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405
405 부탁하는 걸로 보이냐?
낙양성의 성벽 위.
채채채채챙-
퍼퍼퍽! 쾅쾅쾅-
“으드득, 이 괴물들아, 뒈져라!”
끄아아아아아!
요란한 무기의 충돌음과 권장이 골육을 으스러뜨리는 소름 끼치는 파육음, 악에 받친 고함과 스산한 괴성이 난무했다.
성벽 위에 발을 디딘 마인, 마물들과 싸우는 낙양 방어군의 기세는 결사적이었다.
그들이 뚫리면 낙양에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혼돈마벽의 검은 장막이 양측이 무섭게 뒤엉킨 성벽 바로 앞을 뒤덮고 있었다.
혼돈마벽은 성벽을 넘어서기 위해 쉴 새 없이 꿈틀거렸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진무앙이 떠나기 전 펼쳐 둔 천지무문금마진의 강력한 기운이 그것이 성벽으로 올라서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는 암왕운, 절암무가 혼돈마벽에게 다가서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금마진이 성벽을 따라 힘을 발휘하는 한 세 기운의 합일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금마진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금마진은 혼돈마벽이 만들어낸 마인과 마물들을 막는 공능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막는 건 낙양 방어군의 몫이었다.
챙챙챙-
“으악!”
성벽의 어느 지점, 마물의 손에 무사들이 하나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죽어가는 동료를 보는 무림맹 무사들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을 공격하는 건 누더기가 된 옛 옷을 걸친 해골 무리였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낙양 부근엔 대륙 최고의 공동묘지 북망산이 있었다.
이 해골 마물들은 그곳에 묻혔다가 마물이 된 것이다.
그것들의 전투력은 무사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데다가 아무리 베고 때려도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반면 무사들은 해골들의 무기인 상문봉에 맞으면 뼈가 부러지거나 심하면 즉사했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무사들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그들의 자세는 결연했다.
하지만 수와 전투력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정신력만으로 우세를 점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사들이 몰살의 위기에 직면한 순간,
휘이이이잉-
무시무시한 음한경력이 태풍처럼 마물을 휩쓸었다.
천하오대 신비문파 중 수위를 다투는 요지의 빙백신강이었다.
방원 이십 장 이내에 있던 모든 마물이 얼음조각상처럼 얼어붙었다.
그 위로 난향이 한 가닥 바람처럼 날아내렸다.
그녀의 발이 얼음에 닿자 모든 것이 터져 나갔다.
콰콰콰콰쾅-
얼음에 덮였던 마수와 마물들은 가루가 되어 지면에 흩어졌다.
구원을 받은 무사들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바로 옆의 동료들을 돕기 위해 달려갔다.
난향이 다른 지역으로 몸을 날리려 할 때 유령처럼 자전신룡검을 든 오청연이 나타났다.
난향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녀가 말했다.
“이 낭랑, 이대로라면 오래 못 버텨요.”
난향은 굳은 표정으로 전장을 돌아보았다.
몽지림을 비롯한 방어군의 초절정고수들이 전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전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암왕운 때문에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시간은 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마인과 마물의 손에 쓰러지는 무인의 수는 빠르게 늘어났다.
시간이 지나도 쌩쌩한 마인, 마물과 달리 무사들은 피로와 탈진으로 지쳐 갔다.
거기에 싸우다 성벽 밖으로 떨어진 무사들은 혼돈마벽에 의해 마물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무사가 적이 되어 나타나는 걸 보고 심적 타격을 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방어군에게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장을 둘러본 난향이 입을 열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해. 귀신이 되어서라도 낙양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일이야.”
“그가 싸움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까?”
“돌아와.”
확신에 찬 단정적인 목소리.
그녀의 말을 들은 오청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쩌면 그에 대한 너의 믿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갑작스러운 어조 변화에 어리둥절해진 난향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청연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길게 너의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도 전생이 기억나지 않는 거야?”
“전생? 청연, 그게 무슨 소리냐?”
오청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내가 이야기해 준 신화, 무앙과 너의 이야기잖아.”
난향의 안색이 변했다.
“그것이 내 이야기였다고?”
“맞아. 신화는 바로 네 전생의 기록이야, 여와.”
“내가… 여와라는 여자란 말이냐?”
“당연하지.”
“황당한 소리를 하는군.”
“무앙이 네게 끝없이 돌아온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여와가 아니었다면 그가 왜 그랬겠어?”
“…네 말이 맞다고 쳐. 그런데 너는 누구이기에 나의 전생이 여와라는 걸 아는 거냐?”
오청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걸 알겠어? 나는 너의 가장 친한 벗인데.”
“우리가 친구라고?”
“그래, 여와. 나, 선계의 계주 선고야.”
그 순간,
우르르르르르-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며 기괴한 울림이 낙양성을 뒤덮었다.
놀란 난향과 오청연이 번개같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들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새벽의 여명이 낙양성의 동쪽 하늘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성의 하늘을 가렸던 검은 구름과 도시에 늪처럼 고였던 회색 안개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장막처럼 성으로 다가서던 혼돈마벽도 사라졌다.
푸스스스스스-
방어군을 공격하던 마인과 마물들이 한 줌 먼지가 되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오청연이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불멸마신을 죽이고 회랑을 닫았어…….”
난향이 물었다.
“무앙이 이긴 거야?”
“응.”
“우와아아아아아아!”
“이겼다!”
“만세!”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긴 싸움이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난향이 오청연에게 말했다.
“이번엔 네가 알고 있는 내 이야기를 해주겠어?”
오청연이 활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물론. 이제 시간은 충분하니까.”
* * *
제국의 황도.
간신히 골조만 남은 전각의 꼭대기에 걸터앉은 진무앙은 주위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아주 폐허가 됐네.”
그의 옆,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독고운진이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지가 저래 놓고는… 누가 들으면 남이 한 짓인 줄 알겠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네가 잘못 들었겠지.”
진무앙은 더 구박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런 경우는 절대 흔하지 않은 터라 독고운진은 은근히 그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많이 지친 거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다.”
“그래도 낙양엔 가봐야 할 건데…….”
“갈 거야, 좀 쉬었다가.”
“회랑이 사라졌으니 그쪽도 안전해지긴 했겠지만 빨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널 걱정하고 있을 거야.”
“알아.”
독고운진이 물었다.
“아까, 어떻게 한 거야? 묵령하고 금령이 보였었는데?”
“본 그대로야.”
“걔들이 정말 불멸마신의 마력, 흑암광마진혼에서 오마병의 기운을 뽑아낸 거야?”
“응.”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천무령의 기운 정도에 뚫릴 흑암광마진혼이 아니잖아.”
“궁금한 것도 많은 돼지네.”
“호기심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제정신으로 살아올 수 있었겠어?”
피식 웃은 진무앙이 대답했다.
“칠마병은 불멸마신이 만든 게 아니야. 성혈마가에서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거지.”
“그게 왜?”
“오마병의 기운은 흑암광마진혼과 하나가 될 수 없어. 그들은 지존수라혈기에만 이끌릴 뿐 다른 마기는 배척하거든.”
“불멸마신의 내부에 들어가긴 했지만 물과 기름처럼 흑암광마진혼에 흡수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었다는 말이야?”
“맞아. 나도 묵령과 금령을 받아들인 상태라 그걸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둘을 보내 오마병의 기운을 뽑아낸 거다?”
“오마병의 기운도 흑암광마진혼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거든. 그들의 탄생 목적은 성녀를 보호하는 거지, 회랑을 여는 게 아니니까.”
“그럼 이제 넌 칠마병을 전부 품게 된 거냐?”
“뭐, 그런 거지.”
“그대로 계속 걔들을 품고 있을 거야?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걔들은 암혼하고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면서?”
“품고 있어도 돼.”
“어째서?”
“걔들을 강제로 뽑아내면 나한테도 문제가 생기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확신할 수 있는 거야?”
“걔들을 강제로 뽑을 수 있는 존재는 성녀뿐이야. 그런데 그녀는 내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어. 소소가 성녀니까. 그러니까 그냥 둬도 돼.”
입을 다문 진무앙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독고운진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그윽해서(?) 독고운진은 움찔하며 물었다.
“보는 사람 불안하게 그 눈빛 뭐냐?”
“일 하나만 해줘.”
그게 무엇인지 듣기도 전에 독고운진은 고개부터 저었다.
“싫다. 불멸마신도 소멸했으니 이제부터는 나도 열심히 놀 거다.”
진무앙이 덤덤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걸로 보이냐?”
“…부탁 아니었어?”
“네가 계속 안 한다고 고집부리면 먼저 네 껍질을 벗길 거다.”
독고운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부탁이 아니고 협박이었던 거야?”
“그래.”
“…뭔데?”
“영원의 계곡을 조사해 줘.”
독고운진의 가뜩이나 커다란 눈이 쟁반만 해졌다.
“거긴 왜?”
“불멸마신이 죽기 전에 한 말이 좀 마음에 걸려서.”
“뭐라고 했는데?”
“나를 배신했던 삼계의 배후에 ‘혼돈’이 있는 것 같다고 했거든.”
“혼돈? 사계의 창조자?”
“응.”
“정말 그 자식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귀찮으니까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독고운진이 얼굴이 진지해졌다.
“알았어. 조사해 볼게. 그런데 만약 삼계가 배신한 일의 배후에 정말로 ‘혼돈’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목을 꺾어버려야지.”
독고운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답이 뻔한 걸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가 물었다.
“마계는 안 가볼 거야? 소소를 위해서도 가사상태인 신녀를 깨워야 할 텐데… 이제는 암혼이 완전해져서 언제든 다녀올 수 있잖아?”
“내가 가면 신녀를 당장 깨울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군.”
“아니야?”
“그녀는 이곳에서 불멸마신에게 심혼진마기를 빼앗겼어. 그것이 다시 모일 때까지는 못 깨어나. 그건 내가 마계로 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십마수는 어쩔 건데? 걔들을 살리려면 마계로 가야 하잖아? 나머지는 그대로 둔다 쳐도 가흔은 되살려야지.”
“나중에.”
“그녀가 네게 칼을 겨눈 건 널 증오해서가 아니란 걸 알잖아.”
“알아. 하지만 행동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
“매정한 놈.”
“너의 그런 평가는 너무 식상해. 다른 걸로 바꿔.”
“치사하고 뒤끝 긴 놈.”
“음, 그 욕은 좀 신선하군.”
“사서 욕먹기를 좋아하는 변태.”
“죽을래?”
휘리리릭-
독고운진이 번개처럼 날아오르며 소리쳤다.
“난 영원의 계곡으로 가볼게. 무앙, 나중에 보자!”
진무앙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나도 슬슬 가볼까.”
그의 시선이 남쪽을 향했다.
낙양이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