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6
036 그래서, 죽였나?
난향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비룡무관과 향산에서 발생한 대량 살인 사건은 낙양의 무림계를 뒤흔들었다.
생사평 대회전 이후 한 문파의 주요인물들이 몰살당하다시피 한 사건이 벌어진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방계 문파의 대형 참사를 접한 창천사마세가와 무림맹은 즉시 조사대를 꾸렸다.
조사대장은 무림맹 낙양 분타주 운리금강 주신언이 맡았다.
수향루의 별채에 딸린 정원.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진무앙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으으으, 역시 규칙적인 생활은 몸에 해로워.”
그의 옆에서 함께 걷던 소소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쉬셔야 하는데 저 때문에 괜히 나온 거 아니에요?”
그들은 산책하는 중이었다.
소소의 건강이 그만큼 좋아지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될 거란 의원의 조언 때문이었다.
진무앙이 아이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쯧, 꼬맹아, 넌 진짜 말투를 바꿔야 해. 네 나이에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정말 재수 없게 들린다니까.”
소소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건강하면 내가 같이 산책 나올 일도 없잖아. 그러니까 빨리 건강해져라. 그러면 나도 이렇게 귀찮은 산책 안 해도 되니까.”
“죄송해요…….”
소소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의 동그랗고 작은 뒤통수를 보며 진무앙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소소 또래의 어린아이와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한 경험이 없는 남자였다.
그러니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소소는 사내아이도 아닌 여자아이 아닌가.
진무앙에게 소소와의 동거는 풀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최악의 난제나 다름없었다.
소소와 보조를 맞춰 걷던 진무앙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산책을 나온 건 일각 전, 소소가 지칠 때도 되었다.
진무앙이 길옆의 작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좀 앉자.”
“저는 괜찮아요…….”
“내가 힘들어서 그래, 이 녀석아.”
“예…….”
진무앙은 소소와 나란히 바위에 앉았다.
푸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뺨을 스치는 바람은 선선했다.
계절은 한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사시 초(9시 경)쯤이라 아직 햇볕은 뜨겁지 않았다.
진무앙은 허리춤을 주섬주섬 뒤져 육포 하나를 꺼내 소소에게 불쑥 내밀었다.
“먹어. 소고기로 만든 거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소소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육포를 받았다.
“쓸데없이 예의 바른 꼬맹이.”
“죄송해요…….”
“먹기나 해라.”
“네.”
오물오물.
아이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육포를 먹었다.
그런 소소를 보는 진무앙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치료와 보약 덕분인지, 그가 해준 추궁과혈 덕분인지, 아니면 그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덕분인지… 처음 봤을 때 해골처럼 말라 있던 소소는 조금씩 살이 오르며 아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 눈처럼 흰 피부, 칠흑처럼 검은 머리, 맑고 흑백이 선명한 커다란 눈동자…….
진무앙은 소소가 크면 절세미인 소리는 가볍게 들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데려갈지 모르지만, 그 자식은 전생에 나라, 아니, 천하를 구한 놈일 거다.”
소소가 가뜩이나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픈 녀석이 귀는 밝아서. 그거나 먹어.”
“네.”
소소가 육포를 다 먹자 진무앙은 아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등을 내밀었다.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소소가 눈을 깜박거렸다.
“……?”
“업혀.”
“예?”
“업히라고, 임마.”
“괜찮…….”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한다.”
“……네.”
진무앙의 등에 업힌 소소의 자세는 어정쩡했다.
손과 머리를 어디에 둘지 정하지 못한 것이다.
한 손으로 소소의 엉덩이를 받히고 천천히 일어선 진무앙이 아이의 손을 잡아 자신의 목을 감았다.
“잡아.”
“예…….”
진무앙의 목을 감고 깍지낀 소소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 기대라.”
“네…….”
소소가 그의 넓은 등에 머리를 기댔다.
새액새액-
아이의 숨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고르고 편안해졌다.
진무앙은 느리게 걸었다.
등 뒤로 소소의 숨결과 온기가 느껴졌다.
기분이 묘했다.
낯선 듯 익숙한 듯 그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언제 아이를 업었던 적이 있었나? 그런 기억 없는데… 흠, 이 느낌 그리 나쁘지는 않군. 내가 아이를 업는 날도 오는구나.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흐흐흐.’
속으로 웃으며 그는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거처에 늘어져 있던 진무앙은 난향의 부름(?)을 받았다.
본루에 있는 난향의 집무실에 들어간 진무앙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보고 싶은 않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난향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주신언이 그를 보고 번쩍 손을 들었다.
“진 호위, 오랜만일세.”
“무림맹 낙.양. 분.타.주.씩이나 되시는 분이 대낮부터 기루를 다 찾으시고. 사모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하하, 자네의 독특한 말본새는 여전하군. 오늘은 처의 귀에 들어가도 상관없다네. 공식적인 일 때문에 방문한 거거든.”
난향이 끼어들었다.
“진 호위, 앉아요.”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주신언이 찾아온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난향이 그에게 존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주신언은 자신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던 남자에게 진무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마 공자, 서로 초면일 테니 인사를 나누시게나. 이 사람이 내가 말했던 진무앙이라는 호위무사일세. 그리고 진 호위, 이 사람은 사마무룡 공자일세.”
의자 옆에 석 자 길이의 장검을 세워둔 사마무룡은 이십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칼만 없으면 문사로 생각될 만큼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자였다.
진무앙은 건성으로 사마무룡에게 포권을 했다.
“진무앙입니다.”
사마무룡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오만해서 그렇게 행동한다는 느낌보다는 늘 그렇게 인사를 받아온 듯했다.
그만큼 그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진무앙이 난향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담긴 질문을 바로 이해한 난향이 입을 열었다.
“진 호위, 사마 공자는 현 사마세가주님의 둘째 아드님이세요. 사마무광 소가주의 친동생이시죠.”
난향의 말투는 극존칭이었다.
그제야 진무앙은 사마무룡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남성, 특히 낙양에서 창천사마세가는 제왕과도 같은 권위와 힘을 갖고 있었다.
삼백 년이나 하남성 속가무림계를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무공에다, 그들의 땅을 밟지 않고는 낙양을 돌아다닐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가문이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하남성 전역에 퍼져 있고, 그들에게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말까지 듣는 가문 아닌가.
사마무룡의 이름을 처음 듣는 듯한 진무앙의 반응에 주신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낙양에 살면서 사마무룡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진무앙은 정말 특이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자네는 낙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마 공자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로군.”
진무앙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남자는 관심이 없어서요.”
“으하하하하하!”
주신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마무룡의 눈에도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물론 난향은 그러려니 했다.
진무앙이 언제 사람 가리면서 말을 하는 성격이던가.
웃음을 그친 주신언이 입을 열었다.
“자네도 비룡무관 참사를 알고 있겠지?”
“풍문으로 들어는 봤습니다.”
“무림맹과 사마세가는 이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협조하고 있네. 내가 그 조사대의 대장을 맡았지. 사마 공자는 부대장을 맡았고.”
“아, 그렇습니까? 조심하십시오. 그 나이에 감투까지 많이 쓰면 탈모의 위험이 있습니다.”
난향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 인간을 진짜…….’
하지만 그녀와 달리 주신언은 진무앙과의 대화가 마냥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하하하하하. 안 그래도 요새 머리를 감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서 걱정이라네.”
“예전에 동방에 갔던 적이 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창포라는 식물의 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덜 빠진다고 하더군요. 주 대협의 힘이라면 그걸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런 귀한 정보를 말해주다니, 고맙네.”
그가 웃으며 진무앙에게 농담처럼 툭 던지듯 물었다.
“자네가 양일청을 죽였나?”
화제 전환이 예상 밖이어서 난향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팼다.
하지만 진무앙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갑자기 훅 들어오시는 게 취미신가 보군요.”
“그래서, 죽였나?”
“실망스러운 대답이겠지만 안 죽였습니다.”
주신언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그렇게 보기엔 자네의 지나치게 평온한 표정이 정말 의심스럽군.”
“체질에 맞지 않기도 하고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주 대협이 원하시면 기꺼이 호들갑을 떨어드릴 수 있습니다.”
“음, 자네가 그러면 좀 이상할 것 같군.”
“역시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였나?”
“끈질기시군요.”
“내 직업이 원래 그렇네.”
“포두를 하시지 그랬습니까?”
“십대 때는 그럴 마음도 없지 않았지. 사부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포두가 되었을 걸세.”
“나라에서 귀한 인재를 놓쳤군요.”
“자네에게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줄은 몰랐군.”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습니다.”
“인정하네. 그래서, 죽였나?”
“안 죽였다니까요.”
“그런데 왜 나는 자네가 이 참사의 범인일 거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걸까?”
“착각은 자유니까요.”
“착각이라…….”
“명백한 증거 없이 사람을 의심하는 건 그리 좋은 조사 방법이 아닙니다. 열 명의 범인을 놓쳐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자네는 별로 억울해 보이지 않는데?”
“억울해하는 거 보여 드릴까요?”
“보고 싶지 않네. 자네에게 어울릴 것 같지가 않아.”
“역시 그렇죠?”
주신언이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 호위, 관부와 무림의 조사 방식은 많이 다르다네. 알고 있는가?”
“모릅니다.”
“앞으로는 관심을 갖는 게 좋을 걸세. 진심으로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아무래도 자네와는 계속 얼굴을 봐야 할 것 같거든.”
“제가 남자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셨군요.”
“나는 듣기 싫은 말은 한 귀로 흘리는 성격일세.”
“저도 주 대협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거 별로 좋은 성격 아닙니다.”
“하하하하하.”
주신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사마무룡이 갑자기 진무앙에게 물었다.
“휘제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소.”
진무앙이 말을 받았다.
“사마휘 공자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소.”
진무앙은 슬쩍 난향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몇 년 전에 관외에서 그와 짧은 인연이 있었지만 깊이 사귀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요? 사람들의 말은 좀 다르던데.”
“잘못 본 겁니다.”
사마무룡은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주신언이 일어섰다.
“이 루주, 우리는 이만 가보겠소. 조만간 다시 봅시다. 진 호위, 자네도.”
주신언과 사마무룡이 떠났다.
난향이 진무앙에게 말했다.
“무앙, 조심해. 주신언은 한 번 물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야.”
진무앙이 낮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 지금까지 이빨을 뽑아버리는 임자를 만난 적이 없었던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