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297
297 너의 최후에 대해서
찬연하던 빛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오청연은 눈을 크게 떴고, 진무앙은 혀를 찼다.
그들과 십여 장 떨어진 곳에 태양이화창을 든 중년인이 서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적색무복을 입은 그는 잔인한 눈매에 매부리코를 가진 사내였다.
특이한 건 그의 눈이 파랗고 피부가 희다는 것이었다.
진무앙을 본 그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파천?]“이런 짓을 한 놈이 누군가 했더니, 벽안혈귀, 너였냐?”
중년인, 벽안혈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드디어… ‘그’의 말대로구나. 기다렸더니 저놈이 왔어. 그런데 그가 약속한 날보다 좀 이른 거 같은데…….]진무앙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말보다 벽안혈귀의 존재가 그를 더 놀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물었다.
“너 꼴이 그게 뭐냐?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보이는데?”
[네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놈? 삼백 년이 흐르니까 나한테 맞은 기억이 다 사라진 거냐? 다시 목을 꺾어주랴?”
벽안혈귀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하하하, 파천, 안 그래도 널 보지 못하고 죽어서 눈을 못 감을 정도로 억울했는데 제 발로 찾아오다니. 그렇게 외면만 하던 하늘이 드디어 한 번은 내 소원을 들어줄 모양이구나.]“이곳에서 삼백 년 동안 혼백으로 지낸 모양인데, 그래서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돌아버린 거냐?”
벽안혈귀가 버럭 소리쳤다.
[돌긴 누가 돌아!]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걸 듣고 있던 오청연이 끼어들어 진무앙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응. 벽안혈귀라고. 서역에서 닥치는 대로 살인을 하다가 천산을 넘어오려고 했던 미친 살인귀야.”
“그런 사람하고 어떻게 얽힌 거예요?”
“저 자식이 천산을 넘을 때 나는 거기서 한참 잘 자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냥 가면 될 걸 저 자식이 날 깨우더라고. 그리고 잠도 덜 깬 나를 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 거야, 지금처럼. 뭐, 그러고 그냥 갔으면 나도 손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저 자식이 날 보고 천산 너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며 자기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요?”
“놈의 목을 꺾어서 당시 내가 애용하던 천산 무저갱에 던져 버렸지.”
“아…….”
“그랬는데, 여기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벽안혈귀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떠든 거냐?]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두 번 죽고 싶냐?”
[으하하하하,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왜? 네가 혼백만 남은 상태라서 내가 죽이지 못할 것 같냐?”
[훗, 육체가 없는 나를 무슨 수로 죽이겠다는 거냐? 하지만 나는 이 태양이화창으로 너를 죽일 수 있지.]진무앙은 벽안혈귀가 뭐라고 떠들든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금강고 어딨냐?”
벽안혈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금강고? 그게 뭐냐?]진무앙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몰라?”
진무앙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정상적인 대화를 하려면 일단 널 꿇어 앉혀야 할 것 같네.”
[흐하하하하하, 그전에 네 심장에 구멍을 내주마.]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강제로 각성시킨 태양이화창으로?”
[이거면 충분하다.]“그럼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증명해 봐.”
진무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안혈귀가 태양이화창을 앞으로 죽 내밀었다.
찬연한 황금빛이 작렬했다.
동시에 가공할 열기를 품은 기운이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진무앙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진무앙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벽안혈귀의 우측면 일 장 떨어진 곳에 도착해 있었다.
이형환위와 유성탄영, 이매부운이 연이어 펼쳐진 결과였다.
동시에 암월도가 도갑을 벗어났다.
번쩍-
묵청빛을 띤 초승달 형태의 도강이 벽안혈귀의 허리부터 어깨까지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쐐애애액-
암월구식의 제일초 삭월이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벽안혈귀는 삭월도강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그는 태양이화창으로 진무앙의 목을 베어갔다.
쑤와아아앙-
날이 닿기도 전에 예의 무시무시한 열기가 먼저 진무앙을 덮쳐 왔다.
진무앙은 창을 피하지 않았다. 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벽안혈귀의 눈에 잔혹한 빛이 떠올랐다.
[죽어라, 파천!]살기로 가득찬 일갈과 함께 태양이화창의 속도와 열기가 배가되었다.
창날이 진무앙의 목을 베려는 순간, 환상처럼 나타난 고풍스러운 형태의 륜이 그 앞을 막았다.
묵령의 파천혈신륜이었다.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륜과 부딪친 창날이 막강한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기겁한 벽안혈귀가 상체를 뒤로 젖혔다.
찰나 삭월도강이 방향을 바꾸어 태양이화창을 쥔 벽안혈귀의 오른팔을 어깨부터 잘라 버렸다.
그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빨랐지만 암월도를 피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서걱!
[끄아악!]잘려 나간 오른팔이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지는 것을 본 벽안혈귀가 비명을 질렀다.
번개처럼 그와의 거리를 좁힌 진무앙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태양이화창을 손에 쥐며 발로 벽안혈귀의 가슴을 인정사정없이 내질러 버렸다.
퍽-
[컥!]격한 신음을 토한 벽안혈귀가 십여 장이나 뒤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꿈틀거리며 일어나 앉은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육신이 없는 혼백인데…….]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귀신 따위, 나한테는 안 통해, 새끼야.”
벽안혈귀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으아아아아!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그는 분명 오백 년 동안 태양이화창을 지키면 널 죽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다!]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벽안혈귀가 했던 ‘그’라는 말이 이제 와서야 신경을 긁은 것이다.
벽안혈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진무앙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의 혼백을 혼돈지기가 엉망으로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무앙은 그를 공격할 때 작정하고 암월도에 혼돈지기를 실었다.
혼돈지기는 실체를 가진 존재에게도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지만 실체가 없는 존재에게는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태초에 실체가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거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돈지기에 타격을 당한 벽안혈귀는 몸을 가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력화된 상태였다.
그가 진무앙에게 소리쳤다.
[네놈은 왜 십 년이나 앞서 이곳에 나타난 거냐? ‘그’는 널 삼백 년 뒤에 이곳으로 보내겠다고 내게 약속했단 말이다! 그때가 되려면 아직 십 년이 남았다고!]진무앙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몸을 세운 벽안혈귀의 멱살을 틀어쥐며 물었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개소리를 한 거야?”
그때까지 잘만 떠들던 벽안혈귀가 갑자기 조가비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진무앙이 물었다.
“분명 그놈이 날 죽일 수 있다고 했단 말이지? 그럼 나를 알고 있는 놈이라는 말인데… 누구냐, 말해!”
벽안혈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통쾌한 대소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흐흐흐… 후하하하하하하! 그렇군. 그런 것이었군.]“이 개자식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거야?”
[파천, 궁금해 죽겠지?]“약 올리냐?”
[흐흐흐흐흐흐흐. 궁금하면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곳으로 가봐라. 그럼 알게 될 거다.]“뭘?”
[너의 최후에 대해서. 으하하하하하하하!]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벽안혈귀의 몸이 점점 흐릿해졌다.
다섯을 세기도 전에 벽안혈귀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야기책인 서유기의 손오공이 머리에 썼다는 금고아와 흡사하게 생긴 금빛의 머리띠가 떨어졌다.
땡그랑!
그것이 진무앙이 찾던 금강고라는 물건이었다.
동시에 바닥을 가득 메웠던 기묘한 문양들도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진무앙은 텅 빈 손과 금강고를 번갈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구화진이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듣게 설명해 주었을 텐데…….”
오청연이 그에게 물었다.
“구화진의 지식이 필요할 정도의 상황이에요?”
“응. 아무래도 어떤 놈이 벽안혈귀에게 주술과 기문둔갑을 펼친 것 같거든. 그런데 나는 그쪽으로는 별 관심이 없어서 잘 몰라. 화진이가 전문이지.”
“구화진은 풍정도에서 완전히 등선했잖아요.”
“그러게… 염병…….”
투덜거린 진무앙이 금강고를 주워 들었다.
오청연이 말했다.
“삼색이가 말한 ‘그’는 천 년 전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벽안혈귀가 삼백 년 전 인물이라고 했고요.”
“맞아. 삼색이가 말한 ‘그’는 ‘벽안혈귀’가 아니야. 벽안혈귀가 ‘그’라고 했던 놈하고 삼색이가 말한 ‘그’가 동일인이겠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이 천하에 둘이나 있을 리는 없으니까.”
진무앙은 광장의 끝에 서서 구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뜻언뜻 광대한 천외별부의 숲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한 건 ‘그’라는 놈이 ‘회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자라는 거지.”
“게다가 그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고요.”
오청연의 말에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다…….”
“그가 누군지 짐작이 가는 사람 없어요?”
“있어.”
“누군데요?”
“개새끼.”
“…예?”
오청연은 어리둥절해졌다.
정체가 아니라 욕을 해버리면 어떻게 알아듣는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놈은 회랑을 만들 능력도 있고, 나를 죽이고 싶어도 하지. 하지만…….”
“하지만… 뭔데요?”
“놈은 세상의 경계를 넘어오지 못해. 그러니 여기 와서 이런 짓을 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놈이 아니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은 없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어우, 머리야…….”
진무앙이 손으로 머리를 싸안는 것을 본 오청연이 말했다.
“파천혈귀가 사라지기 전에 한 말, 기억해요?”
진무앙이 눈을 번뜩였다.
오청연이 말을 이었다.
“그는 궁금하면 모든 일이 시작된 곳으로 가보라고 했어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것일 수도 있어.”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요? 어쨌든 그곳이 어딘 줄 알고 있어요?”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쉽게 생각할 말이 아니야. 놈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에 따라서 답이 달라질 수 있는 말이었어.”
“그래도 대충 짐작할 수는 있잖아요.”
“놈이 뭔가 알고 한 말이라면, 두 곳 중 하나일 거야.”
“두 곳? 어딘데요?”
“한 곳은 천산의 무저갱. 내가 죽여서 그곳에 던져 놓았던 놈이 아까 그 꼴로 여기에서 지내고 있었으니 가능성이 있지.”
“그렇겠네요. 그럼 나머지 한 곳은요?”
“총령.”
“둘 다 먼 곳이네요.”
총령은 천산 너머에 있는 파미르 고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청연이 물었다.
“그런데 천산은 그럴 수 있지만 총령은 어째서 후보지가 되는 거죠?”
진무앙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내가 불멸의 권능을 얻은 곳이니까.”
오청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갑자기 그때까지 진지하던 진무앙의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안 가.”
“예?”
“천산이고 총령이고. 내가 귀찮게 거길 왜 가.”
“…예?”
“여기서 난향과 내 여자들하고 놀기도 시간이 부족한 판에 거길 왜 가냐고.”
“벽안혈귀가 한 말, 궁금하지 않아요?”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안 궁금해.”
“그래도…….”
“나를 상대로 꿍꿍이를 가진 놈이 있다면, 그놈이 오라고 해. 벽안혈귀는 분명히 ‘그’라고 했어. ‘그녀’라고 하지 않았다고. 나는 사내 놈 보러 천산 너머까지 가고 싶지 않아.”
오청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그런 뜻이었어요?”
“응.”
짧게 대답한 진무앙이 태양이화창을 오청연에게 휙 던졌다.
“챙겨.”
그 말과 함께 그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가자. 삼색이하고 곰탱이가 기다리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오청연이 뒤이어 신형을 날렸다.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