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50
350 인간의 씨가 마르는
제갈극은 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는 진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남궁희를 보았다.
그녀가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진무앙과 대화를 나눈 의도는 분명했다.
그녀는 기주들에게 실수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 것이다.
제갈극이 남궁희에게 포권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자.”
뜬금없는 인사였다.
하지만 진무앙과 남궁희는 어렵지 않게 그의 속내를 읽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남궁희에게 말했다.
“저 자식, 네 말대로 머리 좀 굴릴 줄 아네.”
남궁희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제갈극을 보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했잖아요.”
제갈극은 간단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진무앙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것과 지금부터 조심하겠다는 의사를 전한 것이다.
탁탁탁-
진무앙이 손을 털며 말했다.
“흥이 깨져서 더 패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제갈극.”
“예. 무…….”
“닥쳐!”
“흡!”
“나는 그 별호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대가. 그렇게 불러.”
“예. 대가.”
“오행기의 지휘는 네가 맡아라.”
“예.”
“전장이 정리되는 대로 무한으로 돌아가.”
“예.”
“무림맹에 도착하는 대로 독고운진을 찾아. 그 돼지 자식에게 합비로 오라고 전해. 내가 보잔다고.”
“알겠습니다.”
“늦으면 껍질 벗기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함께 전해라.”
“예?”
“그렇게 전하면 알아들을 거다.”
“예.”
제갈극은 토를 달 생각도, 질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진무앙의 존재감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전장을 둘러보던 진무앙이 제갈극과 세 기주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다가오라는 손짓.
네 기주는 바람처럼 그의 앞에 일렬로 섰다.
진무앙이 남궁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갈극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모용천기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쟤들이 울보하고 멍청이의 핏줄이라는 건 들었고, 나머지 셋도 비슷해?”
“예. 걔들도 부친이 모두 사해동도관 출신이에요.”
진무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 기주에게 말했다.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너희의 부친에게 전해라.”
제갈극 등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조만간 무림에 과거 대혼돈 시대에 버금가거나 그보다 더한 대재앙이 닥칠 거다.”
듣는 기주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황당무계하게 들리기 딱 좋은 말이라 의심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이 무려 암천광무존이 아닌가.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전쟁 준비를 해두라고 해라. 무림맹에는 내가 직접 돼지 자식을 만나 전하겠다.”
입안이 바짝 마른 제갈극이 갈라진 목소리로 염왕시와 흑의복면인들의 시신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숭천무련이라는 자들이 혈겁을 일으킨다는 말씀이십니까?”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 국한된, 그런 낮은 수준의 재앙이 아니다.”
“그럼…….”
진무앙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만약 재앙이 닥친다면 무림은 물론이고, 제국이 무너지고 대륙에 인간의 씨가 마르는 대전쟁이 될 거다.”
“…….”
사람들의 눈이 풀리고 입이 딱 벌어졌다.
충격적인 내용도 그렇지만 진무앙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그들의 넋을 빼앗았다.
어떻게 저처럼 심각한 내용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휘익-
남궁희의 손을 잡은 진무앙이 그녀를 구름처럼 둥실 띄워 등에 업었다.
“으쌰!”
“어머!”
남궁희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통할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진무앙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며 공야무룡에게 말했다.
“볼일 끝났다. 곰탱아, 가자.”
남궁진과 남궁희, 황보평이 주춤거렸다.
그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차올랐다.
그들은 진무앙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소속이 오행기인 터라 그럴 수는 없었다.
반면 공야무룡은 즉각 진무앙의 뒤를 따랐다.
몽지림이야 말이 없어도 당연히 진무앙과 함께 움직였고.
청년들의 분위기가 어떤지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는 진무앙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숨 두어 번 쉬기도 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오두막 앞 풀밭.
오청연은 신완아, 선유방과 함께 찬연한 노을을 뿌리는 서편 하늘의 해를 보고 있었다.
선유방이 오청연에게 물었다.
“진 대가는 언제 오실까요?”
“곧 볼 거야. 오고 있거든.”
선유방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아세요?”
“그냥 알아.”
“신기하네요. 그것도 술법으로 아는 거예요?”
“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옆에서 신완아가 끼어들었다.
“오 소저, 공야 가가도 오고 있나요?”
“주인이 오는데 마부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니?”
신완아의 안색이 환해졌다.
오청연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너는 작은 곰이 그렇게 좋니?”
신완아의 뺨이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예.”
신완아는 오청연의 미소에서 묘하게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그냥… 소저에게 고민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라서요.”
“고민이라… 호호호.”
오청연이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잘못 보았구나. 궁금한 게 많긴 하지만 고민이랄 것까지는 아니야.”
그녀가 손을 들어 숲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는 한 시대에 몇 명의 여자를 사귀는 걸까… 너는 궁금하지 않니?”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숲으로 고개를 돌린 신완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곳엔 남궁희를 업은 진무앙과 몽지림, 그리고 쿵쿵거리며 뛰어오는 공야무룡이 있었다.
그들이 공터에 도착하자 신완아는 날아갈 듯 진무앙에게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셨어요, 주공.”
“응. 완아야, 얼른 곰탱이 데려가라. 저 자식, 더 붙들고 있으면 진짜 들이받을 것 같으니까.”
공야무룡의 입술이 댓 발은 튀어나왔다.
“내가 왜 주공을 들이받수?”
“일 다 끝났는데 먼저 보내주지 않는다고, 돌아오는 내내 구시렁거린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그거야… 아매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뇨!”
“완아한테 눈이 먼 네가 초선 때문에 동탁을 들이받은 여포처럼 굴지 말란 법도 없지.”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번 그래 봐라. 그때는 네 껍질을 벗겨서 말안장을 만들어 버릴 테니까.”
“마… 말안장…….”
움찔한 공야무룡이 신완아의 등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쯧, 간덩이는 조막만 해가지고. 겁 좀 줬다고 여자 뒤에 숨는 거 봐라.”
남궁희가 진무앙의 소맷자락을 당기며 끼어들었다.
“그만 놀리고 보내줘요. 저러다 룡아 진짜 주눅 들겠어요.”
“곰탱이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데…….”
진무앙은 아쉬운 표정으로 공야무룡과 신완아를 오두막으로 돌려보냈다.
진무앙은 오청연과 남궁희를 서로에게 소개했다.
그때까지 가만있던 선유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저씨, 괴물들 다 잡으셨어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 말과 함께 진무앙은 선유방의 수혈을 짚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남궁희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왜 애 수혈은 짚고 그래요?”
“이 꼬마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하거든.”
그가 말을 이었다.
“참, 남궁세가에 도착하면 이 애를 맡아줘. 나중에 커서 혼자 모산파를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때까지 세상이 멀쩡하길 바라야지…….”
진무앙의 말에 남궁희가 물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사람의 씨가 마를 대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오청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선자, 진 대가가 그런 말을 했어요?”
“예.”
오청연이 진무앙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설명해 줘요.”
진무앙은 입맛을 다시며 남궁희에게 말했다.
“희아, 지금부터는 뭘 봐도 놀라지 마라.”
“예.”
진무앙이 난추를 불렀다.
“난추, 나와라.”
그의 옆에 황금빛이 어른거리며 난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청연의 안색이 확 변했다.
“봉황… 금마천소?”
난추가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정말 오랜만이네. 나는 난추, 넌 여기서 청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며? 우리가 만들어졌을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 같네.]오청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난추를 보며 중얼거렸다.
“빙의도 하지 않았는데 천무령을 각성했… 어?”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진무앙은 대답 대신 그에게 빙의해 있는 두 마병을 불러냈다.
“묵령, 금령. 나와라.”
그의 양쪽 어깨에서 키가 한 자밖에 되지 않는, 칠흑처럼 검은 미소녀와 아름다운 궁장미부인이 솟아올랐다.
남궁희의 눈에 신기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환우십병의 천무령들은 지난날 그녀가 진무앙과 함께하던 시절엔 보지 못했던 존재들이라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진무앙이 오청연에게 말했다.
“태양이화창을 꺼내봐.”
난추가 놀라 그에게 물었다.
[여기에 태양이화창이 있어요?]진무앙이 고개를 끄덕일 때 오청연이 품에서 작은 뱀 한 마리를 꺼냈다.
두 개의 머리에 왕관 같을 고리를 두른 뱀, 삼색이였다.
오청연이 삼색이의 금고아를 벗겨내며 말했다.
“삼색아, 창을 꺼내줄래?”
쿠우우우우우웅-
대지가 짓눌리는 듯한 육중한 기음과 함께 칠십여 장에 이르는 삼색이의 거체가 드러났다.
진무앙 덕분에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남궁희조차 놀라 번개처럼 진무앙의 뒤로 숨었다.
그녀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무앙? 저게 뭐예요?”
“흑백쌍두사. 너무 놀랄 것 없어. 이름은 삼색인데 착한 녀석이야.”
그때 삼색이가 이빨 틈에 숨겨놓았던 태양이화창을 툭 뱉고는 다시 작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태양이화창을 손에 쥔 오청연이 삼색이를 품에 넣자 진무앙이 신기와 마병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 서로 만난 적이 있냐?”
신기와 마병은 고개를 저었다.
오청연이 대답했다.
“아까 난추가 말했던 것처럼 저희 삼신기는 만들어졌을 때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어요. 마병도 상황은 다르지 않을 거예요.”
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아요. 저희도 이 세상에 뿌려진 후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진무앙이 말했다.
“이상하지 않냐? 지난 수천 년 동안 환우십병이 동시대에 한 개 이상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칠마병과 삼신기 모두가 깨어났지.”
신기와 마병의 안색이 굳어졌다.
“현천을목마금과 태양이화창을 제외한 여덟 개는 천무령으로 완전히 각성했어. 게다가 난추는 빙의를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각성이 이루어졌고.”
그가 신기와 마병을 천천히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겠냐?”
오청연과 묵령 등 신기와 마병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렸다.
“몰라?”
묵령이 그의 눈치를 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모르면 안 되나요?]“너희가 당사잔데 너희가 모르면 누가 알아?”
오청연이 대꾸했다.
“당신이 알겠죠.”
“으음… 너, 나를 너무 잘 아는구나.”
“동행한 시간이 얼마인데요.”
난추가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뭘 의미한다는 거죠?]진무앙이 눈을 빛내며 천천히 말했다.
“안 가르쳐 줘.”
어디선가 불어온 썰렁한 바람이 어이를 상실한 사람들의 볼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