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73
073 제 버릇 개 못 준다?
진무앙 정도의 고수가 경공을 펼치는 와중에 발이 꼬인다는 건 무림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고, 진무앙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강호의 절정고수인 천독귀마와 주육화상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진무앙의 등에 고루시독장과 구궁윤회수가 작렬했다.
콰쾅!
“안 돼!”
앞으로 손을 쭉 뻗은 진무앙이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리는 애처로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뒹굴었다.
등에 맞은 일장일수가 너무 아파서?
그럴 리가 있나.
그의 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하다.
물론 채경옥에게 상처를 보여줬을 때처럼 그가 원할 때는 언제든 찢을 수 있긴 하지만.
그의 쭉 뻗은 손가락과 종이 한 장 차이로 파천신혈륜을 품은 검고 투명한 불길이 통통 뛰며 멀어져 갔다.
토오오옹- 토오오옹-
파천신혈륜이 환한 빛 속으로 사라졌다.
번개 같은 속도로 바닥을 몇 번 굴러 동굴의 입구에 도달한 진무앙이 벌떡 일어섰다.
동굴 밖은 수십 장 높이의 절벽이었고, 그 아래엔 긴 세월 향산을 지켜 온 이수의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팔흉과 육기, 구자경과 두연충이 그와 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일어선 진무앙의 양손에는 환무경과 흡철령이 들려 있었다.
그의 시선이 우연처럼 염정나찰을 스쳤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무심한 눈길.
하지만 그의 눈과 마주친 염정나찰의 눈은 태풍을 만난 갈대처럼 흔들렸다.
진무앙이 사람들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마병과 이것들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소. 나는 더 이상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 죽는 걸 보고 싶지도 않소.”
굵고 탁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음성.
당연히 변성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 중 진무앙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무앙이 환무경과 흡철령을 한 손에 와락 거머쥐었다.
천독귀마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소리쳤다.
“멈춰랏!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그는 진무앙이 두 개의 조각을 부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이렇게 하려는 거요.”
말과 함께 진무앙이 환무경과 흡철령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내공이 가득 실린 던지기다.
전 무림을 대혼란에 빠뜨리고도 남을 가치를 지닌 환우지약의 두 조각은 눈이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삐이이이이-
동시에 진무앙의 입술 사이로 기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고 훈련받은 매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은 맥이 탁 풀렸다.
“커… 어… 억!”
“아아악!”
“이… 이… 미친!”
“저 개잡놈이!”
“돌았구나!”
“저게 어떤 물건인데!”
비명과 욕설이 폭풍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멀어지는 환무경과 흡철령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낙하지점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이 담긴 눈길들이었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일천 장을 넘게 날아간 두 조각은 느리게 낙하하더니 이수의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조각의 낙하지점에서 점 두 개가 날아올랐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천으로 가려진 진무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 려. 잘했다.’
진무앙이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수의 물살은 센 편이라 저것들은 꽤 멀리까지 떠내려간 후에야 강바닥에 가라앉을 거요. 생각이 있는 분들은 강바닥을 뒤져 보시구려. 운이 좋으면 저것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을지 모르니.”
말을 마친 진무앙은 번개처럼 동굴을 뛰쳐나갔다.
“서랏!”
“멈춰!”
“안 돼!”
놀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동굴에서 뛰쳐나와 이수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진무앙이 환무경과 흡철령을 다시 가져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강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아직 동굴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염정나찰이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이수를 내려다보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명 그였는데…… 왜 나를 못 본 체한 거지……?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사람들이 본 것과 달리 진무앙은 이수에 뛰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위로 움직였다.
동굴의 밖, 위쪽 절벽에 몸을 붙이고 있던 진무앙은 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염정나찰의 넋두리를 들은 것이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의 얼굴엔 씁쓸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젠장, 아직도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구나…….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내가 좀 잘났어야지……. 후우… 이럴 것 같아서 정체를 숨겼던 건데……. 젠장…….’
그와 염정나찰은 인연이 있었다, 그것도 꽤 깊게.
염정나찰은 십대에 낭인으로 천하를 떠돌던 진무앙을 만났다.
당시 상단의 호위무사로 고용되어 천산북로를 지나던 그는 상단을 털기 위해 나타난 마적 떼와 충돌했다.
마적 떼는 당연히 궤멸당했고, 그는 그들의 근거지까지 찾아가 남은 마적들을 몰살시켰다.
그곳에서 성노예로 살다가 진무앙에게 구출된 소녀가 염정나찰이었다.
그녀는 가족 전부가 마적 떼에게 전부 살해당하고 끌려온 터라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
염정나찰은 진무앙에게 은혜를 갚기를 간곡하게 청했다.
그리고 천애고아인 그녀를 버리고 가기도 난감한 일이라 진무앙은 그녀를 거두었다.
진무앙은 그녀를 반년 넘게 데리고 다녔다.
그때 그는 몸을 지킬 수 있는 간단한(?) 무공 몇 가지를 그녀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성적으로 그녀를 대한 적은 없었다.
염정나찰은 아름다운 소녀였지만 진무앙은 그녀에게 성적인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가진 여자에 대한 몇 가지 금지 원칙 중 하나에 그녀가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묘령(스무 살 안팎)이 되지 않은 여자에게는 들이대지 않는다는 원칙.
하지만 그와 달리 염정나찰은 어떤 원칙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진무앙을 신과 동격으로 여겼고, 죽으라고 하면 정말 죽을 정도로 그를 숭배했다.
그녀는 그를 통해 세상을 보았고, 이해했다(그러니 후일 그녀의 성격이 이상해진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진무앙을 향한 그녀의 숭배와 사랑은 강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녀는 진무앙의 방으로 들어왔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새겠냐는 말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제 버릇 개 주기도 하고,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안 샐 때도 있다.
놀랍게도 진무앙은 알몸의 그녀를 거절했다.
미인이라면 환장하는 그였지만 또 지켜야 할 선은 확실하게 지키는 남자가 그였다(이건 진무앙 자신만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날 밤, 상대 여자에게 마음의 부담을 느낄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진무앙은 염정나찰의 곁을 훌쩍 떠났다.
진무앙은 그 순간을 돌이켜 볼 때마다 늘 억울해하며 소리친다.
“정말로 안 잤다니까!”
각설하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염정나찰이 그랬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야반도주해 버린 그에 대한 원망은 그녀의 골수에 맺혔다.
그 깊은 원망은 남자를 유혹해서 마음을 빼앗고 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림의 악녀 염정나찰을 탄생시켰다.
진무앙이 호신용(?)으로 가르친 무공과 남자들에게 무차별로 행한 패악질로 그녀는 당당하게 육기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다섯 오빠가 된 오기는 그녀의 마음에 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해 진무앙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변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진무앙과 육기는 변방에서 몇 번을 만났다.
진무앙이 염정나찰을 보자마자 늘 도망쳐서 제대로 된 싸움이 벌어진 적은 없었지만.
아무튼 염정나찰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진무앙은 억울했다.
잠자리는 차치하고 그녀와 입맞춤이라도 한번 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긴 세월이 흘렀어도 마음 한구석엔 그녀에 대한 부담이 남아 있었다.
자신 때문에 한 여자가 사파의 거물로 인생 역전(?)한 거 아니겠는가.
그가 주육화상을 피하고, 주설란을 죽이려던 낙일망재에게 살수를 쓰지 않은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팔흉을 상대할 때 그가 손에 사정을 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고.
진무앙은 염정나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털푸덕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더럭더럭 울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샛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소녀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 보였다.
진무앙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기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는 울적한 감정에 오래 사로잡히는 남자가 아니다.
‘라일라, 이제 제발 좀 나를 잊어주라. 내가 너한테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몇십 년째냐고!’
라일라는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염정나찰의 본명이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는 진무앙의 신형이 구름처럼 둥실 떠올랐다.
유령을 방불케 하는, 아무런 기척도 없는 은밀한 경공.
무영삼절 중 하나인 이매부운이었다.
이수를 헤엄쳐서 건넌 그는 용문산으로 들어섰다.
향산의 지하 미로에서 사마휘 등과 헤어질 때 약속했던 고양동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고양동에 들어선 그는 얼굴을 감싼 천을 걷어냈다.
그곳엔 여러 사람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사마휘, 주설란, 석채은, 섭광운, 그리고 남궁경이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분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뭉앙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궁경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섭광운에게 물었다.
“섭 장주님,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당연히 섭광운의 건강이 염려되어 질문한 건 아니었다.
섭운룡에게 남은 의뢰 대금 오십 냥을 받기 위한 마지막 몸 상태 파악이었을 뿐.
그가 남자의 건강 여부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섭광운이 그에게 포권을 하며 말을 받았다.
“석 목주와 사마 소협에게 진 호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 몸을 빼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도움을 받았소. 감사하오.”
“섭운룡 소공자에게서 섭 장주를 찾아 섭가장으로 안전하게 모셔다 달라는 의뢰를 받아서 한 일입니다. 대가를 받고 한 일이니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행한 일을 그리 편하게 말해주니 이 섭모의 마음이 한결 가볍구려. 그 대가라는 것, 충분히 치르도록 하리다.”
진무앙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런데 진 호위, 그곳에 있던 내 처와 두 총관이 어찌 되었는지 아시오?”
“두 사람 모두 큰일은 없었으니 곧 섭가장으로 돌아올 겁니다.”
“후우, 천만다행한 일이오.”
한층 얼굴이 밝아진 섭광운이 또 물었다.
“혹시 그 ‘기물’들은 가지고 오셨소? 일행인 사마 소협의 말에 의하면 그것을 갖고 오겠다고 약속하셨다 들었소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무앙을 향했다.
진무앙은 아아아주 기일게 탄식했다.
“후우우우우우우…….”
남궁경을 제외한 네 사람의 얼굴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섭광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리 길게 한숨을 내쉬는 거요? 혹시 일이 잘못되기라도?”
“맞습니다. 그 ‘기물’들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붉은 구슬은 살아 있는 놈처럼 도망가 버렸고, 두 조각은 팔흉과 육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수에 버려야 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백 리는 떠내려갔을 겁니다.”
“아악!”
이건 사마휘의 비명.
“안 돼!”
이건 주설란의 절규.
“미쳤나 봐!”
이건 넋 나간 석채은의 아우성.
“으으으음……!”
이건 섭광운의 신음.
동요가 없는 사람은 남궁경 한 사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