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62
062 진짜 단순무식한 놈
다음 날 아침.
낙양 북부대로의 끝자락에 있는 작은 장원.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중년 문사는 고개를 들었다.
청수한 풍모의 그는 혈사당이 진무앙에게 몰살당한 후 북망산에 모습을 드러냈던 남자였다.
동시에 문밖에서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관 대인, 오 당두입니다. 방금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천하에 당두라는 직책명을 사용하는 조직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황제의 정보기관 동창이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며 흑색무복을 입은 삼십대 사내가 들어왔다.
단단한 체격이었지만 피부가 희고 수염이 없는, 독특한 외모의 사내였다.
그는 중년 문사, 동창 내에 단 두 명뿐이라는 첩형 중 한 사람인 상관무외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오 당두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어 상관무외에게 내밀었다.
서신을 다 읽은 상관무외의 이마에 주름이 몇 가닥 생겨났다.
그가 부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타암에 그녀가 없다고?”
“예. 생사평 대회전 직후 수행을 위해 보타암을 떠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녀의 소재를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행히 다른 계집의 소재는 확인되었군. 흠, 복건성 하문? 틀림없는 거냐?”
“그렇습니다, 대인.”
상관무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곳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파악되었느냐?”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녀는 남해 일대에서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암살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왜구를? 왜 자신의 동족에게 그런 짓을?”
오 당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도 아닌데 그녀가 왜구를 암살하고 다니는 이유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말은 전했다더냐?”
“그곳을 책임지고 있는 곽 당두의 일 처리는 확실하니, 지금쯤이면 그녀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상관무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바로 낙양을 향해 떠날 것이다. 진무앙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구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지.”
그가 오 당두에게 물었다.
“곽 당두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쓸만한가?”
“제국의 변방 지역이라 아무래도 중원에 배치된 자들보다 능력이 좀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상관무외는 혀를 끌끌 찼다.
“답답하군. 하지만 어차피 당두나 번역들 정도가 그녀의 뒤를 잡는 게 가능하지 않은 일이긴 하지…….”
동창의 조직은 제독 아래 두 명의 첩형과 일백 당두, 일천 번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았다. 곽 당두에게 그녀가 낙양으로 출발하는지만 확인하고 손을 떼라고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대인.”
“어차피 그녀는 낙양으로 올 테니 뒤를 쫓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가능한 일도 아니고.”
“예, 대인.”
“하문에서 낙양까지는 사천 리 길이니 쉬지 않고 말을 달린다 해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너는 시기를 맞춰서 그녀가 낙양에 들어오는 걸 반드시 포착하도록 해라. 놓쳐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인.”
“그때까지는 수향루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예, 대인.”
오 당두가 포권을 한 후 방을 나갔다.
상관무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혈수광랑 진무앙……. 그 미친놈만 아니었으면 벌써 끝났을 일이거늘. 청해에 처박혀 있지, 왜 중원에 들어와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냐…….”
중얼거리는 그의 눈에 드리워진 건 은은한 공포.
그는 한때 임무 때문에 제국의 변방을 떠돌던 시절 진무앙이 싸우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했다.
하늘과 땅이 모두 피로 젖었던 그 지옥과도 같았던 광경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노을빛 석양 아래 단 한 명, 오직 진무앙만이 시산혈해를 딛고 홀로 서 있던 그 전투를.
“후우… 그 미친놈은 아직도 날 잊지 않고 있을 텐데… 놈이 나를 보면… 그 성격에…….”
상관무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진무앙이 시산혈해를 이룩했던 그 사건에는 그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숙하게.
북망산에서 혈사당이 죽어갈 때 나서지 못하고 그가 숨어 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 *
수향루의 후원.
진무앙은 인상을 쓰며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그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소소가 그에게 물었다.
“숙부님, 귀가 가려우세요? 제가 귀 파드릴까요?”
“귀지가 있어서 가려운 게 아니야. 내 몸에는 먼지 같은 게 앉지 못해. 때도 안 생기고. 그러니까 귀지가 생길 일도 없지.”
“그런데 왜 그러세요?”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요새 자꾸 내 욕하는 극악무도한 놈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자주 귀가 가려운 게 틀림없어.”
소소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왜 숙부님 욕을 해요?”
“그러게 말이다. 세상에 나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소소는 도저히 맞장구를 칠 수가 없어서 입을 닫았다.
흑염주를 통해 진무앙의 삶의 일부를 엿본 아이가 아니던가.
“…….”
진무앙이 소소를 째려보았다.
“그거, 무슨 뜻이냐?”
“예? 뭐가요?”
“침묵의 의미.”
“아… 헤헤…….”
소소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다가 화제를 바꿨다.
“숙부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진짜 강 작은 숙부님이 숙부님보다 나이가 어려요? 겉으로는 강 작은 숙부님이 열 살은 더 많아 보이잖아요.”
“내가 그 자식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그런데도 걔보다 젊어 보이는 건 내가 최강 동안이라 그렇다.”
“우와! 그럼 숙부님 나이는 몇 살인데요?”
진무앙이 움찔했다.
그는 소화와 눈을 맞추며 말문을 열었다.
“꼬맹아, 너는 사람이 언제부터 늙는 줄 아냐?”
소소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하는 말 머리에 똑똑히 새겨놓아라. 사람이 늙는 건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야. 알겠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
소소는 진무앙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되새겨 보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아홉 살짜리의 이해력이 세월을 뛰어넘는 건 무리였다.
“지금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절대 잊지 않을게요.”
어린아이와 대화하기엔 주제가 너무 무겁다고 느낀 진무앙이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가르쳐 준 권법, 수련 잘하고 있냐?”
“그럼요.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보여 드릴까요?”
“해봐라.”
그는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의 심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무한 남자였다.
하지만 잔뜩 기대가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소소에게 귀찮으니까 하지 말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실망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그가 아닌가.
진무앙이 허락하자 신이 난 소소가 활짝 웃으며 사오 장 떨어져 있던 공터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자세를 잡은 소소가 천천히 움직이며 천라망혼수 삼십육초식을 풀어나갔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던 진무앙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그와 나란히 서서 소소의 연무 시연을 보고 있던 강석초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네…….”
진무앙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받았다.
“동감이다. 천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네.”
진무앙이 가르친 건 권(拳)이었는데 소소는 손을 쫙 펴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였다.
팔뚝과 주먹이 일직선에 가까웠던 진무앙의 시범과 달리 소소의 팔목은 뼈가 없는 문어처럼 휘어지고 꺾어짐을 반복했다.
강석초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무앙, 솔직히 말해봐. 소소한테 정식으로 제대로 가르친 거 아니야?”
“돌았냐? 몸도 정상이 아닌 애한테 천라망혼수의 진수를 가르치게?”
“그럼 지금 소소가 펼치는 건 뭔데? 쟤 혼자 네가 변형해서 가르친 형(形)에서 진수를 뽑아냈다는 거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믿어. 세상엔 가끔 ‘나처럼’ 상식을 벗어난 천재들이 태어나. 소소도 나 같은, 그런 천재인 거야.”
“자기 얼굴에 금칠할 기회는 절대 안 놓치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네가 밴댕이 소갈딱지인 거야.”
“흥.”
투닥거리면서도 두 사람은 소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놀람으로 가득했던 강석초의 눈에 조금씩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워지더니 소소의 연무가 막바지에 이르자 그늘까지 졌다.
그가 말했다.
“무앙, 제대로 가르칠 거 아니면 앞으로 소소한테 무공을 가르치면 안 될 것 같다. 너무 위험해. 저 아이, 형에서 내력의 흐름까지 유추해 내고 있어. 아직 완성시키지는 못한 것 같은데… 까딱하면 주화입마로 폐인 될 거야.”
“나도 눈이 있어, 임마. 쟤한테 괜히 천라망혼수 가르쳐 줬다고 반성하는 중이다.”
소소가 연무 시연을 마치고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뛰어왔다.
“강 작은 숙부님! 제가 하는 거 보셨어요?”
“봤다.”
강석초의 대답은 짧았다.
일반 무가의 아이가 소소와 같은 천재라면 당연히 칭찬하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소소는 그런 집안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강석초는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말을 길게 할 수가 없었다.
진무앙과 강석초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기색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소소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진무앙이 물었다.
“꼬맹아, 내가 가르쳐 준대로 펼치지 않던데, 왜 그런 거냐?”
어깨가 움츠러든 소소가 대답했다.
“펼치다 보니까 뭔가 많이 어색하고 주먹도, 발놀림도 계속 꼬이고 그래서… 자연스럽고 편한 걸 찾다 보니까 어느새 형이 많이 변해 있었어요……. 죄송해요, 숙부님.”
진무앙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니다.”
소소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네가 바꾼 형으로 연무를 펼쳤을 때 몸 안에서 움직이는 작은 물줄기 같은 것도 느껴지냐?”
소소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이가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거보다 더 가느다란 물줄기 같은 게 여기서…….”
소소의 손가락이 단전과 몸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충맥을 가리켰다.
“일어나서 쭉 올라온 다음에…….”
소소의 손이 팔의 양교맥과 음교맥을 훑으며 말이 이어졌다.
“팔의 앞뒤를 오가며 움직이다가 다시 아랫배로 내려가요.”
진무앙과 강석초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무앙이 소소에게 말했다.
“네가 변형시킨 대로 그걸 연마해도 된다. 하지만 나와 한 가지를 약속해야 한다.”
“예, 뭐든 약속할게요.”
“수련할 때 그 몸 안의 물줄기에는 관심을 갖지 마라. 일어나면 일어나는구나 하고 신경을 끊어라. 약속할 수 있겠냐?”
소소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숙부님.”
약속이라고 해서 겁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별게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강석초의 안색은 아주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진무앙이 말했다.
“이제 들어가서 씻어라. 땀 많이 흘렸다.”
“예, 숙부님.”
소소는 진무앙과 강석초에게 인사를 하고는 통통통 별채로 뛰어갔다.
처음 왔을 때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많이 건강해졌다는 걸 알 수 있는 몸놀림이었다.
작고 가녀린 소소의 뒷모습을 보며 강석초가 진무앙에게 말했다.
“너, 미쳤냐? 수련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더니 전륜귀원진기의 입문 구결을 가르쳐? 소소의 천재성이라면 네가 말해준 것만으로도 입문을 지나 입실의 단계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거 몰라?”
내외공 불문하고 무공의 성취 단계는, 입문에서 입실로 거기서 더 나아가면 일성, 이성… 십이성,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진무앙이 가자미눈을 하고 강석초를 슬쩍 내려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수련을 그만하라고 하냐? 할 수 있으면 네가 해봐, 새끼야.”
강석초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진짜 단순무식한 놈…….”
“내가 단순무식하게 사는 데 보태준 거 하나라도 있냐? 맨날 돈이나 왕창 뜯어가는 놈이. 하다못해 잔소리라도 하지 말던가.”
“나중에 막내한테는 뭐라 하려고?”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아무리 네가 막내한테 가르쳐 준 무공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걔 허락도 안 받고 소소한테 진신무공을 가르쳐 준 건데, 걱정을 안 해? 돌았냐?”
“막내가 안아달라고 달려들면, 안아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후우… 진짜…….”
“그런다고 땅이 꺼지겠냐? 더 세게 불어, 새끼야.”
진무앙은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강석초가 물었다.
“어디 가?”
“일하러 가지, 어디 가겠냐? 네가 하도 돈을 뜯어 가서 일을 안 하면 술 한잔 사 마시기도 빡새, 임마.”
휘적휘적 걸어가면서 진무앙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거라도 안 알려주면 저 꼬맹이 진짜 주화입마 걸려, 새끼야. 전륜귀원진기의 요체는 쥐뿔도 모르는 놈이 잔소리는 진짜 초절정고수 급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