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67
367 절대 안 돼!
낙양 중동부 경계 지역, 십여만 평의 대지를 차지한 사마세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성이라 할 수 있었다.
담장 안에는 수백 개의 고루거각이 즐비했고, 거주하는 사람 수도 무인 삼천을 포함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곳은 이백여 년 동안 하남제일세가로 명성을 떨쳐 온 무림 명가인 것이다.
해가 중천에 뜬 백주대낮에 그 사마세가의 내원 뒤쪽의 담장을 몰래 넘는 침입자가 있었다.
죽립을 삐딱하게 눌러쓰고 거무튀튀한 장도를 허리춤에 아무렇게 꽂은 사내, 진무앙이었다.
다른 무림세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마세가 또한 무가이면서 상단이기도 해서 외원 쪽에는 왕래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래서 외원은 늘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그곳과 달리 내원은 절간을 연상시킬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적고, 조용했다.
“이 시간이면 천웅이 자식이 가주전에 있을 것 같은데, 거기가 어디더라…….”
그는 사마세가에 여러 번 들어왔던 적이 있지만 가주전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진무앙의 시선이 이백여 장 밖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이층 전각에 닿았다.
“저긴 것 같네.”
목표를 정한 진무앙은 유성탄영신법을 펼쳤다.
그가 일보를 디딜 때마다 주변 전각들이 번개처럼 뒤로 밀려났다.
일보에 십여 장을 가로지르는 절세의 경신술.
숨 두어 번 쉬기도 전에 그는 가주전이 코앞에 보이는 건물의 그늘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사마휘가 없는 사마세가 내에서 그가 굳이 몸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주전이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이런 느낌을 받는 건 길을 가다 주먹만 한 금덩이를 줍는 것보다 더 드문 경우였다.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와룡천망을 펼쳐서 싹 훑어볼까? 귀찮은데… 천웅이 자식이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할 리도 없는데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가 가주전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강맹한 기운이 담긴 노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십니까?”
바로 옆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무앙이 고개를 돌렸다.
사마천웅이 그의 시선을 받으며 싱긋 웃고 있었다.
사마세가는 수향루만큼이나 안전한 장소라 진무앙의 경계심은 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이 바로 옆에 올 때까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는 사마천웅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그가 타박을 했다.
“후우… 그러는 넌 가주전에 있지 않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무존께서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죠.”
“내가 올 줄 알았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무존의 접근을 알고 마중을 나왔겠습니까.”
“그건 그러네. 근데 넌 어떻게 알았냐?”
“그보다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더 지체하면 가려고 해도 가실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내 앞을 막기라도 한다는 거냐?”
“비슷합니다.”
짜증이 난 진무앙이 사마천웅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 이 새끼, 지금 나랑 스무고개 하자는 거냐?”
“제가요? 무존의 그 뭐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뭐한 성격? 죽을래?”
진무앙이 위협을 했지만 사마천웅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때리시죠. 맞겠습니다. 어차피 무존께 두들겨 맞는 데는 이골이 난 몸입니다.”
“어휴… 그것도 자랑이라고.”
구시렁거린 진무앙이 물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무슨 꿍꿍이야?”
“저는 아무 꿍꿍이도 없습니다.”
사마천웅의 말에는 미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바로 알아차린 진무앙이 물었다.
“너는 꿍꿍이가 없는데, 다른 놈한테는 있다는 거냐?”
“글쎄요…….”
“말 못하겠다 이거지?”
진무앙의 움켜쥔 주먹이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흐흐흐, 천웅아, 생각해 보니까 네가 나한테 안 맞은 지 참 오래되긴 했다.”
당장 주먹이 날아올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사마천웅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건 믿는 게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라 진무앙은 오히려 속이 찜찜해졌다.
‘이 자식이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난향이 왔나? 그럴 리는 없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즉시 경계심의 강도를 극한으로 높이며 주변 수색을 위해 와룡천망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너무 느린 것이었다.
“꺄하하하하!”
하늘에서 날벼락처럼 어린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가 진무앙의 등으로 뚝 떨어졌다.
“꺄하하하하! 진 대가!”
“허걱!”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즉시 알아차린 진무앙은 진심으로 기절초풍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산산?”
등 뒤에서 경쾌한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응, 대가, 나야!”
진무앙의 등에는 이제 십사오 세쯤 되어 보이는 은색 경장을 입은 소녀가 그의 목에 팔을 꼭 두르고 업혀 있었다.
진무앙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대답은 산산이라는 소녀가 하지 않았다.
“저도 있습니다, 대형.”
청수한 중년인의 목소리.
고개를 돌린 진무앙은 회색의 유생복을 입은 사십 중반의 잘생긴 문사를 볼 수 있었다.
“익아…….”
중년문사는 정중하게 포권하며 허리를 직각으로 접었다.
“암천겁마조의 셋째 도익이 대가를 뵙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진무앙은 자신의 주변을 번개처럼 훑어보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의 주변 오 장 이내엔 잔돌과 나뭇조각들이 듬성듬성 흩어져 있었다.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도익이 있는 이상 그것들은 절대 평범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잔돌 세 개만 있으면 하늘의 구름도 가둘 수 있다고 알려진 당대 최고의 진법과 기관건축의 명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익이 반가움에 가득한 눈으로 진무앙을 보며 말했다.
“혹시 대형께서 바로 도망치실까 봐 근처에 흑암천절살진을 펼쳐 놨습니다. 억지로 빠져나가려 하시면, 아시죠? 대형의 몸이 상할 일은 없겠지만 알몸이 되어서 망신당하는 건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으으으…….”
진무앙의 목을 꼭 끌어안은 산산이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대가, 도망갈 거야?”
진무앙이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싶다.”
산산이 진무앙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안 돼! 얼마 만에 만났는데!”
“커커커커컥!”
목이 졸린 진무앙의 얼굴에 푸른 힘줄이 지렁이처럼 튀어나왔다.
그때, 옆에서 차분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산산아, 손에 힘 풀어. 그러다 대가 숨넘어가겠다.”
실핏줄이 불거진 눈으로 고개를 돌린 진무앙은 서른 전후의 요염한 홍의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바람처럼 다가와 진무앙을 꼭 끌어안았다.
“대가, 보고 싶었어요.”
진무앙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화영아, 너도 왔냐?”
“저희만 왔겠어요? 모두 왔어요.”
그 말에 진무앙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혜봉이가 요지의 애들 끌고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설마 했는데…….”
그는 목을 끌어안은 산산의 손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도익의 옆에는 삼남일녀가 서 있었다.
그들에게선 범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진무앙과 눈이 마주친 그들 모두가 포권하며 허리를 접었다.
“둘째 양혜봉이 대가를 뵈어요.”
양혜봉은 백의를 입은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녀였다.
“다섯째 호운상이 대형을 뵙습니다.”
호운상은 수향루에 머물다 형제자매들을 모아 오겠다며 떠났던 남자였다.
“일곱째 좌무경이 대형을 뵙습니다.”
좌무경은 허리에 다섯 자 길이의 고풍스러운 장검을 찬 서른 전후의 훤칠한 미남자였다.
“여덟째 주왕인이 대형을 뵙습니다.”
주왕인은 녹색 장삼을 입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태반을 가리고 있어 왠지 음침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이들이 진무앙을 부르는 호칭은 두 가지였다.
여자들은 그를 ‘대가’라고 불렀고, 남자들은 ‘대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진무앙은 혀를 찼다.
“난향하고 석초만 빼고 다 모였구나.”
양혜봉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언니와 다섯째는 자신들까지 합류하면 대가께서 눈치를 채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어요.”
“그래서 걔들은 빠졌다는 거냐?”
“예.”
난향과 강석초, 도익과 은산산, 홍의여인 홍화영과 양혜봉, 호운상, 좌무경 그리고 주왕인.
이들 아홉 명이 함께 있을 때 강호인들은 그들을 암천겁마조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었다.
진무앙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자기 할 일도 바쁠 텐데 내가 여기 있다고 다 팽개치고 쫓아온 거야?”
일곱 남녀는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이럴 거면 차라리 수향루에서 일을 저지르지 그랬냐.”
이번 질문의 대답은 도익이 했다.
“그곳은 대형을 사랑하는 여자 분들만으로도 자리가 모자라더군요. 저희까지 그곳에 간다면, 큰누님 옆에서는 극단적으로 둔해지는 대형이라도 바로 눈치채셨을 겁니다.”
산산이 또 어깨 위로 머리를 내밀며 진무앙에게 물었다.
“대가, 큰 언니 옆을 떠나 있는 동안 여자를 몇 명이나 꼬신 거야?”
“꼬시긴 누굴 꼬셨다고 그러냐, 막내야.”
“큰 언니 말로는 여자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고 하던데?”
“많기는… 스무 명도 안 되는데…….”
산산의 눈이 반짝였다.
“대가, 스무 명이 적어?”
“내 발가락 때만도 못한 제국의 황제라는 작자들은 후궁을 만 명 넘게 거느려.”
산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릉가?”
“그래.”
양혜봉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긴 뭐가 그래요! 대가가 호색한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대가 눈에는 아직도 우리가 코흘리개 어린아이들로 보이겠지만, 우리도 어른이 된 지 반백 년이 넘었다고요.”
진무앙은 움찔하며 양혜봉의 눈치를 살폈다.
양혜봉은 어릴 때부터 아주 기질이 깐깐해서 조목조목 따지기를 좋아했다.
더불어 그의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는 아주 드문 유형의 여인이었다.
그런 성격이기에 난향이 그녀를 믿고 천하오대신비문파 중 하나인 요지의 문주 자리를 물려준 것이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대가가 밖에 나가서 여자들과 인연을 맺는 걸 뭐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사고를 쳐도 말은 해주었으면… 그리고 야반도주는 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잖아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진무앙은 양혜봉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구시렁거렸다.
“지금 수향루로 몰려드는 여자들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너희는 입 좀 다물어주면 안 될까?”
“안 돼요!”
“안 됩니다!”
“못 해요!”
“그럴 수 없습니다!”
강력한 거절 의사가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왔다.
가강 강한 거절은 진무앙의 목에 매달린 산산의 것이었고.
“절대 안 대!”
진무앙이 사마천웅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진무앙이 물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실실 웃고 자빠졌냐?”
“죽기 전에 이렇게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좋다고?”
“예.”
진무앙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이래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생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