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45
045 배움에도 때가 있다더니
연공실은 사마세가의 내원 뒤편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인공 야산 내에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넓은 정원과 커다란 연못을 지나야 했다.
성을 둘러싼 해자처럼 야산은 연못 중앙에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지붕 위.
진무앙은 야산과 주변을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원은 사마세가의 내부인이라 해도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들어설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갈승도의 말대로라면 이곳에 설치된 건 칠성수연진(七星水淵陣)과 오로단혼관(五路斷魂關)인 거 같은데…….’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중요한 곳이라도 그렇지, 너무 지독하잖아. 침입자를 막겠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저런 걸 설치하면 안에 있는 사람도 나오지 못한다고.’
칠성수연진은 정원의 나무와 바위, 그리고 연못에 심어진 연꽃과 곳곳에 은신한 무인들로 이루어진 진법이었다.
이것은 생로를 알지 못하고 들어서면 갖가지 환상에 시달리다가 은신한 무인들의 검에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목이 잘리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오로단혼관은 중심지를 다섯 갈래의 미로와 중첩된 기관들이 보호하는 무림의 독특한 건축 기법 중 하나로, 위험하기로 따지면 칠성수연진보다 더했다.
기관을 정지시키지 않은 채 움직이면 다섯 걸음을 걷기 전에 숨이 끊어진다고 알려질 정도로 무서운 기관 건축이었으니까.
‘들어갈 때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나올 때가 문제란 말이야……. 나 혼자는 괜찮지만, 아영과 함께라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저곳을 벗어나기 어려워……. 젠장… 그놈만 옆에 있었어도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데…….’
진무앙의 뇌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법과 기관이라면 천하에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놈.
하지만 실력이 뒷받침된 거라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던 바로 그놈.
그렇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차치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놈을 아쉬워해 봤자 답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놈은 자신의 옆에 있다고 해도 도우려 하지 않을 터였다.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강석초에게 사람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그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진무앙은 고개를 휘휘 저어 미련을 털어버렸다.
암향무영과 사신암행으로 기척을 죽이고 주변과 동화된 그는 도마뱀처럼 손끝과 발끝으로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스르르.
그의 신형이 한 마리 도마뱀처럼 정원의 나무와 바위 사이를 바람처럼 미끄러졌다.
그가 펼친 건 암룡둔행(暗龍遁行)이라는 잠입 이동에 특화된 경공술이었다.
그가 익힌 다양한 무공 중 얼굴도 가물가물한 친구에게 배운 것은 잠입과 암살에 특화된 체계를 갖고 있었다.
진무앙은 그것을 가장 즐겨 쓰고 당연히 성취도 또한 높았다.
그것의 이름은 암왕사신류(暗王死神流).
암왕사신류는 크게 무영경 이십사절이라는 잠입술과 혈우팔법이라는 암살기법으로 나누어졌다.
진무앙이 지금 펼치는 세 가지 기법은 무영경 이십사절에 속한 것들이었다.
스슷!
진무앙이 막 지나간 자리에 흑의 무복을 걸친 무사가 나타나 번개처럼 주변을 수색하더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바위 뒤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와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은신해 있던 진무앙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은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들킬 뻔했다.
‘배움에도 때가 있다더니…… 그놈이 진과 기관에 대해 설명할 때 좀 더 귀담아들어 둘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고 어떤 놈이 그랬더라…….
진무앙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계속 전진했다.
정원을 지나자 연못이 앞을 가로막았다.
중앙의 야산까지 거리는 삼십 장.
일 장 간격으로 놓인 바위로 만들어진 징검다리가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그곳에 발을 디뎠다간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잘 다진 어육으로 변할 것이다.
진무앙의 신형이 흐느적거리며 물방울 하나 튀기지 않고 연못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무영경 이십사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환경을 염두에 두고 창안된 절기였다.
당연히 그 안에는 물과 관련된 기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은형수룡(隱形水龍)이라는 기법으로 일정 시간 동안 피부 호흡은 물론이고, 물속에서도 육지에서와 같은 움직임이 가능했다.
진무앙은 연꽃이든 돌이든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고 삼십 장을 지났다.
한 가닥 연기처럼 야산에 오른 그는 어둠 속에 은신하고 주변을 살폈다.
내공을 끌어올려도 들릴까 말까 할 만큼 길고 가는 숨결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곳을 지키는 자들은 모두가 일류 이상의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호흡이었다.
야산의 중앙, 연공실로 통하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설령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해도 진무앙은 그곳으로 들어갈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불청객 주제에 정문 출입이라니.
너무 주인을 무시하는 행동이 아닌가 말이다.
‘오로단혼관의 기관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생로의 벽을 뚫어야 하는데… 여기쯤이겠지?’
호위무사들을 피해 움직이던 진무앙이 바위틈 사이에 몸을 밀착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갈승도 말로는 벽의 재질은 흑철석, 두께는 한 자 정도라고 했는데… 혈조 두 줄 정도면 되려나…….’
사용한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혈조 한 줄의 길이도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진무앙은 양손을 활짝 폈다.
잠시 후 양손 검지 손톱 전체에 신비로운 붉은빛이 은은하게 어렸다.
그러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두 손톱의 길이가 한 자에 조금 못 미칠 정도로 길어졌다.
그는 두 개의 손톱을 빠르게 교차했다.
다음 순간, 왼손 검지 손톱은 본래의 평범한 모습을 되찾았고, 동시에 오른손 검지 손톱의 길이는 두 자 가까운 길이로 늘어났다.
두 개의 손톱이 합쳐진 것이다.
진무앙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배워두면 다 쓸모가 있다니까.’
그가 장난감처럼 다루는 기물(奇物)은 환상혈조(幻想血爪)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진무앙이 혈조라 줄여 말하는 이 기물은 하나가 머리카락 한 올의 백분지 일도 안될 만큼 얇고, 길이는 손톱 하나만 하다.
그런 것이 총 이백오십 개였고, 진무앙의 열 개 손톱 위에는 각 이십오 개씩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십오 개의 뭉치를 한 줄이라 불렀는데, 너무 얇아서 손톱 위에 부착되어 있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혈조는 방금처럼 소유자의 내공이 깃들면 은은한 홍광이 감돈다.
그리고 하나씩 사용할 수도, 전부를 이어서 채찍이나 연검처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형태나 사용법이 상궤를 벗어날 만큼 신비롭기도 하지만, 혈조의 진정한 가치는 예리함에 있었다.
혈조는 평소 상태로도 한철을 종잇장처럼 갈라 버릴 만큼 예리하지만, 주입되는 내력에 비례해서 그 날카로움이 무한대로 증폭된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혈조는 몸에 부착된 상태에서만 제 위력을 발휘했다. 손을 떠나면 형태와 예리함 모두를 잃었다.
즉, 암기술이나 이기어검술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혈조를 진무앙에게 전한 친구는 내공이 조화지경에 이르면 그런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긴 했다.
하지만 무림사를 통틀어 한두 명이 올랐을까 말까 하다는 조화지경이 옆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스으으-
환상혈조가 소리 없이 야산의 벽을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가로세로 두 자 길이, 네모의 형태로 벽을 자른 진무앙은 벽에 손을 대고 흡자결을 운용했다.
손을 당기자 잘린 흑철석 벽이 깃털처럼 가볍게 딸려 나왔다.
구멍을 통해 야산 안으로 들어간 진무앙은 다시 흡자결로 흑철석 벽을 당겨 구멍이 났던 벽을 본래대로 메웠다.
일체의 군더더기도 소음도 없는 매끄러운 움직임.
진무앙은 천천히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가 발을 디딘 길은 높이 아홉 자, 폭 넉 자가량 되었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 꽉 막힐 만큼 좁은 길.
이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했다.
기관도 위험했지만, 그것이 발동되면 동시에 경보용 종이 울리게 되어 있는 게 오로단혼관이었다.
종이 울리면 어떻게 될지야 불을 보듯 뻔했다.
창천사마세가의 전 무인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그는 그들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제대로 벌여야 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수향루 호위무사 생활도 끝장이 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건 진무앙이 꿈에서도 원치 않는 결과였다.
그는 공력을 끌어올려 와룡천망(臥龍天網)을 펼쳤다.
전신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기의 그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와룡천망 또한 무영경 이십사절 중의 하나로 기막을 넓게 펼쳐 주변에 은신해 있는 추적자나 장애물을 찾아내는 기법이었다.
뒤꿈치를 세운 그는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고양이가 담장 위를 걷는 듯한 그 운신법은 묘행보(猫行步)라는 보법으로 역시 무영경 이십사절에 속한 것이었다.
앞으로 걷다 옆으로 한 발, 다시 뒤로 두 걸음, 허리를 비틀었다가 폴짝 뛰고, 바닥에 눕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공중제비…….
누가 보면 혼자 무언의 경극이라도 펼치는 걸로 오해하기 딱 좋은 몸짓.
열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는데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바닥은 기관의 발동 장치 천지였고, 허공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잠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벽과 천장에서는 호시탐탐 독연과 화살이 튀어나올 준비를 한 채 숨어 있었고.
그 모든 걸 건드리지 않고 지나치려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염병! 내가 용병질을 왜 그만두었는데. 이런 상황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아서였단 말이다. 아영만 구해내면… 내가 다시 이런 일을 하면 성을 간다!’
구시렁구시렁, 투덜투덜.
그러는 동안에도 목적지는 가까워져 갔다.
어느 순간, 진무앙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전방에서 온몸에 절로 소름이 쫙 돋게 만드는 음산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밀려들고 있었다.
‘마기? 삼신기가 아니라 칠마병의 환우지약이었던 건가? 그나저나 마기가 이렇게 강하다니……. 설마 아영이 환우지약의 마령에 벌써 잡아먹힌 건 아니겠지?’
막다른 골목.
진무앙은 앞을 막은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에는 ‘연무관’이라는 세 글자가 금빛으로 쓰여 있었다.
‘채경옥은 분명 사마무광도 연공실에 머물고 있다고 했는데, 보이지가 않아. 이 안에 아영과 같이 있는 건가?’
진무앙은 공력을 끌어올렸다.
와룡천망의 기운이 강해졌다. 하지만 기막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진무앙의 눈빛이 강해졌다.
‘돈이 썩어나는 집안답네. 기를 차단하는 특수한 약물로 안쪽 전체를 도배해 놨어.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더 비싼 물건인데.’
이러면 문을 열기 전에는 안에 누가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진무앙은 서두르지 않았다.
일이 없을 때는 백수한량이 부러워할 정도로 뒹굴뒹굴하지만, 일단 어떤 임무에 임하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 정도로 신중해지는 사람이 그였다.
천천히 문의 경계를 살피던 그의 오른손 검지에 홍광이 어리며 환상혈조가 반 자 길이로 일어났다.
진무앙은 혈조로 벽의 손잡이 부근 벽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아래로 내리그었다.
톡!
들릴 듯 말 듯 무언가가 끊어지는 작은 소리가 났다.
문이 강제로 열렸을 때 경보종을 울리게 하는 연결 장치가 끊어진 것이다.
이어서 잠금장치까지 잘라 버린 진무앙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문을 옆으로 밀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쾨쾨한 공기가 확 쏟아져 나왔다.
문이 절반가량 열렸을 때,
쐐애액-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가닥의 무시무시한 살기가 진무앙의 미간으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