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75
075 개자식
태행산 대협곡.
까마득하게 치솟은 서편의 거대한 절벽 너머로 해가 절반쯤 걸쳐진 오후.
천천히 어둠이 내리는 협곡의 입구에 사람의 그림자 몇 개가 유령처럼 불쑥 솟아올랐다.
절정의 경공술을 사용하는 그들은 남색 장삼의 중년인과 두 명의 죽립인, 그리고 삼십대의 장년인이었다.
그중 장년인은 한 죽립인의 허리에 끼어 있었다.
협곡의 입구는 처참했다.
절벽의 아랫부분은 곳곳이 무너져 있었고, 땅은 여기저기가 움푹 패거나 뒤집혀 있었다.
게다가 재가 되어버린 나무와 풀의 흔적들까지.
주변을 둘러본 중년인이 천천히 뒷짐을 졌다.
웅장한 자연 앞에 서 있는데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는 강렬한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짧은 수염, 뚜렷한 이목구비, 빛나는 눈동자와 훤칠하고 단단한 체격.
중년인은 젊었을 때 대단한 미남자 소리를 들었을 외모였다.
그의 시선이 죽립인의 허리에 끼어 있는 장년인을 향했다.
죽립인이 손을 풀자마자 장년인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그는 머리의 절반 이상이 홀랑 타버렸고, 한쪽 팔과 상반신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중년인이 그에게 말했다.
“이름이 여패라고 했던가?”
생김새만큼이나 중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
“예, 맹주님.”
중년인, 그는 당대 녹림칠십이채의 지배자인 녹림왕 철군자 하후강이었다.
그는 나이 서른에 녹림을 장악한 후 수십 년 동안 그 규모를 몇 배로 성장시킨 능력자였고, 녹림 사상 가장 강한 고수라 평가받고 있는 초절정고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칠십에 가까운 나이의 그가 사십을 갓 넘은 듯 보이는 건 그가 얼마나 심후한 내공의 소유자인지 알려주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태행산채의 채주와 부하들이 정체 모를 여고수에게 폭사당했다는 보고가 녹림총타로 올라온 건 며칠 전.
보고서의 내용을 보자마자 그는 총타를 떠나 한시도 쉬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하후강은 지면의 검은 흔적들을 돌아보며 여패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만났던 여인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하라.”
여패는 연백지를 만나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태행산채의 산적이었다.
그가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하후강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예, 맹주님. 그녀는 소인이 평생 처음 보는 미인이었습니다요. 굉장히 특이한 생김새였습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남자처럼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온통 붉은빛 일색이었습니다요. 타는 듯 붉은 머리, 붉은 장포, 거기에 눈동자의 색까지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빛이었습죠. 참, 피부가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굉장히 희었습니다요. 백옥을 깎으면 저런 피부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매끄럽고 빛이 났습죠. 그래서 저는 그녀가 색목국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요.”
하후강의 눈끝이 가늘게 떨렸다.
“붉은 장포…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 백옥 같은 피부…….”
중얼거리던 그가 다시 여패에게 물었다.
“그녀가 마지막에 너희에게 던진 물건의 형태를 본 그대로 말하라.”
“처음에 소인은 그 물건이 장난감인 줄 알았습니다요. 그래서 왜 그런 물건을 던지나 이상하게 생각했습죠.”
오른쪽의 죽립인이 여패의 말을 끊었다.
“잡소리는 치우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죽립인들은 하후강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호위하는 좌우쌍도였다.
수십 년 동안 그들의 냉정한 심성과 잔혹한 칼질은 녹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패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예예예… 그 물건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한 빛이 감도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습니다요.”
하후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폭뢰구로군.”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감회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가 다시 강호로 나왔구나…….”
그가 여패에게 물었다.
“그녀가 간 방향이 남쪽이었다고?”
“그렇습니다요.”
하후강은 천천히 뒷짐을 졌다.
황폐하게 변한 협곡, 붉은 노을과 조금씩 진해져 가는 어둠, 계곡을 지나 불어오는 거친 바람…….
그 모든 것이 하후강에게 새로웠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식어 있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백지… 이번에는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당신을 보내지 않을 거요, 절대로!”
나직하지만 결연한 기색이 가득 어린 중얼거림.
하후강이 오른쪽 죽립인에게 말했다.
“우도.”
“예, 맹주님.”
“즉시 녹림혈(綠林血)을 풀어 그녀의 종적을 찾아라. 이 명령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존명!”
우도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허리를 편 그는 번개처럼 산 아래로 달려갔다.
하후강은 눈을 들어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화궁의 절진을 뚫을 수가 없어 그저 기다려야만 했던 시간들. 이제 그 끝을 볼 수 있겠구나.”
그의 눈은 희망과 기대, 그리고 강렬한 열망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길고 긴 기다림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그냥 생겼겠는가.
미래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잠시 후 협곡의 입구는 텅 비었다.
* * *
어둠이 내린 수향루 난향의 거처.
난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석초에게 물었다.
“팔흉과 육기? 정말 그들이 향산에 나타났단 말이야?”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라 난향은 침상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 맞은편의 강석초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나도 사신령에게서 보고를 받고 많이 놀랐어.”
“그놈들이 거기서 뭘 하는데?”
“향산에서 노는 것 같더니 지금은 이수에서 자맥질하면서 하류로 내려가고 있대.”
“자맥질?”
난향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연이어 물었다.
“여름이긴 하지만 그들이 단체로 물놀이를 할 인간들은 아니고… 왜 그 짓을 해?”
“몰라. 뭘 찾고 있는 것 같다는데, 사신령도 아직 그들이 왜 그러고 있는지 이유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어.”
난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생사평 대회전 후 강호상에서 활동하지 않던 자들이 한꺼번에 향산에 나타난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닌데, 단체로 이수에서 자맥질을 한다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사신령 애들이 조사 중이니까 곧 소식이 있을 거야.”
“으음…….”
나직한 신음성을 흘린 난향이 물었다.
“무앙은?”
“그 자식…….”
말을 하던 강석초는 난향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식겁한 표정으로 즉시 호칭을 바꿨다.
“……그가 뭘 했는지도 모르겠어. 향산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까지는 파악했는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대. 이 낭랑도 알잖아. 사신령이 그 자…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는 거. 그랬다가 그가 알아차리면 난리가 날 거야.”
그가 물었다.
“팔흉이나 육기 중에 누구 하나 잡아서 족쳐 볼까?”
난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앙이 그 성격에 그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놔준 건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 너도 알잖아, 일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그러니 공연히 네가 손대서 그 사람을 자극할 필요는 없어.”
“그렇긴 하지……. 알았어.”
“그래도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상세히 알아봐. 팔흉과 육기가 향산에 있을 때 무앙도 그곳으로 갔어. 평범한 일일 리가 없잖아. 그 인간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진무앙이 들어섰다.
“뭘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는 거야?”
난향과 강석초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소리를 차단하는 단음강벽을 펼치고 대화를 나눴는데도 진무앙은 일부를 들은 것이다.
다행히 난향이 마지막에 한 말만 들은 듯했지만.
물론 진무앙이 내공을 썼다면 단음강벽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향루 내에 있을 때 그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 아니면 무방비 상태로 지낸다.
난향과 강석초가 함께 머무는 곳에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절대로 그의 뒤통수를 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가 그들의 뒤통수를 칠 수는 있어도.
즉, 그에게 수향루는 무림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인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본 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고 있었기에 그런 표정들이야?”
강석초가 벌떡 일어나며 강하게 항의를 했다.
“내 표정이 어땠다고 그러는 거야!”
“역적 모의하다가 들킨 반역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잖아.”
강석초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악을 썼다.
“역적… 반역자? 하루 종일 밖을 쏘다니다가 온 인간이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음… 네 반응 보니까 더 수상하네. 둘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난향이 끼어들었다.
“석초, 너는 가봐.”
강석초가 대뜸 표정을 바꾸어 환하게 웃으며 난향에게 말했다.
“알았어. 가볼게.”
후다다닥-
잽싸게 방을 빠져나가는 강석초를 힐끗 보며 진무앙이 난향에게 말했다.
“진짜 수상하네. 둘이 무슨 얘기 했는지 말 안 해줄 거야?”
“별거 없었어. 내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달라고 한 게 있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야.”
“그래?”
진무앙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방금 본 건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그는 단순하다.
특히 난향과 대화할 때는 더 단순해진다.
대화할 때 그녀의 방어는 철벽과 같아서 추궁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난향이 그에게 말했다.
“무앙,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할 얘기 있으면 앉고, 없으면 나가.”
그녀의 말투가 곱지 않다는 걸 느낀 진무앙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난향, 왜 나한테 화가 난 거야?”
“화 안 났어.”
“화났잖아.”
“화 안 났다니까.”
“화났구만, 뭘.”
난향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그녀가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진무앙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본 난향의 눈썹 끝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선물.”
“선물? 갑자기?”
“응. 전에 내가 준 건 부러졌잖아. 그래서 새로 하나 샀어.”
난향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의 앞으로 쭉 내민 진무앙의 손에는 은은한 비취색을 발하는 옥비녀가 들려 있었다.
“이걸 나한테 왜 선물해?”
“그냥.”
“그냥?”
진무앙은 머뭇거리는 난향의 손을 덥석 잡아 옥비녀를 건네주었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거리를 걷는데 난향 생각이 나더라구. 그래서 하나 샀지. 사실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낙양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일이 좀 많았냐. 그래서 좀 늦었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맥락이 허술한 말이었지만 난향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감정이 격해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무앙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참, 섭광운을 찾았어. 지금쯤 섭가장에 도착했을 거야.”
흔들리던 난향의 눈동자가 단숨에 제자리를 찾았다.
“섭 장주를? 어디서?”
“향산 깊은 곳에서 헤매고 있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낙양 토박이인 사람이 뒷산이나 다름없는 향산에서 왜 헤매?”
“난들 아나. 궁금하면 섭광운에게 직접 물어봐. 어쨌든 찾았으니까 의뢰는 완료. 내 일은 끝났어. 내일 중으로 하인이 의뢰 대금을 갖고 올 거야. 그때 만약 내가 없으면 그거 받아놔 줘.”
진무앙은 되는 대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향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다친 데는 없고?”
“응, 없더라구.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어.”
“다행이네. 이제 룡아가 좀 마음 놓겠네.”
“나는 꼬맹이한테 들렀다가 일하러 갈게.”
“알았어.”
그렇게 귀가(?) 보고는 끝이 났다.
진무앙이 나가자 난향은 손에 든 옥비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오만 가지 감정이 다 떠올랐다.
“하아… 이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개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