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61
061 조금만 기다려
우물우물…….
연백지는 건량을 아무렇게나 북북 찢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평범을 넘어선 거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다.
미인은 뭘 해도 예쁘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라 불리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함정이 있다.
미인이 무림인일 경우, 외모만 보고 그녀의 성격까지 아름다울 거라고 착각하면 큰일난다.
지금처럼.
협곡의 입구에 이십여 명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채주님, 간만에 사람을 썰었더니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습니다요. 크크크.”
“계집이 너무 부족했지 말입니다. 남자가 스물한 명인데 계집이라곤 단 셋뿐이었지 말입니다. 형님들이 재미 볼 때 저는 손가락만 빨았지 말입니다. 헤헤.”
투박한 옷차림에 아직도 핏방울이 떨어지는 박도와 창, 장검 등등 다양한 병장기를 든 사내들이었다.
협곡으로 들어서려던 그들은 동시에 연백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수만 명이 모여 있는 곳에 숨어 있어도 눈에 띄는 절세미인이었다.
그러니 장님이 아닌 한 그녀를 못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내들의 눈이 커지고 입에 헤 벌어졌다.
그들 중 한 사내가 침을 질질 흘리며 중얼거렸다.
“백마다, 백마…….”
그 말을 들은 듯 연백지의 붉은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리며 위로 솟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중얼거린 사내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그가 히죽 웃었다.
“똑바로 보니까 더 예쁜 계집이네.”
중앙에 선 건장한 사내가 들고 있던 대두도로 바닥을 찍으며 소리쳤다.
쿵!
“닥쳐. 네놈이 지금 내 여자에게 침을 흘리는 거냐!”
화가 난 듯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구레나룻이 철사처럼 뻣뻣해졌다.
박도 사내의 얼굴이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아닙니다요, 채주님. 제가 감히 어떻게…….”
사내들은 녹림칠십이채에 속한 태행산채의 산적들이었다.
아침 일찍 산채를 나선 그들은 산을 넘던 행상 한 무리를 탈탈 턴 후 산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특이한 외모의 절세미녀를 우연히 만나는 횡재(?)를 했고.
연백지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웃는 건지, 어이없어하는 건지 애매모호한 표정.
“잡것들이 귀엽지도 않게들 놀고 있네.”
그녀의 중얼거림에 채주라 불린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계집, 방금 그 말 우리한테 한 거냐?”
“꼴에 그래도 귓구멍은 뚫렸군.”
여기저기서 어처구니없어하는 사내들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헐…….”
“미친년이었던 거냐?”
“정신줄 놨네.”
“어째 눈동자가 시뻘건 게 정상은 아닌 것 같더니…….”
“나이도 얼마 안 먹은 년이 안됐네.”
생긴 것만으로 연백지의 나이는 최대치로 쳐도 이십대 중후반 이상으로는 보기 어려웠다.
연백지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품이 넓은 장포로도 가려지지 않는 육감적인 몸매에서 관능미가 꿀처럼 흘렀다.
꿀꺽!
꿀떡!
츄릅!
그녀의 늘씬하고 관능미 넘치는 전신을 본 이십여 명의 사내가 거의 동시에 침을 삼켜댔다.
연백지의 시선이 채주라 불린 사내를 향했다.
“야.”
채주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
“그래, 너.”
채주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계집,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구나.”
“시끄럽고. 지금 녹림맹 총표파자가 누구야?”
연백지의 말을 들은 채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계집, 무림인이었냐?”
“너, 바보냐?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내가 일반 여염집의 처자라고 생각했어?”
채주와 다른 사내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반인들은 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태행산 깊숙한 지역이었다.
언제 천 길 아래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길도 험할 뿐만 아니라, 태행산채의 호걸(?)인 그들을 만날 각오도 해야 했다.
채주가 연백지에게 물었다.
“어느 문파의 문하냐?”
“시끄럽다니까. 너희 총표파자가 아직도 하후강이냐? 그거나 대답해. 그럼 살려는 줄게.”
채주의 눈빛이 음침해졌다.
“이년이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총표파자님의 함자를 옆집 아저씨 이름 부르듯 하고.”
연백지가 언급한 하후강이란 이름은 당대의 녹림을 지배하는 총표파자이자 삼왕의 일원인 녹림왕 철군자의 이름이었다.
그가 사납게 소리쳤다.
“내 사타구니 아래 깔리고도 지금처럼 입을 나불거릴 수 있는지 보겠다. 얘들아! 저년을 잡아라!”
“예, 채주님!”
기운차게 대답한 부하들이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고 연백지에게 다가섰다.
진득한 살기가 협곡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연백지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후강이 아직 총표파자인 모양인데, 녹림의 기강이 왜 이래? 저런 놈이 채주를 하고 있고. 예전보다 한참 못하잖아.”
원래 그녀는 하후강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그냥 가려고 했었다.
산적들 때려잡는 협행의 취미도 없는 데다가, 그녀의 신분으로 녹림 전체라면 몰라도 일개 채와 드잡이질을 하는 건 심하게 모양 빠지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채주의 마지막 말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타구니 운운하는 모욕적인 말을 사내한테 들었는데 그냥 가면 연백지가 아니었다.
물론 태행산채의 산적들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었지만.
다가서는 사내들을 본 연백지가 허리춤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쇠공을 하나 꺼내 박도를 든 자에게 던졌다.
휙-
쇠공은 느릿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언뜻 봐도 암기 같은 건 아니어서 박도 사내는 별생각 없이 쇠공을 받았다.
턱!
“뭐지?”
쇠공을 받아 든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때 연백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내들의 정면으로 걸어갔다.
연백지가 쇠공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던 채주가 무엇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얼굴이 똥색으로 변했다.
“적포, 적발, 적안… 설마… 폭뢰구?”
그가 발작하듯 뒤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그거 빨리 던져!”
하지만 아무런 맥락도 없는 그의 외침을 박도 사내가 알아들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주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행동이었다.
콰쾅!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
그 뒤를 이어 시뻘건 화염과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협곡의 입구를 뒤덮었다.
“쿨럭쿨럭…….”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사오 장이나 나가떨어졌던 채주가 버둥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전력을 다해 물러난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걸레처럼 변했고, 그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난도질당한 것처럼 벌어진 채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그의 눈에 시뻘건 화염을 뚫고 태연하게 걸어나오는 연백지가 보였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 그을린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채주는 덜덜덜 떨며 바로 이마를 땅바닥에 박았다.
그는 한 채를 책임질 정도의 일류고수였지만 그녀가 누군지 알아본 후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눈앞의 여인은 그의 실력으로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상대할 수 없는 초강고수였다.
“태… 태후님, 몰라뵀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그의 말 때문에 분노한 연백지가 아닌가.
그녀의 오른손에 노을빛을 띤 기운이 어렸다. 그리고 사방 십여 장 이내가 용암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졌다.
채주의 얼굴에 절망적인 기색이 떠올랐다.
“벽력천화강(霹靂天火罡)… 태후님… 제발…….”
콰릉!
붉은 빛이 번쩍하더니 채주가 있던 자리가 텅 비었다.
그곳에 남은 건 움푹 팬 채 검게 변한 대지뿐이었다.
연백지는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진무앙, 조금만 기다려. 너도 저 꼴로 만들어줄 테니까.”
지난날 무림에서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여고수들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던 여인, 폭렬마녀 화태후 연백지가 돌아왔다, 강호로.
* * *
수향루.
복도를 걷던 진무앙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짜 수향루에 귀신이 사나… 열대야로 푹푹 찌는 한여름 밤에 웬 한기가……?”
구시렁거리며 그는 난향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장죽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검은 돌을 손에 든 채 바둑을 복기하고 있던 난향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
“이상하게 추워서. 요새 종종 이러네…….”
“춥다고? 한서불침인 당신이?”
진무앙은 난향의 맞은편에 앉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나도 이상하다고 한 거잖아.”
“별일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침에는 며칠 안 들어올 것처럼 굴더니 출근 시간 딱 맞춰 돌아왔네?”
“왜 제때 돌아와도 구박하는 건데?”
“이게 구박하는 걸로 들리는 거라면 당신,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야.”
“내 정신 상태야 항상 문제였잖아.”
난향은 지체 없이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
진무앙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맞장구치면 내가 뭐가 되냐?”
“맞는 말을 맞다고 한 건데, 문제 있어?”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던 진무앙이 잠시 후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문제가… 없구나.”
난향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냐?”
“있으니까 왔지.”
“뭔데?”
“난향, 이번 사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구자경 때문에.”
“구 부인?”
“응. 그녀가 사해집마부의 정보기관인 비마잠혈의 정보 무인이라는 거 알아?”
진무앙의 질문에 난향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정말?”
“이런 일로 농담하겠어?”
“어떻게 알았는데?”
“그녀의 손에 혈루지법을 수련한 흔적이 있었어.”
혈루지법은 비마잠혈의 정보 무인들이 익히는, 고문을 위한 비전무공들 중 하나다.
“확실해?”
“손을 잡고 살펴본 건 아니지만 확실해. 그리고 내가 다른 것을 혈루지법의 흔적으로 착각할 리 없다는 건 난향도 잘 알잖아.”
“그렇긴 하지……. 그건 당신이 만든 무공이니까.”
난향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것을 들은 진무앙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녀의 혈루지 성취는 팔성을 넘었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거야.”
난향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구자경이 비마잠혈의 간부급 요인일 거라는 말이네.”
“응.”
“그녀가 비마잠혈 소속이라면 친정인 천성검문을 위해서 섭가장을 장악하려 할 리는 없고…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인데…….”
비마잠혈에 몸담은 무인은 혈연에 얽매이지 않았다.
비마잠혈뿐만 아니라 일월단심맹의 구유밀령, 무림맹의 풍령부운전도 마찬가지였다.
구유밀령의 정보 무인인 주설란을 보면 그 사실을 극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진무앙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여인이었다.
난향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복잡하게 꼬였네.”
그녀가 진무앙을 똑바로 보며 연이어 물었다.
“무앙, 해결할 수 있지?”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 철혈전마 진무앙이야.”
난향이 요염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언제적 별호를! 그거 사람들이 기억이나 할 거 같아? 그것보다 천중제일색이 만 배는 더 유명할걸?”
진무앙의 뺨이 일그러졌다. 그가 소리쳤다.
“염라광도객!”
난향은 연초 연기를 뿜어내며 말을 받았다.
“옥면광마.”
“지옥광생!”
“색혼야차.”
“광혼수라!”
“혈우광견. 우와, 무앙. 그러고 보니까 당신이 얻은 별호에 ‘색’, ‘마’, ‘광’, ‘견’ 중 하나는 꼭 들어가네. 더할까? 아직 한참 많이 남았는데.”
“…아니…….”
“잘 생각했어. 호호호호호.”
진무앙은 우울한 얼굴로 일어났다.
늘 그래 왔듯이 오늘도 그는 말로는 난향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난향이 생긋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