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20
320 이기면 되잖아
빛이 사라지고 진동이 멈추었지만 사해집마부는 어수선했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아 부 내의 모든 사람이 복구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횃불이 사방을 대낮처럼 밝혔고, 수십만의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별궁의 대전.
상석에 앉은 진무앙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앞의 공야무룡과 신완아를 보고 있었다.
그가 혀를 차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쌀이 익어 밥이 된 거냐?”
공야무룡이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쌀이 익어 밥이 됐다는 게 뭔 말이우?”
“곰탱아, 모르면 닥치고 있어. 그럼 중간은 가.”
공야무룡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우!”
진무앙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공야무룡을 구박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데 너만 알아듣지 못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새끼야.”
움찔한 공야무룡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대전엔 그들 외에도 오청연과 맹노광, 그리고 전대 옥마단주 남수옥이 있었다.
공야무룡이 맹노광에게 물었다.
“맹 노야는 주공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하셨수?”
맹노광은 혀를 차며 되물었다.
“완아는 진 호위 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들은 것 같은데, 왜 너만 그러냐?”
공야무룡이 신완아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엔 은은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공야무룡이 폭발했다.
“아, 진짜! 다들 왜 나만 갖고 그래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고개를 휘휘 저은 맹노광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휴… 룡아, 쌀이 익어 밥이 되었다는 말은 너와 완아가 같이 잤다는 뜻이다.”
그 말에 신안아처럼 볼이 붉어진 공야무룡이 진무앙에게 말했다.
“그런 말씀이셨수? 좀 쉽게 말해주시지.”
“난 쉽게 말했어, 이 곰탱아. 네가 알아듣지 못한 거지.”
그의 시선이 남수옥을 향했다.
“수옥, 어떻게 된 거냐?”
남수옥이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손철기가 완아에게 환미신향을 사용했습니다.”
말을 잇는 그녀의 얼굴과 말투에는 극한의 경외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공야승추의 여자로 평생을 산 터라 수십 년 전 진무앙을 한 번 만났었다. 당연히 그의 정체도 알고 있었고.
남수옥은 화향전에서 일어났던 일을 간추려 이야기했다.
그녀가 이야기를 끝내고 입을 다물자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혁군상이라는 놈은 죽고, 손철기는 손중악이 데리고 갔다, 이거냐?”
“예.”
“날이 밝으면 내 앞에서 손철기의 잘잘못을 가리겠다고?”
“그렇습니다.”
“시간도 촉박한데 잘됐네. 해 뜨자마자 일을 마무리짓고 떠나면 되겠다.”
맹노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시간이 촉박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넌 몰라도 되는 일이다.”
“예…….”
맹노광은 말끝을 흐렸다.
그를 비롯한 사람들은 진무앙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태마궁의 붕괴, 빛의 기둥, 공야승추의 행방…….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말을 해주지 않는 한, 그에게 질문을 할 자격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참을 수 없었는지 맹노광이 조심스럽게 진무앙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태상 부주님은 찾으신 겁니까?”
“찾았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진무앙이 암월도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여기.”
“예? 어디에요? 제 눈에는 그분이 안 보입니다.”
진무앙은 맹노광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안 그래도 슬슬 꺼낼 생각이었다. 더 늦으면 나와서 지랄을 할 게 뻔하니까.”
그가 암월도의 도갑에 대고 말을 이었다.
“초대형 곰탱이를 내보내.”
말이 끝나자마자 도갑이 맹수의 입처럼 쩍 벌어졌다. 그리고 검게 소용돌이치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눈을 부릅뜬 공야승추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멍해졌다.
그들은 이런 신기한 물건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야승추가 대전을 밟고 우뚝 섰다.
형편없을 만큼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패기는 압도적이었다.
그를 본 맹노광과 남수옥, 신완아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부주님…….”
맹노광이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공야승추가 손중악에 의해 강제로 밀려났다는 것을 알게 된 터라 태상 부주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부주’라는 호칭 속에는 그가 손중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추… 랑…….”
남수옥은 눈물 젖은 눈으로 공야승추의 허리를 안았다.
“부주님.”
신완아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공야승추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갑에서 나올 때부터 그의 시선은 공야무룡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무앙이 그에게 물었다.
“네 손자다. 본 적이 있냐?”
“저 아이가 태어난 후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보러 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 많이 봐라.”
진무앙이 공야무룡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가 공야승추, 네 할아버지다.”
공야승추와 공야무룡, 두 거구 사내의 강렬하게 빛나는 눈이 똑바로 부딪쳤다.
먼저 공야승추가 공야무룡에게 말했다.
“내 사과를 받고 싶으냐?”
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공야무룡은 공야승추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단숨에 알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선친께서는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진승이가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는 말이냐?”
“할아버지가 사해집마부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살아계시다는 말씀은 하셨습니다.”
진무앙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잘 논다. 친할아버지라 이거지.”
공야무룡은 그에게는 귀주 시골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더니 공야승추에게는 아주 정중한 말투를 썼다.
그것이 그를 심통이 나게 만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야 조손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네 할아비임을 인정하는 거냐?”
“선친은 당신이 할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걸 부정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셨죠. 그러니 제가 할아버지를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공야승추의 눈에 가는 떨림이 일어났다.
공야무룡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끝까지 설득하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것을 죄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공야승추의 입에서 씁쓸한 기색이 담긴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후우…….”
공야무룡이 무릎을 꿇고 크게 절하며 말했다.
“선친은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만약 제가 할아버지를 뵙는 날이 온다면 당신이 못다 한 효도를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엎드린 공야무룡에게 성큼 다가선 공야승추는 손자의 양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힘차게 그를 안았다.
공야무룡도 말없이 할아버지를 안았다.
지켜보던 맹노광과 남수옥, 신완아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소맷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 바빴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조손의 상봉을 보던 진무앙이 툭 던지듯 말했다.
“크고 작은 두 곰탱아, 적당히 하고 끝내라. 그러다 날 새겠다.”
자세를 바로 한 공야승추와 공야무룡이 나란히 그의 앞에 섰다.
진무앙이 그들에게 말했다.
“공야승추, 이제부터 넌 큰 곰탱이다. 알았냐?”
“예.”
“공야무룡, 넌 작은 곰탱이. 불만 있냐?”
“없수.”
공야승추와 대화할 때와 달리 공야무룡은 진무앙과 귀주 사투리를 사용했다.
진무앙이 혀를 차며 공야무룡에게 말했다.
“에효, 작은 곰탱아, 넌 정말 일관성이 있는 놈이야.”
“웬일로 칭찬을 다하슈?”
“이게 칭찬으로 들리냐?”
공야무룡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럼 욕이었수?”
진무앙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으으으… 어떻게 된 게 이 자식은 날 전혀 어려워하질 않아… 그냥 사지를 꺾어버릴까…….”
구시렁거리던 그는 흠칫했다.
신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농담이다, 농담! 이젠 내 맘대로 말도 못하겠네.”
구시렁거리던 그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공야승추를 불렀다.
“큰 곰탱아.”
“예.”
“날이 밝은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 건지, 전부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직접 손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공야승추는 어리둥절해졌다.
손중악이 외부의 힘을 빌어 그를 축출한 행위는 진무앙의 금기 중 하나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었다.
그런 손중악을 직접 징치하지 않겠다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작은 곰탱이가 손중악과 싸울 거다.”
공야승추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팼다.
비록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을 보는 눈까지 망가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공야무룡을 보자마자 그의 현재 무공 수준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룡아가 또래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렵겠지만 손중악이 상대라면 백초를 버티지 못합니다.”
단정적인 어투.
진무앙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뜻이다.
“잘 아시면서 왜 용아를 손중악과 싸우게 하려는 겁니까?”
“이기면 되잖아.”
“예? 어떻게요? 날이 샐 때까지는 세 시진도 남지 않았잖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해.”
“어떻게 하시려고요?”
“작은 곰탱이의 진원을 폭발시킬 거다.”
진무앙의 말에 공야승추의 안색이 확 변했다.
“…미치셨습니까?”
“죽을래?”
진원지기를 폭발시킨다는 건, 진기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사용한다는 걸 의미했다.
문제는 그 방법이 퇴로가 없는 궁지에 몰린 절정고수들이 적과 동귀어진할 각오로 택하는 최후의 것이라는데 있었다.
진원은 생명력의 근원을 이루는 힘이라 보통의 내공과 달리 한 번 사용하면 복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원을 사용한 무인은 죽지 않으면 폐인이 되었다.
그러니 하나뿐인 손자의 진원을 폭발시키겠다는 진무앙에게 공야승추가 미쳤냐는 소리를 한 것이다.
진무앙은 공야승추에게 눈을 한번 부라리곤 말을 이었다.
“작은 곰탱이는 십 년 전에 흑백쌍두사의 내단을 먹었다. 그래서 저 나이에 초절정의 초입에 발을 들였지.”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작은 곰탱이가 녹인 내단은 전체의 오 할 정도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절반가량의 기운이 풀어지지 않은 채 단전 구석에 남아 있다. 작은 곰탱아, 알고 있었지?”
“…예.”
공야무룡이 입술을 질끈 물며 대답했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 건, 큰 곰탱이, 너 때문이다.”
공야승추의 눈이 커졌다.
“저 때문이라고요?”
“그래. 네가 진승이한테 강마혈신공을 완벽하게 전수하지 않은 탓에, 작은 곰탱이도 그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내단을 완전히 녹이지 못한 거야.”
공야진승은 대협곡에서 흑백쌍두사에게 죽은 공야승추의 아들이다.
“지금 내단을 녹이면 곰탱이의 경락이 견디지 못하고 터질 거야. 그럼 즉사하겠지. 하지만 진원을 폭발시킴과 동시에 남은 내단을 그 빈자리에 녹여 넣으면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대전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약한 신완아도 일류고수다.
그래서 그들은 진무앙이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물론 알아들었다고 해서 그것의 실현가능성을 인정한 건 아니었다.
공야승추가 물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날이 밝기 전, 작은 곰탱이가 강마혈신공을 팔단계까지 배우고, 진원의 폭발과 내단이 녹는 속도 조절을 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단, 작은 곰탱이가 아주 잘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잘 못하면요?”
진무앙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죽는 거지.”
공야승추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손중악은 평생 상대해 본 경험이 없는 적과 싸우게 될 거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적과 말이다.”
진무앙이 고개를 돌려 남수옥을 보았다.
“수옥아.”
“예.”
“손중악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의 명단을 작성해라.”
남수옥의 안색이 굳어졌다.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 기회에 사해집마부 내부를 확실하게 정리해야겠다.”
남수옥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던 진무앙이 물었다.
“그런데, 환무경하고 금강주, 어디냐 숨겨놨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