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53
353 내가 고맙다
남궁희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무앙의 팔을 잡은 채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몸짓은 구름을 밟듯 가볍고 경쾌했다.
진무앙은 마음을 정했다는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고민 중이라면 이런 몸짓이 나올 수 없었으니까.
진무앙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그린 듯 고운 남궁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갓 묘령을 벗어난 소녀처럼 여리고 가녀렸다.
정체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녀가 남궁세가의 최고 고수 검향 남궁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리라.
어느 누가 이런 그녀를 백 년 내 남궁세가 최강의 고수인 검향으로 보겠나.
남궁희가 진무앙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얼 그렇게 뚫어지게 봐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묻긴. 예뻐서 본 거지.”
남궁희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당신이 날 꼬셨을 리가 없죠.”
“그건 맞아.”
진무앙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였다.
문제는 세상에 미인이 한 명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길은 늘 풍파가 끊이질 않는 것이고.
남궁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을 만날 때까지 전 제 외모에 관심을 가진 적이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죠.”
“왜?”
“너무 많은 남자가 날 쫓아다니며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바치겠다고 했거든요.”
그녀의 성격을 아는 진무앙은 싱긋 웃었다.
“많이 귀찮았겠네.”
남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은 무공을 익히는 데 큰 방해였죠. 가문의 무공을 완성하는 게 내 삶의 목표였는데 말이에요.”
그녀가 진무앙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당신을 만났어요.”
“허접한 남자들만 보다가 날 만나니까 개안하는 기분 아니었어?”
“눈이 썩는 줄 알았어요.”
“진짜?”
“기억 안 나요?”
“어떤?”
“당신은 난향 언니가 옆에 있는 데도 틈만 나면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녔잖아요. 천하에 둘도 없을 호색한, 양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천하제일의 난봉꾼이었죠.”
“내가 그랬나? 왜 기억이 나지 않지?”
“당신은 황제 옆에서 정치를 해도 잘했을 거예요.”
“난 낭인 체질이야.”
“꽃을 좇는 탐화랑 체질이겠죠. 당신이 무림공적으로 몰리지 않은 게 천하제일의 불가사의라는 거 알아요?”
진무앙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말이 심하다…….”
“당신은 욕먹어도 싸요.”
“그래도…….”
남궁희가 눈을 흘겼다.
“옛말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진실한 말은 듣기 괴롭다고 했죠.”
진무앙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했다.
쪽!
“똑똑한 우리 희아…….”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는 것도 어쩜 이렇게 변함이 없을까…….”
진무앙이 가슴을 쫙 펴고 말했다.
“변하면 진무앙이 아니지.”
웃음을 참지 못한 남궁희가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호호호, 이렇게 철이 안 든 당신을 두고 가려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요.”
진무앙의 눈 깊은 곳에 그늘이 졌다.
“웃으며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남궁희는 배시시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럼 울면서 이야기할까요? 음… 정말 그럴까요? 당신 마음 찢어놓게?”
“찢어. 널 보러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야.”
남궁희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내 남자의 마음을 찢어요. 내가 다시 봉합할 수도 없는데.”
그녀는 따듯한 눈길로 진무앙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때문에 가슴 아픈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한 걸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감사했죠.”
“나쁜 남자라 미안하다.”
“거짓말하려면 입술에 침이나 발라요.”
진무앙은 즉시 혀를 내밀어 입술을 쭈욱 핥았다.
“호호호호호.”
남궁희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뭐가 웃겨?”
남궁희가 진무앙의 턱밑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말했다.
“이럴 때도 변하지 않는 당신이 너무 재미있어서요. 재미있어서 죽이고 싶어진다니까요. 가능했다면 벌써 시도했을 거예요.”
“무섭게 왜 그러냐.”
“당신답지 않게 겁을 내고 그러세요?”
“난 마병환요보다 내 여자가 백배는 무섭다.”
“왜요?”
“마병환요한테는 지은 죄가 없지만 내 여자들한테는… 안 그렇거든.”
“그 말, 진심이라는 거… 알아요.”
진무앙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남궁희가 말했다.
“당신과 함께했고, 함께하지 못했던 세월… 행복, 불행, 설렘, 후회… 모두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이었어요. 나는 그것들을 갖고 떠나고 싶어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진해질수록 진무앙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몸만이라도 당신 곁에 남아 당신이 말한 대재앙에 함께 맞설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다가올 미래는 그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요.”
남궁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얀 융단처럼 깔린 구름과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하지만 그녀는 아지랑이처럼 허공의 틈에 은신해 있는 몽지림을 볼 수 있었다.
“대혈마신이혼대법에 당한 상태에서도 몽 언니의 혼백은 흩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당신의 곁에 남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내 경우는 몽 언니와 다르잖아요.”
그녀는 진무앙의 손등을 은어처럼 희고 긴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강시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당신 곁에 남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에게 미안해요.”
천천히 손등을 떠나 진무앙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에 흐릿한 습막이 떠올랐다.
“절대기억력을 가진 불멸의 당신은 아득한 세월 이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내 마지막 모습을 지금처럼 생생하게 간직한 채 살아가겠죠. 그 생각을 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요… 무앙.”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미안해 할 필요 없다. 그건 불멸의 존재인 내가 짊어져야 할 대가니까.”
그는 남궁희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강한 남자인지 알지? 너를 보낸 그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든, 나는 휘청거리지 않고 영원히 지켜볼 거다. 두 눈 부릅뜨고서.”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를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쌌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궁희가 진무앙의 품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애들이 왔어요.”
“시간을 너무 잘 지키는 놈들이네.”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여러 사람의 기척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알아차리고 있었다.
남궁희가 진무앙에게 말했다.
“애들, 지켜줄 거죠?”
진무앙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기억하는 후손이 한 명도 없을 때까지, 남궁세가는 번영할 거다.”
“고마워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를 높였다.
“이제 다들 나와도 돼.”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남궁록과 남궁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누님…….”
“큰 누나…….”
남궁희는 두 동생을 한 번씩 안아주었다.
지난밤, 그녀는 그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기에 더 할 이야기는 없었다.
“록아, 경아, 고마워. 너희가 내 동생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 너희가 아니었으면 내 삶의 절반은 허망했을 거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남궁록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누님… 저희가… 감사했습니다. 누님의 동생으로 살 수 있어서…….”
남궁희는 동생들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리고 진무앙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앙, 시간이 되었어요.”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말할 것도 없지만 남궁희 또한 절대초강고수의 반열에 오른 여인.
죽음의 순간을 예감한 것이다.
진무앙은 천천히 굵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품에 안았다.
남궁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앙, 뭘 하려고 이래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마지막 모습을 우주에 담으려고.”
진무앙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남궁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예?”
그 순간,
쑤와아아아아앙-
남궁희를 안은 진무앙의 신형이 가공할 기세로 지면을 박차며 솟아올랐다.
마치 번개가 땅에서 하늘로 치는 듯 장쾌한 광경이었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남궁록과 남궁경이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진무앙의 모습은 너무 멀어져 가물거렸다.
목이 꺾어질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머리를 뒤로 젖힌 남궁경이 남궁록에게 말했다.
“형님… 매형이 대체 얼마나 올라가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까?”
“모르겠다. 벌써 일천 장 이상 오르셨는데…….”
“저러다 구름도 뚫고 올라가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생각이신 것 같구나.”
“그럼 누님을…….”
“네 생각이 맞을 거다.”
“아… 누님이 행복해하시겠군요…….”
“그러시겠지. 마지막 소원이 매형의 품에서 눈을 감으시는 것이었으니…….”
남궁 형제가 대화를 나눌 때 삼천 장을 솟아오른 진무앙은 남궁희와 함께 구름을 밟고 서 있었다.
공기는 희박했지만 피부 호흡이 가능한 남궁희에게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진무앙이야 숨을 쉬고 안 쉬는 경계가 의미 없는 남자고.
진무앙의 품에 안긴 채 사방을 돌아본 남궁희의 얼굴에 감동한 빛이 떠올랐다.
찬연한 황금빛으로 물든 구름 위의 세상은 인외의 비경이었다.
“행복해요. 세상에 이런 곳에서 마지막을 맞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요…….”
“없어.”
남궁희가 진무앙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여자도 데리고 온 적 있어요?”
진무앙은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없어.”
“거짓말.”
“정말이야.”
“입술에 침 바르라고 할까 보다.”
조건반사.
진무앙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려는 순간, 구름처럼 둥실 떠오른 남궁희가 그에게 깊은 입맞춤을 했다.
“고마워요, 무앙.”
“내가 고맙다. 나를 사랑해 줘서.”
남궁희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빨리 와. 기다리고 있을게.”
대답은 없었다.
그의 목을 안은 남궁희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고개가 툭 떨어졌다.
“희아…….”
진무앙은 천천히 하지만 힘있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구름을 밟고 석상처럼 서 있던 진무앙의 입술 사이로 긴 숨이 흘러나왔다.
“희아, 다시 태어나도 날 사랑하면 안 돼……. 나보다 더 좋은 놈을 만나야지.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한 여자다…….”
그의 장심에서 흘러나온 열화강기가 남궁희의 몸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육신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한 줌의 재가 되어 그의 팔을 빠져나갔다.
바람을 따라 구름 위로 흩어지는 그녀의 유해를 보며 진무앙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너를 만나서 나도 행복했다…….”
찬란한 태양이 그의 전신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