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72
372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
난향의 집무실은 전각의 최상층 전부를 사용하는 터라 백여 평에 달할 정도로 굉장히 넓다.
평소엔 그녀 혼자 있거나 찾아온 사람 한두 명이 더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수가 십여 명이 넘었고, 하나같이 기세가 남달라 백여 평의 집무실이 비좁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그들 중 남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상석에 앉은 난향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붉은 장포를 입은 연백지.
화사한 기모노 차림의 아리마 유코.
백의궁장을 입은 얼음처럼 차가운 분위기의 냉사하.
약향이 배어 있는 마의를 걸친 순수한 분위기의 곽운정.
남자처럼 장포를 입고 영웅건을 두른 경쾌한 느낌의 당휘경.
원래 별채에서 이 총관이 말했던 손님은 이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곳엔 그들 말고도 여러 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수향루로 복귀한 후 늘 은신해 있던, 고대의 곤룡포를 입은 환상적인 미녀 몽지림.
자의궁장이 너무 잘 어울리는 오청연.
아름다운 금발벽안의 타라.
거칠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변방 낭인계 지존 혈지주 우문향.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석채은.
남궁세가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 나타난 남궁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절세미녀 금설화…….
난향이 옆에 서 있는 진무앙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전대와 당대의 천상십화가 당신이라는 남자 한 명을 보려고 열 명 넘게 모였는데, 보는 감상이 어때?”
그녀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용암처럼 뜨거운 느낌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살기였다.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진무앙은 벌써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진무앙은 우울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상관없는 애들은 내보내지? 저기 석 목주나 남궁가의 화아, 금설화, 청연이, 휘경이, 타라. 쟤들은 난향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
“과연 그럴까?”
난향이 말을 이었다.
“타라는 당신이 죽으라면 진짜 스스로 목숨을 끊고도 남을 여자고, 석채은 목주는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을 뿐, 이미 하루 종일 당신 생각만 하는 상태야.”
타라는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으로 진무앙을 보고 있었고, 석채은은 귀를 쫑긋 세우고 난향의 말을 경청했다.
“금설화는 당신 보려고 섬서성의 만금산장을 떠나 천 리 타향인 이곳 분점으로 자진해서 왔고, 청연이는 외유하는 중에 당신하고 불꽃이 튀었지.”
“불꽃은 무슨! 그런 거 없…….”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려 하던 진무앙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청연이 그를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향은 말을 계속했다.
“사천성 성도의 당휘경 포두는 당신 만나려고 관직까지 때려치우고 여기까지 왔어. 남궁가의 화아는 죽은 희아 때문에 말을 못할 뿐, 당신 눈길만 스쳐도 심장이 배로 빨리 뛰지. 이들 중에 내 방에서 나갈 만한 여자가 있어?”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결론을 내렸다.
“저들은 모두 이 방에 있을 자격이 있고, 천중제일색이라 불리는 당신의 진면목을 볼 권리도 있어. 그 뒤에 저들이 당신을 버리든 말든 그건 그들의 선택이고.”
암담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쉰 진무앙이 눈을 들어 천장을 보았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짧은 사이에 그의 표정은 담담하게 변해 있었다.
난향이 물었다.
“그 표정 뭐야?”
진무앙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포기하면 편한 법이지.”
그때 석채은이 끼어들어 난향에게 물었다.
“루주님, 호명하신 여자분들과 그렇지 않은 여자분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궁금한가요, 석 목주?”
석채은이 금설화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걸요?”
난향은 무표정한 얼굴로 진무앙을 힐끗 본 후 입을 열었다.
“호명하지 않은 여자들은 모두 무앙과 한 번 이상 잠자리를 같이했어요. 성수곡의 곽 소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최소 수 개월에서 많게는 수 년 이상 한 방에서 같이 살기도 했죠.”
석채은과 다른 여자들의 눈이 커졌다.
그중에서도 곽운정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무림맹에서 만났던 그 정의롭고 수려하던 청년 협객의 진면목이 천하에 비교할 남자가 없는 개 난봉꾼이라니.
그녀의 마음이 찢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난향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무심하던 하늘이 나를 도우려고 작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엔 내가 초청한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어. 무앙의 참모습을 밝히기엔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팔짱을 끼고 창가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던 연백지가 석채은 등 난향이 호명했던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무앙은 천하의 개 난봉꾼이야. 그의 정체를 알았으니 오만 정이 다 떨어지지? 어서들 나가. 여기 더 있어봐야 남자혐오증만 늘어.”
타는 듯한 홍포만큼이나 강렬하고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집무실이 정적에 잠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연백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들이 어려서 그런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이네. 난향 언니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내가 그것까지 말해줄게.”
석채은과 금설화 등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무앙은 한 여자와 이 년 이상 같이 산 적이 없어. 설레는 한 집 살림의 결과는 늘 그의 배신과 야반도주로 파탄이 났지. 그가 너희에게는 다를 거라고? 우리도 모두 그렇게 믿었다가 그에게 뒤통수를 어마어마하게 세게 맞았어. 그의 야반도주에 예외는 없거든.”
연백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래도 안 일어설 거야?”
그래도 일어서는 여자는 없었다.
우문향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가지 더 말해줄게. 여기 있는 사람이 무앙이 인연을 맺은 여자 전부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그건 착각에 불과해.”
석채은이 물었다.
“더 있다는 건가요?”
“당연하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저 인간은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절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어. 천하를 뒤져 보면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도 모자랄 만큼의 여자들이 튀어나올걸?”
모든 여인의 시선이 일제히 진무앙을 향했다.
당장 잡아 죽이기라도 할 듯한 눈길들이었다.
포기하면 편하다며 담담한 얼굴이던 진무앙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다리를 혼신의 힘을 다해 붙들었다.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
난향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겁나나 보지?”
진무앙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훗. 나 진무앙이야.”
“이 자리에 당신이 진무앙이라는 거 모르는 여자 있어?”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태어날 때 겁이라는 걸 상실하고 나온 사람이라고.”
“그런데 왜 식은땀을 흘려?”
“응?”
진무앙은 재빨리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훔쳤다.
“하하하하. 이건 식은땀이 아니라 더워서 나는 거야. 여기 사람 많잖아.”
“금강불괴에 한서불침, 들끓는 용암 속에 들어앉아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당신이 덥다고?”
“나도 사람이거든.”
“호호호호, 사람? 당신이? 최근에 내가 들은 말 중에 가장 재미있는 말이네.”
그때 오청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여자가 몇이든 상관없어요. 내가 그의 옆에 있는 건 남녀관계 때문이 아니니까.”
이 자리에서 오청연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난향뿐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만 질문할 틈은 없었다.
타라가 뒤이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루드라님을 사랑하는 여자가 많은 건 저분이 그만큼 훌륭하기 때문이죠. 저는 아무 불만 없어요.”
타라의 말은 이런 상황에서 하기엔 어이없을 정도로 속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당연한 말이었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녀는 진무앙을 수백 년 동안 신으로 섬겨온 뇌정신궁의 당대 궁주였으니까.
즉, 진무앙의 뜻은 신의 뜻인 것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그를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여인들의 눈빛이 깊어졌다. 생각이 복잡한 눈빛들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도 오래 이어질 수가 없었다.
금설화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간결했다.
“금씨 가문의 모든 것은 진 대가의 것이에요. 저분은 제가 모시는 주인이란 말이에요. 대답이 되었겠죠?”
연백지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제정신들이 아니네…….”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진무앙만을 바라보던 유코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백지, 쟤들 뭐라 할 거 없어. 무앙한테 미쳐서 정신줄 놓은 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일이 있었을까?”
반박의 여지가 없는 말이라 연백지는 입술만 꼭 깨물었다.
그때 남궁화가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감히 여러분과 함께할 수 없어요.”
앞의 금설화 등과는 다른 말이라 여인들은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진무앙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남궁화가 말을 이었다.
“고모님께서 사랑하신 분에게 제가 어떻게 감히 저를 여자로 보아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저는 평생 저분의 옆에서 시녀로라도 모시고 싶을 뿐이에요.”
난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연백지 등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여인들의 시선이 당휘경과 석채은을 향했다.
그녀들도 무슨 말이든 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당휘경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진무앙을 불렀다.
“진 도사.”
도사라는 호칭은 그녀가 사천성 성도에서 진무앙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말해, 당 포쾌.”
“지금은 포쾌 아니야. 포두로 진급했다가 사직해서 무직이야.”
“정말 나 때문에 사직한 거냐?”
“맞아.”
“왜? 천직이라며?”
“당신이 여기 있는데 오겠냐는 서신을 받았을 때 확실히 알았거든.”
“뭘?”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그게 뭔데?”
“매일 당신을 보는 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내가 어디 매여서 사는 남자가 아니라는 거, 성도에서도 느꼈을 거 아냐.”
“느꼈지. 그런데, 못 참겠더라고. 너무 보고 싶어서.”
“그 마음 지금 접지 않으면 인생 꼬인다. 안 보여? 여기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당휘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보여. 내 눈엔 너를 잃을까 봐 무서워하는 여자들만 보여.”
“너도… 병이다……. 선친의 복수를 하겠다는 네가 마음에 들어서 손 한 번 잡지 않았는데…….”
진무앙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석채은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난 어차피 진 호위에게 여자가 몇 명이든 관심 없어요. 당신보다 못생기고, 무공도 형편없고, 성격도 제멋대로에 모든 걸 제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우리 오빠도 첩만 수백 명인 걸요. 아니, 몇천 명은 될 거예요.”
사람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연백지가 물었다.
“천하에 무앙보다 더한 개 난봉꾼, 탐화랑이 있단 말야?”
석채은이 어깨를 으쓱했다.
“있어요, 우리 오빠.”
“그가 누군데?”
“그건 비밀이에요, 호호호.”
경쾌하게 웃은 석채은은 연이어 난향에게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을 보면서 진 호위의 옆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어요. 루주님, 말해주세요. 여러분의 젊음, 믿을 수 없는 만큼 강한 무공, 근원이 진 호위죠?”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난향은 물론이고 연백지, 냉사하, 유코, 우문향의 안색이 굳어졌다.
석채은이 말을 이었다.
“루주님의 표정을 보니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군요.”
그녀가 선언하듯 말했다.
“루주님과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해도 저 또한 진 호위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에게 버림받는다 해도요.”
진무앙이 탄식하며 말했다.
“석 목주, 말이 좀 이상하다는 거 못 느껴요? 난 당신을 가진 적이 없어요. 그러니 버릴 일도 없습니다.”
석채은이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미래도 그럴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때 난향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닥치고… 전부 꺼져!”
그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당연히 진무앙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한 가닥 번개처럼 창밖으로 사라졌다.
유코가 난향에게 말했다.
“얘들, 언니 생각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무앙하고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전부 비정상이 된다는 거, 누구보다 언니가 잘 알면서.”
서로를 돌아보던 여인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