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12
312 세심하게도 준비했네
적막한 어둠에 잠긴 태마궁의 뒤편 절벽 위.
바람에 눈처럼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궁의 구층 지붕을 내려다보고 있던 신녀가 힐끗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언제 나타났는지 천군이 뒷짐을 지고 서서 그녀처럼 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녀가 천군에게 말했다.
“천군은 무서운 분이네요.”
천군이 어리둥절한 채하며 물었다.
“내가 말입니까?”
“예.”
“신녀를 무섭게 했던 기억은 없습니다만.”
“나를 직접 겁박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천군이 꾸며놓은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렇습니까?”
“예.”
“신녀가 겁을 먹지 않도록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군요.”
신녀의 입가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종가주가 천군의 진면목을 안다면 지금처럼 허술하게 경계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 진면목이 경계할 만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시는군요.”
“나는 진실을 말한 것이었는데, 신녀에게 그렇게 보였습니까?”
“예.”
계속해서 그녀가 물었다.
“측근들도 모르죠?”
“무엇을 말입니까?”
“천군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뿌려놓은 것 같은 씨앗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 어떤 꽃을 피우게 될 것인지 말이에요.”
가뜩이나 속을 알기 힘든 천군의 눈이 무저갱처럼 깊어졌다.
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내 속을 읽어낼 만큼 뛰어난 제자가 있다면 내가 전신마가의 가주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언제부터 진무앙을 지켜본 거예요?”
“얼마 안 되었습니다, 삼십 년쯤.”
“그가 변방에서 낭인 생활을 하던 때네요.”
“맞습니다.”
“어떻게 그를 찾은 거죠?”
“운이 좋았습니다.”
“과연 운이었을까요?”
천군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녀가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환우지약의 환무경을 공야승추에게 넘길 때 속이 쓰리지 않았나요?”
천군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신녀는 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나도 이곳에서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바쁘셨겠죠. 성녀를 찾아야 했을 테니.”
“그분을 찾으러 천하를 다니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죠.”
“부수입을 상당히 많이 얻으셨군요.”
“이 세계 어딘가에 살아계실 성녀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흠, 그럼 신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되는지 들어볼까요?”
신녀는 거침없이 천군에게 되물었다.
“조금 전의 질문에 답해주세요. 속이 정말 쓰리지 않았나요?”
“환무경만으로 마병의 본체를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속이 쓰릴 리가 있겠습니까? 진무앙을 잡는데 사용할 수 있다면 환무경은 오히려 본래의 쓰임새보다 더 활용도가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십만대산을 언제 찾을지 예상하기 어려운 일 아니었나요?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요.”
“환무경만이라면 그를 십만대산으로 부르기 힘들었겠죠.”
“그래서 손중악을 부추켜 공야승추를 제거한 건가요?”
“맞습니다. 진무앙이라면 언제가 되었든 손중악에게 공야승추가 제거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게 뻔했죠. 그러면 그의 성격상 십만대산으로 달려오는 건 예정된 수순이고요.”
“긴 포석이었네요.”
“이십 년을 예상했는데 그는 십 년 만에 왔습니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반으로 줄었습니다.”
신녀는 잠시 천군을 보다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는 걸 모르는 척, 한 것도 안 한 척하면서 사는 것도 쉽지는 않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힘듭니다. 하지만 재미있죠.”
신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장기판 위에서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보는 건,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긴 해요.”
“신녀께 절인봉에서 쉴 곳을 마련해 드린 건 휴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씀하신 걸 들으니 다른 목적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신녀가 가벼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예의상 한 말입니다.”
“호호호호호!”
신녀는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그친 그녀가 물었다.
“진무앙을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세요?”
“반반입니다.”
“천군을 알게 된 후로 그렇게 자신 없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네요.”
“그는 나로서도 장담하기 힘든 적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잠시 신녀를 바라보던 천군이 툭 던지듯 물었다.
“오늘 내게 힘을 보태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마병실혼인을 유인해서 들여보냈지만 여전히 전력이 부족합니다.”
신녀는 빙그레 웃으며 지체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 없어요. 알아서 하세요.”
“아쉽군요.”
“천군도 아시다시피 본 성혈마가는 파천 진무앙과 아무런 은원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내가 천군을 돕는다면 그와 적이 되겠죠. 영원을 사는 남자와 적이 되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네요.”
“나와 손을 잡는다면 절반의 승률이 팔 할까지 올라갑니다.”
“호오, 그렇게나요?”
“예. 그를 잡는다면 그와 적이 되는 걸 걱정하실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신녀는 또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천군. 저는 승률이 십 할인 싸움만 해요.”
“땅 짚고 헤엄치는 걸 너무 좋아하시면 손발이 흙에 묻혀서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녀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천군,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군요. 당신은 그를 잡으면 무너진 십만마교를 다시 세울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그와 적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뭐가 있죠?”
천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성혈마가는 전신마가처럼 천하를 경영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가문이었다.
대대로 가주된 사람들은 물욕도 없어서 돈으로 매수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즉, 성혈마가는 진무앙과 적이 되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는 것이다.
“신녀에게 어떤 득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부질없는 노력이 될 거예요, 천군.”
신녀는 천군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피곤해서 이만. 내일 아침에 결과가 나오면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쉬십시오, 신녀.”
신녀의 신형이 구름처럼 둥실 떠오르더니 절벽 아래로 표표하게 날아 내려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천군의 눈빛이 음험해졌다.
‘눈치 빠른 계집… 아쉽군. 미로에 들어가기만 하면 내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는데.’
* * *
시공의 미로.
진무앙은 공야승추를 돌아보며 말했다.
“곰탱아.”
“예, 무존.”
“환무경은 어디다 숨겼냐?”
“수옥이에게 맡겼습니다.”
“옥마단주 남수옥을 말하는 거냐?”
“예.”
“뭘 믿고 걔한테 맡겨?”
“희매가 제 곁을 떠난 후로 수옥이 사해집마부의 안주인이었습니다.”
“그랬냐?”
“예.”
“금강주는?”
“그것도 수옥이에게 있습니다.”
“어이가 없네…….”
“중악이 녀석도 제가 그것들을 그녀에게 맡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공야승추는 조강지처에게 버림(?)을 받은 기억 때문에 여자를 믿지 않았다.
사해집마부뿐만 아니라 천하에 그런 그의 성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절세의 보물들을 남수옥에게 맡겼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진무앙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등잔 밑이 어두웠군.”
그때였다.
두 사람의 발밑, 미동도 없던 검은 늪의 표면이 느릿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진무앙이 공야승추에게 말했다.
“너, 잠깐 암월도갑 안에 들어가서 자고 있어라.”
“왜요?”
“이것들이 저 푸른 안개에 수작질을 해놓은 것 같아서 그래.”
“위험해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십만마교를 우습게보지 마, 새끼야. 걔들한테 잡히면 죽는 걸로 안 끝나.”
“그럼요?”
“방금 전의 금포복면인들처럼 자기 죽을 걸 알면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명령을 따르는 꼭두각시가 된다.”
“제가 그놈들의 고문을 받으며 버틴 세월이 십 년입니다. 그런 잡기는 저한테 안 통합니다, 으하하하하하!”
진무앙은 광소를 터트리는 공야승추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며 말했다.
“후… 이 앞뒤 분간 못하는 곰탱이 자식. 네가 버틴 게 아니라 걔들이 봐준 거야.”
공야승추의 눈이 커졌다.
“…진짜요?”
“이 와중에 내가 너 데리고 농담하겠냐?”
“이 후레잡놈의 새끼들을 그냥!”
진무앙이 암월도의 도갑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들어가.”
“안 들어가면 안 됩니까? 거기 답답한데…….”
공야승추는 과거 암월도갑의 내부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진무앙이 강제로 보게 만든 것이었지만.
진무앙이 고개를 저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들어가. 지금의 너는 나한테 거추장스러운 짐밖에 안 된다.”
공야승추의 안색이 울적해졌다.
사해집마부주로 일 갑자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마도를 호령하며 살아온 그가 언제 이런 말을 들어봤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은 도갑을 열고 공야승추를 안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이제 좀 홀가분하군. 흐흐흐.”
그가 낮게 웃을 때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변한 건 안개의 색이었다.
푸르스름하던 안개가 회색으로 바뀌더니 곧 먹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검게 변했다.
동시에 발아래 늪이 점점 맑아지더니 투명한 빙판처럼 변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발밑의 광경을 본 진무앙의 입끝이 비틀렸다.
“그 열두 놈이 내 손을 빌려 자살한 이유가 이거였군.”
그의 발아래엔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광장의 중앙에 다섯 개의 보석관과 열두 개의 황금빛 관이 놓인 게 보였다.
그리고 수천 개의 관이 보석과 황금관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특이한 건 그 모든 관이 검붉은 빛을 띤 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진무앙의 눈에 광포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흐흐흐흐흐.”
그의 입술 사이로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을 그친 그가 중얼거렸다.
“감히 십만마교의 떨거지들 따위가 나를 이용해 부활을 도모했단 말이지…….”
방금 전의 웃음소리만큼이나 살기가 짙게 어린 목소리.
그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 망상, 오늘부로 내가 깨부숴 주마.”
그는 암월도를 도갑에서 꺼내 도의 끝을 바닥에 댔다. 그리고 혼돈암혼공을 끌어올렸다.
도의 끝에서 검푸른 섬광이 이글거리며 흘러나왔다.
쩌저저저저저적-
투명하게 변한 바닥이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하지만 바닥이 얼마나 두꺼운지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암월도의 도첨에서 이글거리는 혼돈지력의 빛이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바로 그 순간,
쿠와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닥이 아니라 천장이 무너졌다.
흠칫하며 고개를 든 진무앙은 까마득한 천장의 중앙을 무너뜨리며 유성처럼 낙하하는 네 개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은 그의 눈빛이 삼엄해졌다.
낯설지 않은 기운, 그것은 바로 마병의 기운이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무앙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병실혼인, 참 세심하게도 준비했네.”
연이어 그가 중얼거렸다.
“이놈의 동네, 진짜 걸리적거리는 거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