 완벽하게 차단되니까.
진무앙의 눈에 미묘한 빛이 떠올랐다.
묵령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 선택은 기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파천혈신륜의 본체를 얻어 천무령으로 각성한 이상 묵령이 진무앙의 곁에 계속 머물 이유는 없었다.
둘은 서로 돕는 관계였지, 주종관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묵령은 진무앙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진무앙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흐, 녀석, 내 옆에 있으면 다른 마병에게 먹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머무는 거냐? 뭐,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가 오청연에게 물었다.
“자양화, 그런데 마병환요라는 게 뭐냐?”
“그건 마병이 두 개 이상 합일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선계와 마계의 핵심 요인들 외에는 모르는 용어라 당신은 들어본 적이 없을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무앙은 얼음의 벽으로 막힌 동굴 입구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여기, 공가산이냐?”
“바로 알아차리는군요.”
“오래전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다. 그나저나 멀리도 도망 왔구나.”
“이것도 간신히 도주한 거예요.”
오청연은 자존심 상한 기색 하나 없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상대한 마병환요는 각성한 다섯 개의 마병을 하나로 모은 존재였어요. 당시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면 전멸했을 거예요. 당신이 암혼을 소환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당신은 그때 혼수상태였죠.”
그녀가 연이어 물었다.
“몸은 어때요? 외상은 다 나은 것 같은데…….”
“괜찮다.”
“정말인가요? 수천 년 동안 당신이 그런 중상을 입은 건 처음이잖아요?”
“네가 지금 내 상처를 걱정하는 건 아닐 거고… 내게 바라는 게 있는 거지? 어리석은 질문이었나? 그렇지 않았다면 날 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양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뭘 바라는 거냐?”
“마병환요를 죽여줘요. 그리고 제가 다른 신기들을 찾는 것도 도와줘요.”
“마병환요를 죽이는 건 그렇다치고… 너희 삼신기도 칠마병처럼 하나로 합일하려는 거냐?”
“그래요.”
“왜?”
“그렇지 않으면 강림한 성혈마가의 성녀를 상대할 수도 없으니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무앙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가 이렇게 빨리 수락할 거라고 생각지 못한 듯 자양화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당신이 이처럼 은원이 분명한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
“‘은혜는 배로 갚고 원한은 백배로 갚아라’가 내 지론이야.”
진무앙은 심드렁하게 대꾸한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차피 죽지도 않는 몸을 구해준 것에 비하면 내 보답이 너무 지나쳐. 그러니까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너한테 한 가지 요구를 해야겠다.”
“그게 뭐죠?”
“삼신기가 하나가 되면 마계로 가는 통로를 만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이건 묵령이 알려준 마계 통로를 만드는 네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맞아요. 사실이에요.”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만들어줘. 그게 내 요구 조건이다.”
자양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계와의 통로라니… 설마 거기에 가려고요?”
“그런 것까지 네가 알 필요는 없고. 만들기만 해라.”
“암혼지주, 그곳과 연결되는 통로를 만드는 건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잘못하면…….”
진무앙이 그녀의 말을 확 끊어버렸다.
“생각을 하지 마. 그냥 해. 안 하겠다고 하면 나도 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자양화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하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그럼 협상은 성립됐고…….”
진무앙은 암월도의 도갑을 보며 말했다.
“묵령, 잠깐 나와봐라. 네게 물어볼 게 있다.”
기이한 울림이 담긴 목소리였다.
즉시 도갑이 열리며 묵령이 톡하고 튀어나왔다.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얼굴을 보니까 천무령의 각성이 많이 진행된 모양이구나.”
[예. 암혼지주님이 꼼짝도 하지 않으니까 각성에 매진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방금 전 칠성을 넘었어요.]말을 하는 묵령의 피부엔 맑은 광채가 어렸고, 눈엔 신광이 이글거렸다.
묵령이 물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나와 있어도 괜찮아요? 마병환요가 금방 저의 마병기를 알아차릴 텐데요?]“얼마나 숨길 수 있냐?”
“짧군.”
진무앙이 이어서 물었다.
“묵령, 너는 마병환요의 마병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 같던데, 내가 생각한 게 맞냐?”
묵령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마계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철저한 곳이라 하위자는 상위자의 마기를 엿볼 수 없어요. 마병환요는 개별 마병에게는 상위자나 마찬가지고요.]진무앙이 투덜거렸다.
“그러면 계속 수세에 몰리게 되고, 암혼을 소환할 시점도 잡기가 쉽지 않은데…….”
오마병이 합일한 마병환요는 진무앙의 예상을 뛰어넘은 존재였다.
그는 아직 합일하지 못한 개별 마병을 끌어들일 생각으로 묵령에게 마병기를 뿌리라는 지시를 했었다.
하지만 찾아온 건 하나의 마병이 아니라 오마병을 하나로 모은 마병환요였다.
그리고 그녀는 진무앙을 만신창이로 만들 만큼 강력했다.
그런 마병환요를 쓰러뜨리려면 진무앙이 무조건 암혼을 소환한 상태여야 했다.
문제는 마병환요와 부딪칠 시간을 모르면 암혼을 소환할 수도 없다는 데 있었다.
암혼을 소환하면 즉시 적과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 시간이 늦어지면 주변이 먼저 초토화되기 때문이다.
즉, 마병환요와의 정확한 조우 시간을 모르면 암혼도 소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진무앙이 묵령에게 말했다.
“일단 넌 도갑에 들어가 있어라.”
[예.]묵령은 냉큼 입을 쩍 벌린 도갑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에게는 천무령의 각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조용한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암월도의 도갑 안은 그것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진무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양화, 이동하자. 묵령이 도갑에서 나왔었으니 이곳은 적에게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알았어요.”
잠시 후, 동굴은 텅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