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406
406 들키지나 말든지
일 년 후, 낙양 수향루.
소소와 몽지림이 난향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장죽을 물고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난향이 그녀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소가 배꼽 앞에 손을 모으고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큰 어머니, 편히 주무셨어요? 소소가 아침 문안드려요.”
“잘 잤다. 너는?”
“저도요, 헤헤.”
소소의 밝은 웃음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아이와 함께 의자에 앉은 몽지림이 말했다.
“언니, 애도 있는데 연초 좀 꺼요.”
난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가라는 보타암에는 가지 않고 여기 눌러앉은 이유가 날 구박하기 위해서인 거냐?”
“하아… 부창부수라더니, 언니 말투가 딱 그 사람이네요.”
“그래서 불만이 있다는 거야?”
“네.”
“네 말투에 대한 불만은 안 받아. 그건 그렇고, 이른 아침부터 왜 온 거야?”
“채은이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드리려고요.”
“걔는 자기 집안과 무앙의 악연을 다 들었어. 그러고 나서 그를 보는 게 너무 힘들다며 떠난 애를 왜 우리가 찾아?”
“무앙이 걔 가문의 원수인 건 맞아요. 하지만 걔도 무앙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사정을 이해하고 있어요. 천무제를 죽이지 않았다면 무림이 멸망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현덕제와 신무제가 무앙의 손에 죽은 것도 아니고요.”
“무앙에 대한 사랑과 증오라는 상반된 감정 때문에 채은이의 인생이 망가지는 게 안쓰러워서 그래?”
“예.”
“네가 불가의 이치를 신봉하는 애라는 건 알지만, 어긋난 인연을 억지로 이으려 하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야.”
“언니, 무앙을 생각해서라도 채은에 대해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해 줘요.”
“무앙을 위해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채은이가 천하를 떠돌다가 머리라도 깎고 절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무앙이 힘들어할 거예요.”
난향이 코웃음을 쳤다.
“흥! 너는 그 인간을 아직도 잘 모르는구나.”
“예?”
“그는 채은이가 여중이 된다고 힘들어할 인간이 아니야.”
“저는 언니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매정한 남자가 아니에요.”
“확신해?”
“물론이에요. 그는 이지가 사라진 저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킨 남자니까요.”
“그건 네가 여전히 예전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야.”
“그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언니인데, 어쩜 그렇게 냉정하세요.”
“그 인간을 너무 잘 아니까.”
그때, 밖에서 동기 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주님, 삼정의 맹주님들께서 도착하셨어요.”
“들어오라고 해라.”
문이 열리며 반우 진인과 공야승추, 경신희가 들어왔다.
난향도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세 사람에게 말했다.
“무앙은 만나셨어요?”
반우 진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 별채에서 뒹굴고 계시더군요.”
“하실 말씀들이 많았을 텐데, 너무 일찍 끝난 거 아닌가요?”
지금은 아침 식사 시간이 막 지난 시각이었다.
“머리가 아프시다며 문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상의할 게 있으면 이 낭랑을 찾지, 왜 자기를 찾아왔냐고 역정을 내시더군요.”
난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인간이! 자기가 벌려놓은 일을 왜 나한테 미뤄!”
경신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 우리는 괜찮으니까 화낼 필요 없어. 그분이 저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천하를 세 개로 쪼개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게 말이 돼?”
검푸른 빛을 발하는 거대한 유성에 의해 황도가 지도상에서 지워지던 날, 그곳에 머물던 황제와 제국의 고위 관료 구 할이 몰살당했다.
세상엔 그렇게 알려졌다.
당연히 제국은 멸망했다.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천하는 군웅할거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곳곳에서 소규모의 국지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무림맹과 사해집마부, 일월단심맹이라는 초거대 세력들이 천하를 삼분하며 대전쟁의 싹을 잘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천하삼정은 지금까지와 달리 무림세력을 벗어나 각기 하나의 국가로 진화하는 중이었다.
세력이 셋이니 천하도 셋으로 나뉘었다.
삼정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진 무림맹은 제국의 십칠 개 성 중 동남부 십 개 성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월단심맹은 서부 삼 개 성을, 사해집마부는 남부 사 개 성을 장악하고 나라를 세웠다.
아무도 불만은 없었다.
천하 삼분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진무앙의 뜻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운남성을 비롯한 변방의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국을 선포했지만 전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을 벌이기 위해선 진무앙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는 걸.
그리고 그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이는 자는 승패와 상관없이 멸망할 거라는 것도.
난향이 공야승추에게 물었다.
“증손을 보았다면서?”
공야승추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날 닮은 아주 건강한 증손녀요.”
“무룡이 효도했네. 하지만 손녀가 맹주를 닮으면 안 되는데.”
경신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언니, 걱정 말아요. 그 아이는 저 사람이 아니라 날 닮았으니까.”
난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룡과 완아라면 잘 키우겠지.”
그때까지 가만있던 소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야 할아버지, 저도 언젠가 아기를 볼 수 있을까요?”
공야승추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작은 소저, 그분의 허락을 받으실 수만 있다면 이번에 내려갈 때 저와 함께 가시지요.”
경신희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작은 소저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십만대산엘 왜 가요?”
그러고는 소소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작은 소저, 한 달 뒤에 룡아와 완아가 아기와 함께 감숙에 있는 우리 집에 와요. 그러니 고월애로 오시면 아기를 볼 수 있어요.”
“정말요?”
소소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럼요.”
경신희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공야승추와 경신희가 소소를 대하는 태도는 정중했고, 말도 존칭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소소가 진무앙의 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소소의 부탁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소는 천하를 막후에서 조종하는 진정한 지배자(?)였다.
* * *
난향의 집무실에서 이야기꽃이 피고 있을 때, 낙양 서부대로의 끝에 자리잡은 작은 장원의 밀실.
땀에 흠뻑 젖은 진무앙이 전라의 주설란을 품에 안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삼정이 별채로 그를 찾아온 직후 수향루를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이다.
주설란과 몰래 만나기 위해.
주설란이 그의 가슴을 간질이며 물었다.
“무앙, 굳이 수향루 놔두고 왜 여기까지 와?”
회랑이 사라지고 천하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 전대 천상십화뿐만 아니라 주설란과 사마휘, 당휘경 등 당대 천상십화도 수향루에 모여 살게 되었다.
물론 그녀들이 원치 않을 때는 언제든 떠날 수 있었고.
진무앙이 침울한 얼굴로 반문했다.
“몰라서 묻냐? 거기서는 널 안지 못해. 난향이 정한 순서대로라면 오늘은 네가 아니라 유코와 자는 날이야.”
난향은 진무앙이 여자들과 동침할 순서를 정했다. 분란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면서.
진무앙이 바깥으로 돌지 못하게 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공동생활(?)이었다.
그 후로 진무앙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설란이 그에게 물었다.
“무앙, 큰 언니가 그렇게 무서워?”
“후우… 넌 내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내 기분을 말해도 절대 이해하지 못해.”
“그렇긴 하지만 당신이 큰 언니를 무서워하는 건 아무리 봐도 지나친 감이 있어.”
천장을 보는 진무앙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그가 중얼거렸다.
“설란, 네 말이 맞아. 언제까지 이렇게 난향의 눈치나 보며 살 수는 없어.”
주설란의 눈이 고양이처럼 반짝였다.
“무앙, 우리 수향루를 나와서 독립할까?”
진무앙이 주설란을 처연한 눈으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그랬다가 난향한테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려고.”
“설마 당신이 있는데 언니가 집을 뒤집어엎기라도 하겠어?”
“그러고도 남는다, 난향은.”
주설란의 얼굴도 침울해졌다.
“그럼 어떻게 해?”
“내가 생각을 좀 해볼게.”
“알았어. 현명한 방법을 좀 찾아봐.”
“그럴게.”
진무앙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주설란의 입에서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흥…….”
방안의 공기가 다시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 * *
그날 밤, 수향루 난향의 거처.
난향은 오청연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잔을 비운 난향이 오청연에게 말했다.
“그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빈 난향의 잔에 술을 따르며 오청연이 물었다.
“왜? 무앙이 또 사고 쳤어?”
“오늘도 몰래 나가서 설란을 안았어.”
오청연이 혀를 찼다.
“들키지나 말든지.”
“다리에 족쇄를 채울까? 아니면 정조대를 입힐까?”
“너무 과한 행동은 하지 마. 그러다 무앙이 진짜 화를 내면 어쩌려고.”
“하아…….”
난향이 한숨을 쉬며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녀가 오청연에게 물었다.
“선고, 나는 아직 여와 시절의 기억이 나지 않아.”
“조급해하지 마. 전생이 그처럼 쉽게 떠오를 리가 없잖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선고는 내가 여와이던 때의 무앙도 알지?”
“물론이야.”
“그때 그는 어떤 남자였어?”
난향의 질문을 받은 오청연의 얼굴에 난감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궁금해서. 너는 그가 나의 환생을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며 천하를 떠돌았다고 했어.”
“그랬지.”
“너의 말을 듣고 난 후에 난 그의 난봉질이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는 기억을 모두 되찾은 후에도 기질이 전혀 변하지 않았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잠시 말이 없던 오청연이 탄식하며 말문을 열었다.
“난향, 사실은…….”
“사실은?”
“그는 여와를 사랑할 때도 난봉꾼이었어. 사계에서 아름답다고 알려진 여자 중 그의 마수를 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정도야. 그래서 별명도 사계의 탐화랑이었지.”
난향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그랬군. 내가 이 인간을!”
오청연은 벌떡 일어서는 난향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의 난봉질을 막으려면 현명하게 행동해야 해. 막무가내로 조져서는 그를 바꿀 수 없어.”
“선고,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아직은 없어. 하지만 같이 궁리하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좋아. 우리 같이 찾아보자.”
두 여인은 이마를 맞대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별채, 진무앙의 방.
푸드득- 푸드득-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창문으로 자색의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신조 자운이었다.
침상 머리맡에 내려앉은 자운이 말했다.
큰 대 자로 뻗어 있던 진무앙이 눈을 떴다.
“일 년 만이네. 왜 왔냐, 새새끼야.”
[보자마자 욕이냐?]“난 반가울 때 욕을 하는 남자야.”
[흥! 돼지가 전하라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는데 그냥 가야겠다.]푸드득-
자운이 날갯짓을 하자 번개같이 일어난 진무앙이 녀석의 목을 와락 움켜쥐었다.
[켁켁켁! 무슨 짓이냐, 극악대마왕!]“정보가 뭔데? 말하면 목을 풀어주지.”
[켁켁, 풀어줘야 말을 하지!]진무앙은 피식 웃으며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자운을 들어 허벅지에 앉혔다.
“말해봐. 돼지가 전하라는 중요한 정보라는 게 뭔데?”
[돼지 말을 그대로 전할 테니까 잘 들어. ‘무앙, 혼돈은 영원의 계곡에 없다. 개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곳으로 튄 거 같다’.]진무앙의 안색이 변했다.
“혼돈이 튀었다고?”
[계속 들어. ‘홍련이와 함께 흔적을 쫓고 있는데 아무래도 일이 좀 꼬인 것 같다. 자운에게 이야기를 듣는 대로 즉시 이곳으로 네가 와야 할 것 같다’. 끝.]자운이 깜짝 놀랄 정도로 벌떡 일어난 진무앙은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바로 이거야. 난향과 소소, 그리고 사랑하는 너희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어.”
푸드득-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자운이 물었다.
[어쩌려고?]“뭘 어째, 임마. 혼돈을 쫓아야지.”
[지금 당장 떠나려고? 난향 소저한테 말은 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난향한테 입만 벙긋 해봐라. 진짜 널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테니.”
[히잉…….]“가자.”
바람처럼 옷을 입고 암월도를 든 그는 한 줄기 번개가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다음 날 아침.
수향루가 발칵 뒤집혔다.
밤새 진무앙이 사라진 것이다.
별채의 정원에 강석초와 모든 여인을 모은 난향이 비명처럼 악을 썼다.
“당장 그 인간 잡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