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44
044 그냥 불래? 맞고 불래?
진무앙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럽시다.”
“당신은 내가 왜 송옥루 살인사건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자 소저는 희봉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것도 아주 많이.”
자양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미소 띤 아름다운 얼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진무앙이 흰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궁금한 게 내 생각입니까? 희봉을 죽인 살인범의 정체입니까? 어느 것을 원하느냐에 따라 내 대답이 크게 달라질 거라는 것 정도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자양화의 안색이 눈에 보일 정도로 굳어졌다.
“당신이 살인범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내가 왜 희봉의 살인범이 누군지 알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는 거죠?”
진무앙은 말없이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자양화에게 내밀었다.
어린아이의 손에도 맞지 않을 것 같은 아주 작고 오래된 은반지.
그것을 받아 든 자양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목에는 진무앙이 내민 것과 똑같은 모양의 은반지가 가느다란 목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은반지를 받아 든 자양화는 입을 다물고 한층 더 깊어진 눈으로 진무앙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기색이었다.
얼마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게 원하는 게 있겠죠?”
“물론입니다. 그게 아니면 내가 이 시간에 여기 와서 이런 대화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자양화가 말을 받았다.
“우리,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내가 원하던 게 그겁니다, 자 소저.”
진무앙의 뇌리에 주설란이 떠올랐다.
‘설란,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아영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어. 야수팔흉 좀 팔아야겠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런 정도의 일로 미안해하면 진무앙이 아니지.
자양화가 은반지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거, 어디서 얻었죠?”
“희봉의 시신을 조사하면서 얻었습니다. 그녀의 위 속에 들어 있더군요. 죽기 전에 삼킨 거 같습니다.”
자양화의 눈에 진한 어둠과 슬픔이 어렸다.
“하아… 그 아이가 아직도 이걸 보관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탄식하던 자양화가 진무앙에게 말했다.
“진 호위는 그 아이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풍령부운전에 소속된 정보 무인이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것이면 그 아이의 전부를 안다고 할 수 있죠. 이걸 챙길 생각을 어떻게 한 거죠?”
“내 눈썰미가 좀 괜찮은 편입니다. 이걸 발견했을 때 자 소저와 첫인사를 나누던 순간이 떠오르더군요. 자 소저도 비슷한 걸 목에 걸고 있었죠.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희봉이 급하게 삼켜서 숨길 정도였으니 하찮은 물건일 리도 없고요. 그래서 챙겼죠.”
“이 은반지들에 담긴 사연까지는 모르는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겠죠…….”
진무앙을 보는 자양화의 눈빛이 어둠에 잠긴 호수처럼 깊어졌다.
“누구죠? 그 아이를 죽인 놈이?”
“이야기하기 전에, 내 부탁을 들어줄 겁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진무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자는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자양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몸을 원하는 게 아닌가요?”
“그새 동료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내 말을 잊었군요.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지만 자 소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건 내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리영 때문에 다른 부탁을 할 수도 없었지만 그게 아니더라고 애초에 자양화와의 므흣한 하룻밤이 그의 선택지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곳은 수향루의 담장 안.
그가 자양화에게 들이댔다가는 난향이 어떻게 나올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진무앙도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남자였다.
자양화의 그린 듯 고운 눈썹이 꿈틀했다.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군요.”
“그래서 말했잖습니까, 상처 주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하면서도 진무앙은 속이 쓰렸다.
이런 절세미인과의 하룻밤을 시도도 못하고 포기해야 한다니.
그는 평생 지금처럼 억울한 거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럼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게 뭐죠?”
“갈승도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 소저가 그걸 끌어내 주십시오.”
자양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갈승도는 흙과 돌을 만질 줄 아는 자에 불과할 뿐, 무림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내가 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를 끌어내 주기를 원하는 건가요?”
“사마세가의 직계 연공실 내외부 구조입니다. 잠입하는데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자 소저도 잘 알 테니 갈승도의 입에서 그것들을 끌어내 주면 됩니다.”
자양화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물었다.
“사마세가의 직계 연공실? 진 호위, 제정신인가요?”
“물론입니다.”
“당신, 도둑이에요?”
“물론 아닙니다.”
“그럼 왜 그곳의 구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죠?”
진무앙은 싱긋 웃었다.
“우리, 너무 깊은 것까지 궁금해하지는 맙시다. 서로 원하는 걸 얻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자 소저의 정체와 은반지의 사연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자양화는 말없이 진무앙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갈승도가 사마세가의 연공실 내외부 구조를 어떻게 알고 있을 수가 있죠?”
“몇 년 전에 그가 그곳의 개보수 공사를 했습니다.”
“당신이 알고 싶은 건 연공실 외부의 진세와 내부의 기관장치 배치인 듯한데, 그가 개보수를 했다고 해서 그런 기밀까지 알 수는 없어요. 잘해야 전체적인 형태와 석실의 위치, 복도의 생김새 정도일 거예요.”
어떤 골 빈 놈이 미인은 멍청하다고 했던가.
진무앙이 만났던 미인 중에 멍청한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똑똑해서 문제였지.
그녀들처럼 자양화도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들을 만큼 영리한 여인이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이군요. 좋아요. 한 시진 전에 그가 나를 지목한 후 일층 손님 대기실에서 내 수락 여부를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바로 그를 부르도록 하지요.”
진무앙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나는 천장에 자리를 잡고 귀동냥을 하겠습니다.”
“직접 심문하지 않고요?”
“그랬다가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생길 겁니다. 갈승도 본인도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모르는 게 중요합니다. 자 소저가 잘할 거라고 믿습니다.”
“진 호위는 참 말을 쉽게 하는 분이네요. 알았어요.”
“믿습니다, 자 소저!”
한 시진 후.
진무앙은 그림자처럼 본루를 떠났다.
* * *
인시(寅時) 말(새벽 5시경)은 수향루의 영업이 끝나는 시간이다.
호위무사 대기실.
드르렁드르렁. 뚝.
코 고는 소리가 그침과 동시에 난향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석초, 일어나.”
눈을 번쩍 뜬 강석초가 번개처럼 일어나 앉았다.
그의 관자놀이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팔짱을 낀 난향이 그를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강석초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 이 낭랑, 여기는 왜……?”
“영업이 끝나자마자 무앙이 루를 떠났어. 그렇게 바쁘게 어디로 간 걸까? 석초는 알지?”
강석초는 결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 자식이 새벽 댓바람부터 어딜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과연 그럴까?”
난향은 강석초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밤새 무앙의 행동이 정말 수상했어.”
“뭐… 뭐가?”
“자정 가까이 되어서 뜬금없이 자양화를 만나더니 걔 방에서 한 시진이나 죽치고 있더라. 그사이 이 년 내내 한 번도 들인 적이 없던 갈승도가 또 걔 방에 들어갔고. 무앙은 영업이 끝나자마자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단 말이지. 이래도 수상하지 않아?”
“그… 그 자식이 엉뚱한 짓 하는 게 한두 번이야?”
난향은 강석초의 항의를 가볍게 묵살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네가 여기에서 무앙하고 뭔가를 쑥덕거렸단 말이지. 둘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강석초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별 얘기 안 했어. 나… 난 그냥 무앙한테 소소 마음에 상처 주는 말 좀 하지 말라고…….”
난향이 생긋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석초, 죽고 싶어? 저승 문턱을 빨리 넘고 싶으면 말만 해. 바로 목을 비틀어줄게. 내 솜씨 알지? 아픔도 느끼지 못할 거야. 목뼈 부러지는 거 느끼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거거든.”
“흐윽!”
질겁한 강석초가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 안으며 뒤로 허겁지겁 물러났다.
그러다가 간이 침상에 오금이 부딪친 그가 뒤로 나뒹굴었다.
우당탕! 쿠당탕!
난향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침상 뒤에 구겨져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여러 가지 한다, 진짜. 빨리 안 일어나!”
허둥지둥 일어나는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민 난향이 말했다.
“석초, 그냥 불래? 맞고 불래?”
강석초의 어깨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바닥을 보며 그가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불게…….”
강석초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난향 앞에서 입에 자물쇠 채우려고 해봐야 본전도 못 건진다는 것을.
일각 후 난향이 떠났다.
강석초는 벗어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근데 무앙이 왜 나한테 그런 일을 시킨 거지? 뜬금없이 태하에 배를 띄우라니. 그 인간, 대체 뭔 생각인 거야? 아우 씨……! 생각하니까 열받네. 내가 자기 노비야, 뭐야? 이번 일 끝나면 진짜 제대로 한번 들이받아 버려야겠다.”
그는 구시렁거리며 대기실을 나섰다.
* * *
창천사마세가 채경옥의 거처.
천장의 구석에 구멍이 나며 진무앙이 내려왔다.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일체의 소리를 죽인 은밀한 움직임.
그는 천천히 채경옥이 잠들어 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여름이라 그녀는 속이 비치는 나삼만을 입고 있었고, 허리 아래를 덮은 이불도 얇았다.
베개 위에 흐트러진 머리, 눈을 덮은 긴 속눈썹…….
가슴 가리개 위로 봉긋하게 솟은 가슴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할 만큼 뽀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꿀꺽…….
진무앙의 바지 앞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모든 남자가 아는 것처럼 사타구니에 달린 세 번째 다리(?)는 의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진무앙은 손톱으로 허벅지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유부녀에게는 절대 들이대지 않는다는, 그답지 않게 평생 어긴 적이 없는 원칙이 흔들릴 정도로 채경옥의 자태는 매혹적이었다.
꼬집는 건 효과가 없었다.
별수 없이 진무앙은 이럴 때 즉효인 한 사람을 소환했다.
‘난향… 난향… 난향… 난향…….’
부풀어 올랐던 바지의 앞섬이 구멍 뚫린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듯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진무앙은 채경옥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
“으음…….”
아기의 칭얼거림과도 같은 소리를 흘리던 채경옥의 긴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지만 곧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의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그녀의 귀로 따스한 정감이 어린 진무앙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소저, 접니다.”
채경옥의 얼굴이 불붙은 장작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창밖의 어둠을 힐끗 일별한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소협, 이 시간에 왜……?”
의문보다 묘한 기대가 잔뜩 어린 음성.
세상 어떤 여자가 남자가 침상에 접근한 의도를 모를 수가 있을까.
그것도 세상이 잠든 새벽이 아닌가.
진무앙은 이런 상황에서 여자를 실망시키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였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말했다.
“깨워서 미안하오. 하지만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저의 눈을 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채경옥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떠나신다고요?”
“연공실에 들어가는 일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남을 수 없소.”
“정말 연공실에 가실 생각인가요? 그곳은 안내를 받지 않은 사람은 살아서 나온 적이 없는 불귀처인데…….”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소.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소저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나오리다.”
“아…….”
그의 사정을 아는 터라 채경옥은 그를 잡지 못하고 긴 탄식을 토했다.
진무앙은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쥐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소저… 나는 가지만 내 마음은 이곳에 남겨두겠소.”
“소협…….”
진무앙은 채경옥의 손을 놓았다.
채경옥의 큰 눈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이별(?)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