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42
042 속곳은 입었겠지?
채경옥의 방 천장 위.
진무앙은 팔베개하고 누워 있었다.
채경옥이 준 요상약을 먹고 내상을 다스리겠다는 핑계를 대고 올라온 참이었다.
채경옥은 방에서 자수를 놓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고.
‘채경옥의 말대로라면… 아영이 연공실에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건 나 때문이라는 건데… 젠장… 후우…….’
진무앙은 흐트러진 눈으로 허공을 보며 입 밖으로 나오려는 욕설과 한숨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는 채경옥이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여파가 지금까지도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가르쳐 주지 말 걸…….’
그의 눈앞에 단리영의 열정 가득했던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그녀는 옛것에 깊은 관심이 있는 여자였다.
그중에서도 이제는 사라져 쓰이지 않는 고대의 언어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당시 그녀에게 홀딱 반해 있었던 진무앙은 재미 삼아 그녀에게 천축 범어의 원형이 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대어를 가르쳐 주었다.
신기하게도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는 그 고대어를 지금의 언어처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다.
‘전부 가르쳐 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으면 이삼 년은 그녀의 옆에 더 붙잡혀 있었어야 했…… 제기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채경옥이 단리영에 대해 진무앙에게 해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십몇 년 전, 가주인 사마천웅은 지인으로부터 고대어가 기록된 점토판 하나를 선물받았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장보실에 보관했고, 문제의 그날이 올 때까지 잊고 지냈다.
그는 점토판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년 반 전의 어느 날, 사마천웅은 사마무광과 단리영에게 장보실을 보여주었다.
아들 부부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물건을 선물할 생각으로.
채경옥도 그때 장보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단지, 장보실을 나온 단리영이 불과 며칠 후 광증을 보이다가 연공실에 감금되었다는 걸 알 뿐이었다.
소가주의 둘째 부인이 미쳤다는 건 대사건이었다.
엄청난 일이 벌어졌지만 그 일은 세가의 요인들만 아는 비밀로 유지되었다.
사마천웅이 함구령을 내린 것이다.
채경옥도 남편인 사마무광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입단속은 철저했다.
사마천웅과 사마무광 부자는 단리영의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하지만 그들은 단리영의 광증을 치료하는데 실패했다.
백약이 무효였고,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광증은 오히려 심해져 갔다.
그 상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하며 채경옥은 눈물을 떨궜다.
단리영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녀의 서글픈 사정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무광과 그녀와의 혼인은 어른들의 주도로 결정되었고, 부부가 된 후에도 그는 채경옥과 한 달에 한 번 이상 합방을 한 적이 없었다.
후계자를 얻으려는 목적 외의 애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무광과 단리영과의 혼인은 사정이 달랐다.
역시 정략결혼의 형태였지만, 어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채경옥과의 혼인과 달리, 그것은 사마무광의 요구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과의 혼인에 관심이 없었던 단리영 대신 그녀의 부친에게 막대한 대가를 약속하고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 후 채경옥을 찾는 사마무광의 발걸음은 더욱 뜸해졌고, 단리영이 연공실에 감금된 후에는 완전히 발길이 끊어졌다.
사마무광도 단리영과 함께 연공실에 들어갔고, 지금까지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채경옥은 이 년 반 동안 생과부로 살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사마무광에게 사랑을 받기는 한 것 같으니 다행이긴 한데… 아영, 그 미모에 그 마음씨면 잘살아야지, 지금 꼴이 뭐냐. 연공실 감금이라니. 말이 되냐… 염병…….’
단리영은 몰락한 무림세가에서 자란 여자답지 않게 맺힌 데 없이 화통하고 유쾌했다.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작은 배려에 감동도 잘하고, 약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많고…….
물론 감숙제일미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외모는 두말이 필요 없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무앙은 푹 빠졌었고…….
진무앙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해석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고대어가 적힌 점토판이라… 설마 사마천웅이 얻은 게 환우지약(寰宇之籥)이었다는 말인가……?’
만약 무림인이 그가 속으로 중얼거린 말을 들었다면 당장 칼을 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비밀을 말하라고 협박하면서.
환우지약이라는 간단한 네 글자에 담긴 무게는 너무나 무거워, 그에 대한 비밀이 새어나간다면 천하는 대폭풍에 휘말릴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아무리 막대한 저력을 가진 창천사마세가라 해도 그 후폭풍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고.
물론 진무앙은 그런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보물이나 천하의 정세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무소유(?)의 낭인으로 살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의 마음은 온통 단리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사마천웅이나 세가의 원로들이 보였다는 반응을 생각하면 점토판이 환우지약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후우… 사마무광이 연공실에서 나오지 않을 걸 보면 아직 아영이 살아 있다는 건데… 어떻게 버틴 거지? 불완전한 해석으로 그걸 받아들였다면 보통 사람은 석 달을 버티기도 못하고 죽었을 텐데…….’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년 반이나 그걸 끌어안고 있었다면 살아 있다 해도 지금 아영의 상태는 정말 위험할 거야……. 인간들의 부질없는 탐욕에 착한 아영이 죽을 판이네. 내가 알게 된 이상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그는 천장 바닥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똑똑.
아래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내려와도 좋다는, 채경옥과 약속한 신호였다.
진무앙은 방으로 내려왔다.
자수를 들고 그를 보는 채경옥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진무앙이 그녀에게 말했다.
“소저, 내상이 거의 완치된 것 같소. 요상약의 효과가 아주 탁월하오.”
“다행입니다, 소협. 그런데 아직도 저에 대한 호칭이…….”
“소저라고 부르는 것이 부담스러우시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소저가 소가주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소. 계속 이렇게 부르는 걸 허락해 주실 수 없겠소?”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진무앙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채경옥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무앙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하시오.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소. 미안하오.”
“하아… 소협의 마음이 그렇다면야…….”
오가는 눈길, 열기가 담긴 숨결.
채경옥의 코가 찡긋거리며 콧김이 세졌다.
묘한 분위기.
이럴 때는 안아주는 것이 흐름의 정석이다.
채경옥이 유부녀가 아니었다면 진무앙은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원칙 때문에?
그럴 리가 있나.
유부녀에게 들이대지 않는다고 안지도 못할 그가 아니었다.
지금 그가 손을 내밀지 못하는 건 난향의 불을 토하는 듯한 눈과 금방이라도 얼음덩어리를 토해낼 것만 같은 그녀의 장심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난향…….’
진무앙은 손을 놓고 정중하게 그녀에게 포권을 했다.
“감사하오, 소저.”
채경옥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자존심이 있지, 몸이 달아올랐다고 그녀가 그를 먼저 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진무앙이 말했다.
“소저, 혹시 연공실까지 안내를 해줄 수 있으시오?”
“어려운 일은 아닌데… 어쩌시려고요? 그곳 세가의 정예 무인들과 비전의 진법, 삼엄한 기관장치들로 보호되고 있어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해요. 차라리 풍령부운전의 윗분들에게 보고하고 가주님의 협조를 얻으시는 것이…….”
진무앙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내가 특급 정보를 얻고, 그것을 전해줄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한 직후부터 나는 비마잠혈의 마졸들에게 추적당했소. 그리고 그들은 내가 접선자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 매복 중이었소.”
채경옥의 눈이 커졌다.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풍령부운전 내부의 누군가가 나에 대한 정보를 그들에게 흘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소?”
“내부에 사해집마부의 간자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래서 이 일에 대해 보고하고 상부의 지원을 받는 건 너무 위험하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알겠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옷을 갈아입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러지요.”
진무앙은 등을 돌렸다.
사라락. 사라락.
잠시 후 다시 몸을 돌린 그의 눈에 품이 넓은 치마를 입은 채경옥이 들어왔다.
볼을 붉힌 채경옥이 넓게 펼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물었다.
“갈까요?”
위로 올라간 치맛단 아래로 매끄러운 맨살이 보였다.
꿀꺽!
진무앙은 침을 삼켰다.
‘설마… 속곳은 입었겠지?’
* * *
노을이 지는 시각, 수향루.
벌컥!
작은 두드림도 없이 확 열리는 문으로 고개를 돌리는 강석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인간아! 소리 좀 내고 들어오면 어디 덧나냐고!”
진무앙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귀를 후비며 강석초의 앞에 앉았다.
강석초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낭랑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네. 출근 시간은 따박따박 지키는 걸 보니.”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너도 난향의 요지빙백신강에 한번 맞아봐. 그럼 내 심정 알 거다.”
“본루엔 안 가고 여긴 왜 왔냐?”
“진법과 기관을 잘 아는 놈들이 필요해. 아는 애들 있지?”
강석초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그런 친구들이 필요해?”
“사마세가의 직계 연공실에 들어가야 할 일이 생겼어.”
강석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딜… 들어가겠다고?”
“연공실.”
“미친놈. 못 본 새 변태까지 되었구나. 죽고 싶으면 그냥 자살을 해. 굳이 거기까지 들어가서 난자당해 죽으려 하지 말고.”
“죽지 않으려고 진법과 기관에 정통한 놈을 구해달라는 거잖아.”
“포기해. 지난 삼백 년 동안 침입에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는 장소가 사마세가의 직계 연공실이야. 거기엔 세가의 비전 무공과 보물들이 다 보관되어 있어. 그런 곳을 뚫을 능력이 있는 놈이 있겠냐고.”
“그래도 이건 포기할 수 없어.”
“고집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야.”
“무조건 들어가야 해.”
“왜?”
“아영이 그 안에 있다.”
“……뭐?”
진무앙은 강석초에게 아영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말해주었다.
물론 보물이 환우지약일지도 모른다는 부분은 말하지 않았다.
그건 강석초가 아닌 난향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위험이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게 환우지약이었으니까.
그의 얘기가 끝났을 때 강석초의 안색은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진무앙이 말했다.
“얼굴 풀어, 임마. 누가 보면 죽마고우라도 죽은 줄 알겠다.”
“농담이 나오냐?”
“그럼 죽상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냐?”
“에휴…….”
강석초가 한숨을 쉬며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무앙이 그에게 말했다.
“이대로 두면 아영은 죽어. 그걸 알면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냐.”
“그 점토판이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걸 가진 사람을 미쳐서 죽을 지경의 상태로 만드는 거냐? 귀신이라도 깃든 거야?”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라.”
“정말이냐?”
“내 말이 거짓말이면 손에 장을 지지마.”
“나를 속일 생각하지 마. 거짓말이면 정말 가만 안 있을 거다.”
“그때는 장을 지지라니까 그러네.”
강석초는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진무앙의 말에는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그는 장을 지지겠다고만 했지, 누구 손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되면 강석초는 장을 들고 그를 쫓아다니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까.
잠시 후 강석초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연공실을 둘러싸고 있는 진과 기관을 뚫을 정도의 전문가는 떠오르지 않아.”
“그걸로 끝이라면 너한테 정말 실망할 거다.”
“찾아는 볼게.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그리고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안 돼. 최대한 빨리 그곳에 들어가야 해. 시간이 갈수록 아영이 위험해진다고.”
“이게 재촉한다고 될 일이야? 네가 날 채근하면 없는 전문가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대?”
“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무조건 찾아.”
“이런 미친…….”
강석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진무앙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석초야, 난 너를 믿는다. 넌 능력 있는 남자잖아.”
그의 손을 확 잡아뗀 강석초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진무앙이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뭐냐?”
“이제 뇌리에 박힐 때도 되지 않았냐? 세상에 공짜는 없어.”
“야, 다른 사람도 아닌 아영의 일에 돈을 받겠다는 거냐?”
“제아무리 아영에 대한 거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공사는 구분해야지. 그거 혼동하기 시작하면 사업 망하는 거 순간이야.”
“염병… 나 빈털터리다.”
“그래? 그럼 지금까지의 얘기 못들은 걸로 할게.”
“수전노 같은 놈.”
“토채귀나 수전노나.”
진무앙은 암월도를 풀어 강석초에게 던졌다.
암월도를 받아 든 강석초가 말했다.
“이거 담보로 받는 것도 마지막이야.”
“잘 간직하고 있어. 흠집이라도 나면 죽을 줄 알아!”
그렇게 암월도는 또 담보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