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69
269 그 떼쟁이 자식을?
운남 총독부 관저.
총독 마유숭의 집무실로 풍채가 좋은 중년인이 들어섰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마유숭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뵙지 못한 사이 총독 각하의 신수가 더욱 헌앙해지신 것 같습니다.”
마유숭이 그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왕진명,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앉게.”
왕진명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마유숭의 안색은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진중했다.
그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어서 이런 표정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총독 각하,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 겁니까?”
“고민거리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왕진명, 내 오늘 희한한 소리를 들었네. 자네라면 그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불렀네.”
왕진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기꺼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총독 각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군요.”
“단 씨 일족 내부에 분열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자네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왕진명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미소가 싸악 사라진 그의 얼굴을 본 마유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점창파 장문인의 심복인 자네라면 아는 게 있으리라 추측했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
빠르게 당황한 기색을 수습한 왕진명이 말을 받았다.
“총독 각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마유숭은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연이어 질문을 했다.
“그 분열의 이유가 희귀한 보물 때문이라던데, 그게 뭔지 아는가?”
평정을 회복하는 듯하던 왕진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만큼 마유숭의 질문은 충격적이었다.
단 씨 일족의 분열과 보물에 대한 건 최고위급 인물들만이 아는 극비였다.
그것을 혈족이 아닌 마유숭이 알고 있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네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겠군.”
마유숭이 찌르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왕진명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장문인에게 최대한 빨리 내가 보잔다는 말을 전하게. 꾸물거리면 나와 맺은 밀약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말도 함께 말일세.”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만, 저는 총독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치미를 떼기엔 너무 늦었네.”
마유숭은 간단하게 왕진명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총독 각하, 귀인의 전언을 가진 자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마유숭의 눈빛이 강해졌다.
부하들이 귀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조차 구유밀령의 단주라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는 흑의복면인, 바로 주설란이었다.
“들여보내라.”
검은 면사로 눈 아래를 가린 흑의경장여인이 들어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말없이 품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 마유숭에게 건넸다.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 읽은 마유숭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가 여인에게 물었다.
“여기 적힌 내용이 사실이냐?”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에게 얻은 것이니 의심은 나중에 하시고 먼저 움직이시는 게 좋을 거라 하셨습니다. 단옥상을 손에 넣지 못하면 천후에 한을 남길 수도 있다는 말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왕진명은 흑의경장여인의 입에서 단옥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안색이 확 변했다.
여인이 그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행사는 마땅히 점창파와 협조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 지역을 가장 잘 아는 건 점창이니까요.”
마유숭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서신을 왕진명에게 건넸다.
왕진명은 허겁지겁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마유숭이 말했다.
“자네는 즉시 장문인에게 전서구를 띄우게. 나도 바로 정예를 투입시킬 테니.”
왕진명이 벌떡 일어나 포권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바람처럼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린 마유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 떠났는지 흑의경장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사도 없이 가다니, 위아래가 모두 싸가지가 없군.”
* * *
이해는 이름에 바다 해(海) 자가 들어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넓은 호수다.
그리고 호수의 서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웅장한 점창산과 조화를 이룬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배의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은 진무앙이 길게 하품을 했다.
눈꺼풀이 거불거리는 게 지루함을 참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간을 잡고 서서 호수를 보고 있던 오청연이 불쑥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호수를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진무앙이 눈을 껌벅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오청연이 말을 이었다.
“당신과 아홉 번째로 만났던 시절, 이곳에 왔던 적이 있어요.”
“아홉 번째면… 천오백 년 전이네.”
“예.”
“뭐하러 왔었는데?”
“사람 찾으러요.”
“누구를?”
“누구겠어요? 같이 당신과 싸워줄 사람이죠. 그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천무령을 각성한 상태의 그녀가 조력을 받을 생각을 했다면, 그는 무시무시한 고수여야 했다.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런 놈이 여기에 살았다고?”
“예.”
“누군데?”
“환우신마존 구화진.”
오청연의 대답을 들은 진무앙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떼쟁이 자식을?”
“그를 알아요?”
어느새 평정을 회복한 진무앙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고금팔대고수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놈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냐?”
“당신의 말투는 단순히 그의 이름만 아는 게 아닌데요?”
진무앙은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자식을 못 만났어?”
지금 오청연을 차지하고 있는 자전신룡검의 아홉 번째 주인은 천오백 년 전 진무앙에게 봉인당할 때 혼자였다.
만약 당시 그가 구화진을 만났다면 둘이 함께 진무앙을 상대했어야 했다.
오청연이 대답했다.
“내가 여기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가 종적을 감춘 지 오십 년도 넘은 뒤였어요.”
“그 즈음이면 구화진의 나이가 이 갑자를 넘었을 때였겠네. 그래도 그 자식이 이룬 무공의 경지를 생각하면 죽기엔 많이 이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운남성을 샅샅이 뒤졌어요. 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죠.”
진무앙이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네가 그 자식을 만날 팔자가 아니었나 보네. 하긴 만났다 해도 별 소용은 없었을 테지만.”
“왜요?”
“걔가 너하고 손잡고 나와 싸울 가능성은 눈곱만치도 없거든.”
“어떻게 그리 쉽게 장담할 수가 있죠?”
“할 만하니까 하지.”
“당신이 그와 어떤 관계였는지 알아야 내가 이해를 하죠. 말해줘요.”
진무앙은 귀찮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더는 말하기 싫다는 의사가 명확하게 담긴 표정과 몸짓이었다.
별수 없이 오청연은 호기심을 접었다.
그녀에게 그가 싫다는 것을 강요할 능력은 없었으니까.
한 시진 후, 고깃배는 점창산 아래 있는 한적한 어촌마을의 선착장에 진무앙 일행을 내려놓고 떠났다.
해가 붉은 노을을 뿌리며 점창산의 정상에 걸린 시각이었다.
공회가 진무앙에게 다가왔다.
“진 호위님, 이곳부터 북쪽으로 마을 십여 개가 연이어 있습니다요. 찾으시는 분은 그중 한곳에 머물고 계실 겁니다요.”
“그녀가 숨어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마을이 있습니까?”
공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룡촌에 계실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요.”
“수룡촌이요?”
“예. 그 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이백 년 전 단 씨 일족을 도와 왕국 재건 활동을 하던 사람들의 후손이거든요.”
“그 마을이 어딥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요. 거긴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굉장히 강합니다요. 그래서 두 분만 가시면 구경거리만 될 뿐,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할 겁니다요.”
“고맙습니다.”
진무앙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오청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녀가 진무앙에게 전음을 했다.
[무앙, 왜 이류무인 축에도 끼지 못하는 저 사람에게 존댓말을 써요?] [나보다 늙어 보이잖아.]언뜻 봐도 공회의 나이는 사십 전후로 생각되었다.
[예? 그게 이유예요?] [다른 이유가 필요해? 젊은 놈이 연장자한테 반말하는 거 보기 안 좋아.]그 말을 끝으로 진무앙은 앞에 걷는 공회의 뒤를 따랐다.
뒤지지 않으려 걸음을 옮기는 오청연의 얼굴엔 ‘참 종잡을 수 없는 남자야’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진무앙은 무한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칠마병과 삼신기를 장난감 다루듯 했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삼류무인에게 존댓말을 하는 모습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수룡촌은 진무앙 일행이 도착한 마을에서 삼십여 리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행이 그곳에 도착하는 데는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공회는 열심히 달렸지만 굼벵이처럼 느린 그의 속도를 보다 못한 진무앙이 그를 옆구리에 끼고 수룡촌까지 달렸기 때문이다.
공회는 수룡촌 인근의 언덕 위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진무앙과 오청연을 바라보았다.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그도 강호의 절정고수들이 놀라운 경공을 펼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삼십 리를 반 각 만에 주파하는 무인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절세고수가 눈앞에 둘이나 있는 것이다.
그들의 가공할 경공 속도를 몸으로 겪었으니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십여 가구로 이루어진 수룡촌의 전경을 훑어보던 진무앙이 중얼거렸다.
“평온하군.”
그가 공회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도착은 했는데, 여기서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회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제 죽마고우인 엄탁이 이 마을 토박이입니다요. 만약 찾으시는 분이 이곳에 은신하고 있다면 그 친구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요.”
그가 조심스럽게 진무앙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저… 아무래도 두 분과 함께 움직이면 금방 눈에 띄는 데다 마을 사람들의 경계와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저 혼자 내려가서 친구를 만나고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요?”
그는 자신의 말이 행여나 진무앙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운 듯 말을 하면서도 연신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진무앙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타당한 의견이군요. 그렇게 하시죠.”
안색이 밝아진 공회가 토끼처럼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진무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임아.”
그의 머리 위, 허공이 칼로 벤 듯 갈라지며 고풍스런 곤룡포를 입은 몽지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공회를 지켜라, 그가 공격당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몽지림의 신형이 유령처럼 흐릿해지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