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2
032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수향루.
끙끙거리며 앓는 소소에게 추궁과혈을 해주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던 진무앙의 귀가 쫑긋했다.
정문 쪽에서 미묘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해가 뜨긴 했지만, 새벽까지 영업이 이어지는 기루의 특성상 지금은 수향루 전체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낙양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평소 이 시간에 수향루를 찾는 방문자는 없었다.
이 시간에 소란스러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때 총관 이수홍의 목소리가 진무앙의 고막을 두드렸다.
“공자님, 시간이 너무 이릅니다. 이곳이 아무리 기루라 하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시려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보통 때보다 많이 높은 이 총관의 목소리는 그녀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진무앙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수홍은 최대한 정중하게 손님을 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바닥에서 평생을 보낸 여인이라 어지간한 무림인은 기세로 누를 정도로 성격이 드셌다.
그런 그녀가 육두문자를 쓰지 않는다는 건 상대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뜻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가 아님은 나도 아오. 그런데도 내가 이 시간에 수향루를 찾아온 건 그만큼 그를 만나는 일이 내게 중요하기 때문이오.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으니 나를 진무앙에게 안내해 주시오.”
뒤이어 힘이 가득 실린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진무앙은 기겁을 했다.
“허걱! 저 목소리는 휘아?”
목소리의 주인공이 사마휘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으로 달려갔다.
휘리릭-
천하제일의 경공대가라고 알려진 개방의 비천유룡개도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른 속도.
한걸음에 창을 타 넘은 진무앙은 주변 기루의 지붕을 건너뛰며 미친 듯이 달렸다.
최대한 수향루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지금 휘아한테 잡히면 죽는다.”
몇 시진 후.
낙양의 서남쪽으로 삼십 리쯤 가면 천하명승이라는 용문석굴이 나온다.
용문 석굴은 항하의 지류인 이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용문산과 향산에 조성된 이천삼백여 개의 석굴과 십여만 개에 이르는 불상을 총칭해 부르는 말이다.
가장 유명한 건 봉선사에 있는 높이 육 장에 달하는 마애석각이다.
진무앙은 마애석각과 벌집처럼 뚫려 있는 수많은 동굴을 왼쪽에 두고 이수 강변을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좀 일찍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준마를 타고 떠난 지 두 시진이나 지나서 이야기하면 어떡하냐고. 이럴 거면 나한테 말이라도 한 필 사주고 일을 시키던가.”
구시렁구시렁.
진무앙은 달리면서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그는 지금 수향루를 떠난 곡은설과 위명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
난향이 말했던 사후 봉사다.
어차피 그녀와 약속을 했던 터라 마다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그가 그들이 떠난 것을 알게 된 건 두 시진이나 지난 후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난향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사마휘를 피해 수향루를 떠났다가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진무앙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하필 휘아가 꼭두새벽부터 찾아올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는 사마세가의 적통이자 무림맴 잠룡대주인 그(?)가 수향루를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기루를 출입하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사마세가와 무림맹은 물론이고, 본인의 평판에 부담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사마휘는 그런 그의 의표를 정확하게 찔렀다.
방심했었달까.
“내가 비룡무관으로 불러낸 이유를 휘아가 알아낸 모양인데…….”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다.
사마휘는 천재였다.
진무앙이 자신을 비룡무관으로 오라고 한 이유를 조사했을 것이고, 알아내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네가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는 나도 알아. 그래도 꼭두새벽부터 남의 직장까지 찾아오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난향이 날 자르면 자기가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투덜투덜, 구시렁구시렁.
어쨌든 그와 사마휘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 사마휘의 분노가 어느 정도 누그러질 거라는 기대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진무앙이 그와의 만남을 미루는 정말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지금 그를 만나봐야 쌍검류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그의 창천질풍류에 목이 잘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일밖에 없었다.
“오늘은 어찌어찌 넘어가긴 했는데… 기루를 직접 찾아올 정도면 화가 엄청나게 난 모양인데, 앞으로가 큰일이네. 그날이 언제더라…….”
구시렁거리며 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뭔가를 계속 계산했다.
“휘아를 못 만난 지 너무 오래돼서 정확하게 계산이 안 되네. 이번 일 끝나면 정확한 날짜를 뽑아봐야겠다.”
딴생각을 하는 듯하면서도 그는 간간이 지면을 확인했다.
설렁설렁 보는 듯했지만, 그는 정확하게 곡은설과 위명신의 흔적을 뒤따라가고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며 단련된 그의 추종술 실력은 당세에 비교할 사람이 드물 만큼 탁월했다.
“그새 멀리도 갔네.”
곡은설과 위명신이 탄 말의 흔적은 이수의 나루터로 이어져 있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넌 진무향은 향산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적지 않은 수의 동굴과 불상들이 있었지만 진무앙은 그것들에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종교는 물론이고 권선징악이라거나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남자였다.
세상에 그런 것이 실재했다면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지 않았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각설하고, 향산 깊숙한 곳으로 접어들던 진무앙이 걸음을 멈췄다.
“뭐냐… 이거?”
아름드리나무들로 둘러싸인 그곳은 사방 오육 장가량의 공터였다.
쪼그리고 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지면을 살피던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뒤엉킨 발자국들과 점점이 떨어져 있는 핏자국, 부러지고 누운 나뭇가지와 수풀은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무앙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숨과 함께 씁쓸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양일청, 이러면 안 돼… 난 피를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이건 진심이라고…….”
그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적의 수는 열셋, 풀이 누운 높이와 각도를 보면 그들의 무공은 일류와 이류 사이. 보법을 봤을 때 산적들 따위는 아니고, 무공을 체계적으로 배운 놈들인데… 두 사람은 상처를 입은 채 사로잡혔군……. 곡은설을 살려둔 이유는 알겠는데, 위명신은 왜 죽이지 않은 거지?”
거대한 나무들 사이를 훑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후우… 너희, 그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가 난향한테 얼마나 구박을 받을지 짐작도 못하겠지?”
진무앙의 신형이 바람처럼 숲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향산의 깊은 계곡.
한때 광산이었던 듯 상당히 넓은 평지 위에 여러 채의 낡은 집이 있고, 뒤편에 시커먼 동굴이 뚫려 있었다.
곡은설과 위명신은 그곳에 있었다.
곡은설이 입고 있는 백의는 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피가 아니라 위명신의 것이었다.
어깨와 가슴, 허벅지, 손목 등 곳곳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그는 피를 흘리며 곡은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곡은설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위랑…….”
위명신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고, 숨결도 가늘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곡은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남색 무복을 입고 손에 단창을 든 십수 명의 남자가 에워싸고 있었는데,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양한상이었다.
비웃음을 머금은 양한상이 말했다.
“명신아, 주제를 알아야지. 아버님을 배신하고도 네가 살아남을 줄 알았냐?”
위명신의 입술이 달싹였다.
“사… 사형…… 저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 제발… 곡 소저만은 살려…….”
“큭, 미친놈!”
어처구니없다는 듯 위명신의 말을 끊는 양한상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뚫린 입이라고 별 개소리를 다 지껄이는구나. 저년의 청부를 맡은 놈이 우리 무관에 와서 어떤 깽판을 쳤는지 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말이 나와? 아버님의 체면이 무관 식솔들 앞에서 똥통에 처박혔는데?”
곡은설이 양한상에게 말했다.
“양 공자님, 제가… 제가 따라갈게요. 제발 위랑은 살려주세요……. 흑흑.”
곡은설에게 시선을 돌린 양한상의 눈에 진한 비웃음과 살기가 일렁였다.
“훗. 곡은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내가 명신이를 살려둔 건 두 눈 똑바로 뜨고 네년이 우리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얼마나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지 똑똑히 보게 하기 위해서야. 이건 아버님의 지시이기도 해.”
곡은설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양한상이 말을 이었다.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자결할 생각이라면 포기해. 그런 짓을 한다면 네 동생들은 지옥을 보게 될 테니까. 잘 생각해 봐. 네년이 순순히 우리에게 다리를 벌려준다면 내 마음이 변해서 명신이를 살려줄지도 몰라.”
둘러선 사내들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어렸다.
곡은설은 수향칠화 중에서도 몸매가 아름답기로 첫손 꼽히던 여인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몸을 훑어내리는 사내들의 눈에 음심이 가득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양일청의 허락이 떨어진 상태가 아닌가.
양한상이 그들에게 말했다.
“저년의 옷을 벗겨라.”
“예, 소관주님.”
사내들 중 둘이 침을 꿀떡꿀떡 삼키며 곡은설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쯧, 내가 중원까지 와서 이런 개막장스러운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혀를 차는 사내의 목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놀란 양한상과 비룡무관의 제자들이 계곡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진무앙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서 있었다.
그를 본 양한상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진무앙?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아비는 그래도 상황파악 정도는 하던데, 아들놈은 그것마저도 못하는군.”
명백한 비웃음.
그러나 양한상은 화를 내는 대신 얼굴 가득 완연한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여기서 네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뜻밖이긴 하지만 정말 기분은 좋구나. 아버님이 네놈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셔서 속만 끓이고 있던 참이었거든. 여기서 네놈을 죽이면 아버님도 나를 질책하지는 못하시겠지.”
진무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미묘한 부조화가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위화감.
그가 말했다.
“나, 아직 은퇴 전이거든.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가급적 피를 보는 일은 피하겠다고 결심했지만, 굳이 마다하지는 않아.”
말을 하던 진무앙은 가슴이 뜨끔했다.
난향이 허락 없이 사고치면 자르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향의 목소리는 곧 사라졌다.
그는 순간에 충실한 남자였다.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진무앙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비웃음이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낀 양한상이 이를 갈며 비룡무관의 제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으드득, 어서 저 개자식을 잡아 와! 내가 직접 저놈의 입을 찢고 사지를 자르겠다. 그런 후에도 지금처럼 혀를 놀리는지 보겠다.”
단창을 고쳐 잡은 남의인들이 살기로 가득한 눈을 번들거리며 진무앙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수는 열 명이 넘었다.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휘두르는 단창의 궤적은 뒤엉키지 않았고, 창날의 끝도 흔들림이 없었다.
평소 그들이 상당히 엄격한 수련을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슈슈슈슉!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네 자루의 창이 진무앙의 양어깨와 허벅지로 날아들었다.
창에 꿰뚫린다 해도 목숨을 잃지는 않지만 움직임은 봉쇄되는 부위들이다.
진무앙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은 분위기.
그들보다 강해서, 아니면 전투 경험이 더 많아서 긴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진무앙의 눈동자에 은은한 핏빛이 어렸다.
양한상은 그를 전혀 몰랐다.
그가 얼마나 피와 죽음을 사랑하는 남자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