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40
040 그러시든지요
어둠이 내린 수향루 별채 정원.
한가롭게 정원을 산책하는 듯하던 난향이 걸음을 멈추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와!”
정원 한편의 나무 그늘 아래, 어둠 한 자락이 가늘게 흔들렸다.
“빨리 안 나올 거야?”
난향의 왼손 장심에 푸르스름한 백광이 은은하게 어렸다.
정원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찰나지간 난향의 주변 땅에 서리가 맺혔다.
무시무시한 음한진기.
흠칫!
그림자가 경직되는가 싶더니 곧 그늘을 뚫고 진무앙이 기지개를 켜며 걸어 나왔다.
그는 난향의 왼손 장심을 흘낏 보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어? 루주님 아니십니까? 이제 영업 시작될 텐데 일은 어쩌고 여기에 계십니까? 나도 마침 본루로 출근하려던 참이었는데요.”
푸르스름한 백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왼손을 내린 난향이 그를 째려보았다.
“무앙.”
진무앙은 슬쩍 그녀의 시선을 비키며 물었다.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는 거야? 요지빙백신강(瑤池氷白神罡)까지 끌어올리고. 고슴도치가 울고 가겠다.”
난향의 눈빛이 강해졌다.
“시치미뗄 생각이라면 포기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진무앙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채경옥.”
난향의 한 마디에 진무앙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석초, 이 입 싼 놈. 혀를 확 뽑아버릴까 보다.”
“이게 석초를 탓할 일이야?”
“수향루에 피해가 갈 일은 없어.”
“지금 내가 사업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아니.”
당연히 아니라는 걸 진무앙도 잘 알고 있었다.
난향은 천하를 쥐고 흔드는 남자들보다도 배포가 더 큰 여자였으니까.
난향이 툭 던지듯 물었다.
“단리영 때문이지?”
진무앙은 그 한마디로 강석초가 난향에게 전부를 이야기한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전부 말했다면 난향이 저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채경옥에게 어떤 방법으로 접근했는지를 난향이 알았다면…….
‘석초야, 고맙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강석초의 혀를 뽑아버리겠다고 한 말을 기억도 하지 못했다.
진무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영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거 난향도 알잖아. 그녀에게 주었던 흑암주가 내 손에 돌아온 이상, 의뢰를 맡은 거나 마찬가지야.”
진무앙은 소소가 흑암주를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난향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난향은 진무앙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흑암주의 가치를 잘 아는 단리영이 그것을 외부로 내보낸 건 진무앙에게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어. 이해도 해.”
“그럼 됐네. 나, 일하러 갈게.”
진무앙은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지만 난향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무앙, 내 질문에 대한 답은 하고 가야지. 석초한테 채경옥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이유가 뭐야? 설마 미남계를 쓰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짓 하다가 걸리면 나도 더는 못 참아.”
진무앙의 등골에 식은땀이 솟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남계라니! 날 뭘로 보는 거야!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러니까 그런 의심은 하지 마. 난향도 알잖아. 내가 유부녀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거.”
그와 난향의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난향이 말했다.
“그걸 아니까 지금 내가 참고 있는 거야.”
날이 섰던 어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낮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간섭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어. 하지만 출근 때 지각하면 바로 이거야.”
그녀가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진무앙이 웃으며 말했다.
“각골명심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주.”
난향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정말 그러기를 바라. 어서 출근해. 늦겠어, 진 호위.”
“넵!”
난향이 돌아가고 난 후 진무앙은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큰일 날 뻔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지.’
호위무사 대기실.
간이 침상에 누운 진무앙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방음이 되지 않는 곳이라 손님과 하인, 기녀들의 목소리가 뒤엉킨 밖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고스란히 들렸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간이 침상을 돌아보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정성을 들여 수련할 만한 무공이 아닌데…….”
대기실에는 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간이 침상 위엔 사십대 전후의 강퍅한 인상을 한 중년 무인이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 중이었다.
그의 이름은 목일석.
며칠 전 수향루를 떠난 위명신, 진무앙과 더불어 세 명뿐인 특급 호위무사였다.
그와 진무앙은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나누었을 뿐, 한 번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마침 진무앙의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듯 목일석이 눈을 떴다.
“내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하는군.”
역시 들은 게 맞았다.
진무앙은 팔베개하며 말을 받았다.
“내력을 일주천할 때마다 손가락 끝에 자색의 기운이 어리는 심법이 천하에 얼마나 된다고 못 알아보겠습니까.”
목일석의 안색이 굳어졌다.
“안목이 대단하군. 진 호위, 자네가 익힌 무공이 안목만큼이나 대단한지 견식하고 싶네만.”
“사양하죠.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 돈 안 받고 싸우는 것이거든요.”
“실망이군. 무공은 안목이나 혀에 미치지 못하는가 보지?”
정사마를 막론하고 무인이라면 이 정도로 모욕적인 말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법이다.
하지만 진무앙의 눈빛은 변함이 전혀 없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관심 없으니까.”
목일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진무앙이 저렇게 나오는데 불문곡직하고 주먹을 날리는 건 목일석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진무앙을 보며 말했다.
“내 무공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게.”
“심장마비 걸리겠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정색하고 경고씩이나 날립니까?”
목일석이 손을 들어 올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의 장심에서 일어났다.
무엇인가가 발동되기 직전의 상태였다.
“약속하지 않으면 손을 쓸 수밖에 없네.”
진무앙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목일석에게 물었다.
“나 죽이고 수습할 자신은 있습니까? 들으니까 수향루에 들어온 지도 이 년이 넘었다던데 나를 죽이면 이곳을 떠나야 할 텐데요? 알죠? 나, 루주가 내리꽂은 사람입니다.”
“흠…….”
목일석의 눈에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진무앙이 난향의 인맥으로 고용된 호위무사라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목 호위, 손 내려요.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도 없고, 그런 얘기를 할 만큼 가까운 사람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목일석의 눈에 미묘한 빛이 일렁였다.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진무앙을 죽여 입을 막을 것인지 아닌지.
하지만 그 갈등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진무앙은 그의 무공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전혀 겁을 먹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객기거나 고수거나.
전자라면 문제가 없지만 후자라면 상황이 심각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가능성은 후자가 훨씬 컸다.
그의 무공 내력을 한눈에 알아보는 건 객기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정한 목일석이 손을 내렸다.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현명한 걸 보니까 목 호위는 굉장히 오래 살 겁니다.”
목일석의 눈썹이 역팔자로 곤두섰다.
비록 지금은 기루의 호위무사로 숨어 살고 있지만, 그는 남에게 비웃음을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서늘해진 목소리로 진무앙에게 물었다.
“놀리는 건가?”
“천만에요. 진심입니다.”
난향이 들었다면 당장 입술에 침이나 바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목일석은 진무앙이 어떤 남자인지 전혀 모른다.
곤두섰던 목일석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아 내려왔다.
“내 진신 무공을 한눈에 알아보았을 정도니 이름이 없지는 않은 듯한데, 별호가 뭔가?”
“말 몇 마디 나눴다고 별게 다 궁금하십니다. 신경 꺼주시죠. 남자의 관심은 달갑지 않습니다.”
목일석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진무앙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가?”
최근에 어떤 놈이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맞다, 주신언.
진무앙은 남자, 그것도 요즘 자신을 조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주신언을 떠올린 것에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내가 왜 하고많은 업소 중에 기루에 취직했겠습니까.”
질문이 비슷한 만큼 대답도 그때와 비슷하게 나왔다.
목일석은 이 말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말했다.
“자네에게도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듯하군.”
“천하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있기는 하답니까?”
“그럼 자네가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믿겠네.”
“그러시든지요.”
진무앙은 눈을 감았고, 목일석은 명상에 잠겼다.
목일석은 진무앙의 마지막 한마디를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알지 못했다.
진무앙과의 약속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약속을 깨고 비밀을 누설할 수 있는 남자가 그였다.
그는 약속이나 비밀 같은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진무앙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목일석이 눈을 뜨며 물었다.
“어딜 가는가?”
“심심해서 순찰이나 돌렵니다. 그리고 관심 끄라니까요.”
진무앙은 퉁명스럽게 말한 후 대기실을 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는 목일석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진무앙…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어떤 놈이지?”
대기실을 나온 진무앙이 간 곳은 난향의 집무실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장죽의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근무 시간에 여기는 왜 왔어?”
의자에 털썩 앉은 진무앙이 대답했다.
“궁금한 게 생겨서.”
“뭐가?”
“목일석.”
“목 호위가 왜? 그 사람은 너하고 달라서 사고치고 다니는 일이 없는데?”
“내 눈엔 그 인간 자체가 엄청 큰 사고처럼 보이던데?”
난향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내가 목 호위의 정체를 모르는 거 같아서 이러는 거야?”
“물론 아니지. 그가 십만대산 출신인 걸 알면서도 고용한 이유가 궁금할 뿐이야.”
“알고 싶어?”
“별로 알고 싶지는 않은데 말해준다면 굳이 안 들을 이유는 없지.”
“알면 말해주겠는데 사실은 나도 그의 사연이 뭔지는 몰라. 관심도 없고.”
“그러면서 고용했어? 보니까 숨어 지내는 신세인 거 같은데, 비마잠혈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걔들 성격 생각하면 목 호위를 숨겨준 거나 다름없는 수향루는 주춧돌 하나 남겨놓지 않으려 할 거야.”
“목 호위는 당신하고 많이 달라. 눈에 띄지 않게 알아서 조심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비마잠혈은, 그건 걔들이 주변에서 얼쩡거릴 때 고민해도 돼.”
“난향이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만, 뭔가 억울하네.”
“왜 억울해?”
“나한테는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협박까지 해대면서 목 호위는 엄청나게 배려해 주잖아.”
“그게 억울하다고? 오히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는 당신이 아니잖아.”
“쳇.”
“아무튼 당신이 내 사업에 관심을 가져준 건 고마워. 그래도 너무 앞서 나가지는 마. 무앙, 설마 내가 이난향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진무앙은 가지런한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근무 중이잖아. 맛있는 술 처마시고 우리 애들한테 개진상 부리는 놈이 있는지 순찰이나 한 바퀴 돌란다.”
“열심히 해.”
“그렇게 말 안 해도 내 밥줄은 알아서 챙깁니다, 루주. 하하하!”
진무앙은 가벼운 웃음을 남기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의 등을 보는 난향의 눈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무앙, 목 호위 정도를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나중엔 어쩌려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