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44
344 그런 거, 안 들어
계곡의 붕괴는 반 시진 동안 이어졌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곳에 더는 계곡이 없었다. 대신 작은 언덕 하나가 생겨나 있었다.
스스스슷!
희미하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언덕의 정상에 이백여 명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무상을 비롯한 염왕시 일백오십여 구와 숭천무련의 호남 지소 정예들이었다.
무상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강한 놈이라고 해도 이런 대폭발 속에서 온전하지는 못하겠지…….”
그가 우측의 복면인에게 물었다.
“삼비영, 무림맹 오행기는 어디쯤 왔느냐?”
삼비영은 운중비각 호남 지소 서열 삼위자였고, 이위자인 이비영이 죽은 지금 정보를 총괄하고 있었다.
“지금쯤 여기서 칠십여 리 떨어진 곳을 지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속도라면 석양이 질 무렵 형산에 들어서겠군.”
“그렇습니다.”
“곽패.”
그의 좌측에 시립해 있던 친위대장 곽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예.”
“염왕시를 투입해라. 염왕주는 이것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니, 알아서 찾아갈 거다.”
“예.”
“염왕주를 가진 진무앙은 바위에 파묻혔지만, 백오십 구의 염왕시라면 반나절 이내에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너는 만약을 대비해 삼비영의 뒤를 지켜라. 진무앙은 마병환요를 패퇴시켰던 절대초강고수다. 다른 자들은 모두 죽었을 테지만 그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
“나도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을 테니 변동 사항이 생기면 즉시 보고하도록.”
“존명.”
무상은 지면을 박찼다.
일보에 이십여 장을 건너뛴 그의 모습은 눈 깜박할 사이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세 무림을 통틀어도 저 정도의 경공을 펼칠 수 있는 무인은 다섯을 넘지 못할 터였다.
곽패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진무앙이 대체 얼마나 강한 자이기에 무상 각하와 같은 분이 꺼리시는 걸까…….”
진무앙의 정체는 신무제조차 추정만 할 뿐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당연히 수하들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무상이나 곽패가 알 리 만무했다.
가볍게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버린 곽패는 품에서 다섯 치 길이의 동물 뼈로 만든 피리를 꺼내 힘차게 불었다.
삐이이익-
고막을 긁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승처럼 서 있던 염왕시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검은자는 어디로 갔는지 온통 흰자위로 가득찬 그들의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괴이했다.
곽패는 뼈 피리를 입에서 떼었다.
염왕각이라는 이름의 뼈 피리는 염왕시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물이었다.
곽패가 염왕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염왕주를 찾아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염왕시들의 하얀 눈동자에서 사이한 광채가 일렁였다.
그들은 망설이거나 헤매는 기색 없이 돌산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콰콰쾅! 후두둑-
일백오십 구의 염왕시가 일제히 권강을 실은 주먹을 내지르자 야산을 이루고 있던 바위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염왕시들은 흙먼지와 돌조각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들을 부수고 들어내며 무서운 속도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 * *
“주공, 여기 엄청 깊수. 얼추 이백 장은 넘게 떨어진 것 같으우.”
공야무룡이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시끄러. 분위기 깨지 마라.”
여전히 남궁희를 품에 안은 채 진무앙은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나라고 주공한테 말 걸고 싶겠수? 하지만 빨리 여기서 나가려면 별수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우.”
“완아 빨리 보려고?”
“당연한 거 아니우? 나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단 말이유.”
“나가고 싶으면 알아서 나가.”
공야무룡은 차마 발작은 하지 못하고 주먹만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알아서 나갈 수 있으면 내가 미쳤다고 주공한테 이러고 있겠수!”
그들이 있는 곳은 높이 오 장, 그리고 폭 십여 장가량 되는 커다란 공동이었다.
진무앙이 혼돈암혼강기를 거둔 상태였다.
하지만 거대한 바위들이 절묘하게 뒤엉킨 천장은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남궁희가 진무앙의 가슴을 슬쩍 밀며 말했다.
“이제 정말 놔줘요. 저 곰같이 생긴 아이 말이 맞아요.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어요.”
“있으면 어때서?”
남궁희가 따스한 눈웃음과 함께 말을 받았다.
“무앙,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한 점의 햇살도 비치지 않는 곳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진무앙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남궁희는 아쉬운 얼굴로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진무앙이 어떤 남자인데 그냥 그녀를 놓아주겠는가.
그는 남궁희의 허리에서 손을 떼면서 그녀를 휘릭 들어 올려서는 등에 업어버렸다.
“어머!”
졸지에 그의 등에 업힌 남궁희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당신… 애들이…….”
“그대로 있어.”
양 손바닥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진무앙의 음성은 단호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애들이 보면 좀 어때. 내가 내 여자 업는데 저 자식들 시선을 신경써야 해?”
“그래도… 내 나이에…….”
“나이? 내 눈에 넌 여전히 스물두 살이야.”
남궁희는 못 이기는 척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무앙이 남궁진과 남궁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희아를 업는데 불만 있냐?”
두 사람은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없어요. 절대 없어요.”
그들의 뇌리엔 파란 나비를 만졌다고 한마디 말도 없이 제갈성을 일도양단했던 진무앙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남궁희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자신들이 실수 좀 한다고 두 쪽을 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당설처럼 그에게 따귀를 맞고 나뒹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진무앙은 천천히 공동을 둘러보며 와룡천망을 펼쳐 기를 넓게 퍼트렸다.
무형의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지하의 구조를 파악해 나갔다.
남궁희가 공야무룡을 힐끗 보며 진무앙에게 물었다.
“저 아이, 공야 오라버니를 많이 닮았네요.”
와룡천망을 펼친다고 말을 못할 진무앙이 아니다.
“그 자식하고 피로 이어진 사인데 안 닮으면 이상하지.”
“그분의 손자예요?”
“응.”
“그럼 진승이 아들?”
“맞아.”
진무앙이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런데 넌 그 큰 곰탱이 자식하고 일천 초나 싸웠으면서 아직도 오라버니냐?”
“당시는 정사마가 대충돌하던 대난투 시대였어요. 당신도 내가 공야 오라버니와 싸운 건 가는 길이 달라서라는 걸 알잖아요. 아무튼 그 시대는 오래전 저물었고, 내게 남은 건 사해동도관에서 그분과 함께 지내던 즐거운 기억뿐이에요.”
“그 시절이 즐거웠다고? 틈만 나면 내가 너희를 죽음 직전까지 굴렸었는데?”
“당신 손에 죽었어도 즐거웠을 거예요.”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진무앙은 혀를 찼다.
“내가 뭐라고… 일편단심도 그 정도면 병이다.”
남궁희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게 병이라면 죽은 뒤에도 앓고 싶어요.”
“아서라. 그렇게 나한테 미련을 가지면 다시 태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남궁희는 말없이 그의 목을 감싼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진무앙이 장난스럽게 밭은기침을 토했다.
“켁켁켁! 같이 죽자는 거냐?”
“그래 줄래요?”
“얼마든지.”
“하아… 말이라도 고마워요…….”
남궁희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진무앙이 불멸의 존재라는 걸 아는 여자였다.
공야무룡이 진무앙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분… 할아버지하고 싸운 분이셨수?”
“그래. 한 사십 년쯤 됐다. 그때는 큰 곰탱이가 욕심이 아주 많을 때라 정마대전 비슷한 걸 일으켰었지. 그때 희아가 큰 곰을 찾아가서 멈추길 부탁했었다.”
“할아버지가 부탁을 거절해서 두 분이 싸우게 된 거유?”
“응. 싸움이 끝난 후에 희아가 통사정하며 말리지 않았으면 큰 곰탱이 자식은 내 손에 죽었을 거다.”
“할아버지가 이기셨던 거유?”
“무승부였다.”
“그런데 왜……?”
“싸우면서 큰 곰탱이가 희아 뺨에 두 치 길이 찰과상을 냈거든. 내가 나중에 그거 보고 얼마나 열받았는지 아냐? 큰 곰탱이는 당연하고 사해집마부도 세상에서 지워 버리려고 했었다.”
공야무룡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고작… 차… 찰과상 때문에 말이우?”
진무앙의 무시무시하게 빛나는 눈이 공야무룡을 향했다.
“흡!”
급하게 숨을 멈춘 공야무룡이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피했다.
“고작 찰과상? 내 여자 몸에서 피 한 방울 흘리게 하면 천하를 피로 씻어도 성에 안 차.”
남궁희가 진무앙의 어깨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왜 애를 겁주고 그래요.”
“겁은 무슨. 사실을 말한 건데.”
“그런 사람이 틈만 나면 야반도주를 해서 사랑하는 여자 눈에서 눈물을 쏙 뽑아요?”
“으… 응?”
말문이 막힌 진무앙의 입에서 신음도 아니고, 말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내가 떠난 뒤엔 그것도 당신만 기억하는 추억이 되겠죠?”
진무앙은 역시 말을 받지 못했다. 그저 남궁희의 엉덩이를 받친 손에 힘을 주었을 뿐이다.
남궁희의 얼굴이 홍조로 물들었다.
그녀가 진무앙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손에 힘 좀 빼죠?”
“싫어.”
“하아… 당신, 대체 언제쯤 되어야 철들 거예요?”
“그런 거, 안 들어.”
“이런 당신을 두고 눈이나 감을 수 있을까 몰라.”
“감지 않으면 되지.”
“불가능하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게 내가 욕심내지 말라고 했던 걸 왜 그렇게 고집은 부려서…….”
진무앙이 고개를 돌려 남궁희를 보았다.
마주친 두 사람의 눈 속엔 함께 지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남궁희는 현 남궁세가주 제왕검신 남궁록, 그리고 창궁일학 남궁경의 누나였다.
대혼돈시대에 사해동도관을 만든 진무앙이 남궁세가의 비전을 전한 사람은 남궁록도, 남궁경도 아닌 남궁희였다.
그녀의 무공에 관한 재질은 동생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천재적이었기 때문이다.
진무앙과 그녀 사이엔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그는 늘 그렇듯 어느 날 홀연히 야반도주로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 남궁희는 더욱 가문의 무공을 수련하는 일에 생의 전부를 바쳤다.
진무앙이 전한 세가의 최후 비전인 천뢰제왕신공과 천뢰제왕검형의 오의를 깨달아 동생들에게 전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일 년 전 그녀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는 주화입마에 빠졌고, 경락과 진원이 파괴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녀의 무공이 조화지경에 이르지 않았었다면 즉사했을 중상이었다.
그 일로 그녀는 무공을 잃었다.
만약 그때 독고운진이 남궁세가를 지나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살릴 수는 있었지만, 그의 신비로운 능력으로도 정상으로 돌려놓지는 못했다.
그녀의 내부 경락이 완전히 무너지고 뒤틀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진무앙이 물었다.
“그 돼지 자식이 뭐라고 했기에 남은 생기를 모두 태운 거냐?”
“당신이 여기에 있는데, 갈 거냐고 묻더군요.”
“명이 더 짧아질 거라는 거 알면서 그 자식 얘기를 왜 들어줬어?”
남궁희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독고 오라버니는 잠깐이라도 예전의 내 모습을 되찾게 해준다고 했거든요. 지금처럼요.”
연이어 그녀가 물었다.
“무앙, 합비로 가는 중이라고 했죠?”
“응.”
“당신이 왔어도 내가 만나주지 않았을 거예요.”
“왜.”
“독고 오라버니가 생기를 끌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정신도 흐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병자의 모습이었을 거예요. 나는 그런 모습으로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되고 싶지 않아요.”
진무앙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