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39
039 늦으면 잘린다!
진무앙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소저에게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소. 내가 이곳에 은신하고 있다는 걸 집마부의 마졸들이 알게 되면 소저도 생명이 위험해지오.]채경옥의 얼굴에 자신감이 어렸다.
-소협, 저의 집에 잠시 머물도록 하세요. 그들이 아무리 악독한 자들이라 해도 감히 저희 집안까지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을 거예요.
[지금까지의 도움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소. 염치없게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소.]-폐가 아니에요. 저 또한 정파의 후인. 무림맹의 무인을 돕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진무앙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말씀만으로도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맙소. 하지만 나는 급하게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소. 빨리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무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될 것이오.]-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협.
진무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갈등하는 기색.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임무의 특성상 얘기할 수가 없소.]-아쉽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잠시라도 저희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움직이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소저의 집이라면?]채경옥은 당당하게 허공에 글을 썼다.
-소협도 이름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저희 집안은 창천사마세가예요.
[아! 이럴 수가!]진무앙이 탄성과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소저,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도 사마세가 사람이오!]-정말요?
[그렇소.]-누군지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제가 도울 수 있을 텐데.
[미안하오. 그건 안 되겠소.]채경옥은 안쓰러운 눈으로 진무앙을 보며 허공에 글을 썼다.
-소협, 그곳에서 나오세요. 상처가 악화될까 걱정돼요.
[음… 안 그래도 내상이 깊어지는 것 같았는데, 고맙소.]진무앙은 의자 밑에서 힘겹게 기어 나왔다.
-의자 위로 올라오시겠어요?
[그럼 신세를 지겠소, 소저.]진무앙은 느릿하게 의자로 올라왔다.
그는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앉아 있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는 자세.
채경옥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글을 썼다.
-앉아 있기 힘드실 텐데 누우세요.
의자는 길었지만 장신의 그가 다리를 펴고 눕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게다가 채경옥까지 앉아 있지 않은가.
진무앙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채경옥이 얼굴을 붉히며 재촉했다.
-예의를 따지기엔 소협의 상처가 너무 중한 듯하니…… 누… 누우세요.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채경옥의 탐스러운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리고 누우며 말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리다.]-괘… 괜찮아요.
채경옥의 뺨이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다가닥. 다가닥.
서쪽 하늘이 진홍빛 노을로 물들 즈음 창천사마세가의 내원으로 사두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진무앙과 채경옥이 탄 마차였다.
-소협, 도착했어요.
채경옥이 아직도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진무앙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글을 썼다.
-이제 편하게 있으셔도 돼요. 세가의 내부는 안전하니까요.
진무앙은 부드럽고 탄력 있는 허벅지에서 머리를 떼고 싶지 않았다.
어루만지고 싶은 걸 참느라 손이 떨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세가에 들어왔는데도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
혀를 내밀어 어느새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인 그는 미련을 추스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채경옥의 눈이 커졌다.
-소협, 입술이 갈라졌어요. 내상이 심해진 거 아닌가요?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그럼 다행이고요.
채경옥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계속 전음을 사용하시는 건 세가 내인데도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요?
[그렇소. 나를 쫓는 자들은 사해집마부 비마잠혈 소속의 정보 무인들이요. 그들의 잠입술과 은신술은 일반 무인들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나오.]-아… 그럼 어떻게 하지요? 아버님께 도움을 청해볼까요?
기겁한 진무앙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채경옥이 아버님이라 칭할 사람은 현 사마세가주인 무적신검(無敵神劍) 사마천웅뿐이다.
[그건 안 되오! 소저!]-왜……?
[내 행적은 맹주님과 본 전의 전주님만이 아실 수 있는 극비요. 아무리 가까운 친인에게도 나에 대해 말하면 안 되오.]그 정도로 보안이 철저한데 왜 자신에게는 모든 것을 순순히 말해주는지 의문을 가질 법도 하련만 채경옥은 해맑은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지 알려주세요.
[소저, 먼저 내상부터 치료해야 할 것 같소. 적당한 곳이 있소?]채경옥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 방이라면 안전할 거예요. 제 허락이 없으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거든요.
진무앙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채경옥의 제안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사마무광의 처, 그녀의 방이라면 그들 부부의 내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마치 혼자 지내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혼인한 지 십 년이라더니 권태기가 와서 각방을 쓰고 있는 건가?’
진무앙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의 경험상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채경옥 같은 절세미녀라 해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뛰지 않는 때가 오게 마련이다.
그가 그랬으니까.
참고로 그가 버틴 가장 긴 시간이 이 년이었다.
그 뒤는 늘 그랬듯이 야반도주로 끝이 났고.
어쨌든 진무앙으로서는 채경옥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채경옥의 얼굴이 환해졌다.
-소협은 무림맹의 일을 하는 정파의 협객이잖아요.
완벽한 신뢰, 그리고 넘치는 백치미.
진무앙은 속으로 혀를 찼다.
‘쩝, 이 아줌마는 무림을 만담꾼의 이야기로 배웠나… 순진한 거야, 뇌가 맑은 거야?’
채경옥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표정이 안 좋소.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제 방까지 가려면 지금 저를 호위하는 아이들과 마차를 기다리고 있을 식솔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데…….
진무앙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비마잠혈의 마졸들도 잡지 못한 나요. 은신술은 자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채경옥의 눈매가 다시 환해졌다.
-정말인가요?
[그런데 소저의 도움이 필요하오.]채경옥은 결연한 눈빛으로 글을 썼다.
-얼마든지 돕겠어요. 제가 무얼 하면 되나요?
진무앙의 입술이 달싹이고, 채경옥의 얼굴은 완전히 사과를 넘어 홍당무가 되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네…….
글이 아니라 말이었다면, 모깃소리처럼 작은 목소리였을 것이다.
다가닥. 다가닥.
잠시 후 마차가 섰다.
“부인, 도착했습니다.”
여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다.”
채경옥의 목소리에는 맑고 경쾌하면서도 오랫동안 사람을 부리며 살아온 사람 특유의 권위가 실려 있었다.
밖의 기척을 살피는 진무앙의 눈에 의혹의 기색이 떠올랐다.
‘분명 소가주 부부가 머무는 곳일 텐데 경계가 왜 이렇게 허술하지? 무인이라곤 마차를 호위한 여무사들이 전부이고…… 사정이 어떻든 이러면 나야 좋지, 흐흐흐.’
그때 채경옥이 진무앙의 앞에 글을 썼다.
-소협, 저는 준비됐어요.
고개를 끄덕인 진무앙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릿해졌다.
채경옥이 눈에 놀람의 빛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분명히 진무앙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앉아 있었는데도 실재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신암행과 암향무영이 합쳐진 절세의 은신술이 펼쳐진 것이다.
진무앙이 작정하고 마차 내부와 동화되었다면 채경옥은 그를 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채경옥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사두마차의 내부는 넓고 높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허리를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살짝 허리를 구부린 그녀는 치마의 양옆 자락을 잡아 넓게 펼쳤다.
그녀가 입고 있는 건 품이 넓은 백의 궁장.
진무앙의 신형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처럼 출렁이는가 싶더니 채경옥의 치마 아래로 스르르 스며들었다.
장신에, 체격도 건장한 남자가 치마 아래로 파고들었지만 궁장의 형태는 한 치도 변함이 없었다.
진무앙의 은신술은 그 정도로 탁월했다.
어둠이 아니었다면 채경옥의 피부가 홍옥처럼 붉게 변한 것이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진무앙의 은신술에 놀란 기색은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격한 놀람이 반복되다 보니 면역이 된 덕분이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문 옆에 시립하고 있던 여무사가 채경옥이 내민 손을 잡아 그녀를 부축했다.
마차가 서 있는 곳은 사마세가의 직계들만 사는 내원의 마당.
삼백 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답게 마당의 바닥은 청석이었고, 너비는 사두마차 수십 대가 몰려들어도 넉넉할 만큼 넓었다.
마당 너머로 보이는 즐비한 수십 채의 고루거각은 사마세가의 저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채경옥은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여무사들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대신 푸짐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채경옥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그녀의 옆에 붙었다.
중년 여인은 소가주의 거처를 총괄하는 유 낭랑이었다.
유 낭랑이 채경옥에게 말했다.
“부인, 삼천 배가 힘들진 않으셨어요?”
다정다감하고 구수한 목소리.
채경옥이 생긋 웃었다.
“힘들긴, 오늘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네. 어젯밤 꿈에 붉은 혜성을 봐서 마음이 뒤숭숭하다며 말린 자네 말을 들었으면 평생을 후회할 뻔했어.”
“그렇게 좋으셨어요?”
“그렇다니까. 호호호.”
화색이 도는 얼굴과 가볍고 맑은 웃음.
최근 수년래 이렇게 즐거워하는 채경옥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유 낭랑의 얼굴도 환해졌다.
그때였다.
채경옥의 볼이 파르르 떨리며 그녀의 발걸음이 배배 꼬였다.
허벅지에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숨결이 닿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 바로 뒤에 웅크리고 있는 진무앙의 입김이었다.
‘소… 소협도 사람인데 수… 숨은 쉬어야… 지…….’
유 낭랑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부인,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시기라도?”
채경옥은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아닐세.”
그런 그녀의 귀로 진무앙이 전음입밀이 스며들었다.
[미안하오. 좁아서…….]진무앙은 그녀의 다리 바로 뒤에 있었다.
그가 말을 할수록 허벅지 안쪽에 닿는 숨결의 강도가 세졌다.
채경옥의 입술 사이로 한숨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영문을 모르는 유 낭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채경옥을 보았다.
내원이 다가올수록 채경옥의 걸음이 느려졌다.
유 낭랑이 말했다.
“부인, 피곤하실 텐데 어여 들어가 쉬셔야지요.”
채경옥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별이 참 많구나. 밤공기도 시원하고. 그래서인지 좀 더 바람을 쐬고 들어가고 싶네.”
하늘과 채경옥을 번갈아 본 유 낭랑이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부인,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니지요? 제 눈에는 별은커녕 잔뜩 구름 낀 하늘만 보이는데요. 공기도 습기를 머금어서 텁텁하기만 하고요.”
채경옥이 움찔했다.
“응?”
비라도 오려는지 하늘은 먹구름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그러니 별이 보일 리가 없다.
“아… 그렇군. 내가 잘못 보았네.”
그래도 채경옥의 걸음을 빨라지지 않았다.
마차에서 소가주전까지의 거리는 삼십 장가량.
채경옥이 얼마나 느리게 걸었는지 그 짧은 거리를 지나는데 일각이나 걸렸다.
침실은 소가주전에 들어서고도 십여 장을 더 가야 나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유 낭랑은 얼마나 답답했는지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 되어 있었다.
채경옥이 아쉬움 가득한 눈을 하고 문을 열며 유 낭랑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들어가서 쉬게.”
“아니에요. 씻을 물을 받아올게요.”
흠칫한 채경옥이 유 낭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지고 오지 말게. 내가 가겠네.”
“피곤하실 텐데…….”
“피곤하지 않네.”
“알겠습니다, 부인.”
유 낭랑이 돌아서 가는 걸 잠시 보던 채경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문을 닫은 순간, 궁장 아래서 검은 그림자가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진무앙이다.
채경옥의 앞에 선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을 토했다.
“크윽!”
놀란 채경옥이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으며 부축을 했다.
“소협!”
“은신술을 쓰느라 억눌렀던 내상이 잠시 도졌소. 곧 나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렇게 서 있지 마시고 저기 누우세요.”
채경옥이 눈으로 가리킨 곳에는 대여섯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것 같은 커다란 침상이 있었다.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밖엔 조금씩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난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향루의 영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했었다.
지키지 않으면 자를 거라는 협박과 함께.
진무앙이 말했다.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평생 갚기 어려운 은혜요. 사문의 요상술이 특별하니 밤 동안 그것으로 내상을 치료해 보겠소.”
그는 손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위에서 요상을 할 터이니 소저께서는 푹 주무시오. 신세 지는 마당에 염치없는 부탁인 줄 알이지만, 순간이라도 경동하면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으니 소저는 기척에 조심을 해주시오. 아침에 뵙겠소.”
“소… 소협!”
채경옥이 급하게 진무앙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장 구석을 뜯어내고 위로 올라갔다.
물론 내상을 입은 것처럼 비틀거리는 건 잊지 않았다.
천장 위로 오르자마자 뜯어낸 자리를 재빠르게 복구한 그는 사신암행과 암향무영으로 은신하며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늦으면 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