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77
077 오늘 나, 작정했어
다음 날, 진무앙은 어제와 같은 순서로 일과를 시작했다.
소소가 펼치는 권법을 여유 있게 감상하고 방으로 돌아온 그는 침상에 팔베개하고 누웠다.
천장을 향한 그의 눈엔 그답지 않게 심란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잘 좀 지내지… 아프고… 그러냐…….’
뒤척이던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염병… 정신 사납네.’
침상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는 좁은 방안에서 정신없이 팔다리를 내뻗기 시작했다.
내공이 전혀 실리지 않은 권각.
하지만 눈 한 번 깜박이기도 전에 방안은 소름 끼치는 살기로 가득 찼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침밥 잘 먹고 웬 지랄발광이야! 송곳으로 쿡쿡 쑤시는 거 같아서 쉴 수가 없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건 강석초였다.
진무앙이 움직임을 멈추며 투덜거렸다.
“쓸데없이 예민한 새끼.”
강석초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손발에 왜 그렇게 살기가 가득해?”
진무앙이 침상에 털썩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죽도록 패고 싶은 놈이 있어서 그런다.”
강석초가 눈을 크게 떴다.
“너한테 아직도 그런 놈이 남아 있었어?”
그가 아는 진무앙은 저 정도 살기를 품었으면 이렇게 속을 끓이는 게 아니라 즉시 그 대상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남자였다.
진무앙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없겠냐?”
“누군데?”
“있어. 넌 몰라도 돼.”
“쳇, 잘났다!”
쾅!
강석초는 부서져라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진무앙이 중얼거렸다.
“죽도록 패고 싶은 그 사람, 나다, 이 자식아…….”
그 말을 들은 걸까.
문이 다시 벌컥 열리며 강석초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의 용무는 다른 것이었다.
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또 왜?”
“본루에 가봐. 널 찾는 손님이 있단다.”
진무앙은 고개를 갸웃했다. 낙양에서 그를 찾을 사람은 몇 없다.
“나를? 어디서 온 놈인데?”
“잠룡오걸 중에 한 놈이라던데?”
“잠룡오걸?”
진무앙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룡오걸이라면 사마휘의 부하들 아닌가.
“날 왜 찾지?”
일어서는 그의 표정은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마음을 짓눌렀던 감정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얼굴.
그는 고민이나 울적한 감정에 오래 사로잡혀 있는 남자가 아니다.
그가 스스로를 오늘만 사는 남자라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 시진 후 진무앙은 수향루에서 십여 리 떨어진 동부 대로의 작은 장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은 사마세가가 소유한 많은 장원 중 하나로, 평소 그들이 은밀하게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때 사용하는 장소였다.
장원의 밀실에서 진무앙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사마휘였다.
밀실에 들어선 진무앙은 눈이 커졌다.
“휘아…….”
사마휘는 여자 옷을 입고 있었다.
말리꽃이 수 놓인 가을 하늘색의 궁장을 입은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항상 몸에서 떼지 않는 쌍검도 보이지 않았다.
“앉아.”
사마휘의 말에 진무앙은 여우에 홀린 남자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탁자에는 산해진미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진무앙이 사마휘에게 물었다.
“휘아, 무슨 일 있는 거냐? 여기는 세가의 장원인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여자 옷을 입었어?”
“걱정하지 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놨어. 그리고 벽이 두터워서 밖에서는 이 안에서 하는 이야기 안 들려.”
사마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병을 잡고 진무앙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내일, 무한으로 돌아가. 들어와서 보고하라는 총군사의 지시야.”
눈이 커진 진무앙이 되물었다.
“응? 너도?”
“너도? 나 말고 또 누가 어디로 돌아갔어?”
진무앙은 움찔했다.
자신도 모르게 주설란을 떠올라 실언을 한 것이다.
그가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얼버무렸다.
“아… 하하하… 그건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 헛나왔다.”
다행히 무림맹에 돌아가는 일로 마음이 꽉 찬 사마휘는 별 의심하는 기색 보이지 않고 넘어갔다.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오늘 정말 아름다워. 천하인들이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면 당대의 천하십미는 십일미가 될 텐데.”
사마휘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그것은, 미소였다.
그녀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내 옆에 영원히 머무르겠다고 약속한다면 늘 이런 모습으로 살 생각도 있어.”
진무앙의 눈가에 희미한 그늘이 졌다.
대답이 없는 그를 보며 사마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호호, 당신, 지금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알아? 농담이야, 농담. 당신이 내 치맛자락 부여잡고 제발 옆에 있어달라고 애원해도 그럴 일 없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진무앙이 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자신과 사마휘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역마살은 내 운명의 낙인이야. 영원히 떠돌며 낭인으로 살라고 하늘이 내게 준 형벌이지.”
“농담이었다니까 그러네. 당신도 내 꿈이 뭔지 당신도 알잖아.”
“알지. 무림맹주.”
“미친 듯이 치열하게 살아도 가능성이 일 할도 되지 않는 꿈이야. 무림맹은 천하의 기재들을 빨아들이는 용광로 같은 곳이니까.”
사마휘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게 남자는 당신 하나뿐일 거야. 하지만 그게 다야. 당신과 내가 가는 길은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내 인생을 살 거야.”
사마휘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밝아 보이기까지 했다.
진무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어떤 길을 가든 난 영원히 널 지지하는 남자로 남을 거다.”
사마휘의 눈이 또 둥글게 휘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당신이지만, 그 말은 믿고 싶네. 아니, 믿을게.”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지금 그 말도 거짓말이잖아.”
“췟!”
“호호호호호.”
사마휘가 웃으며 잔을 비웠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사마휘가 말했다.
“무앙, 본 얼굴 보여줘.”
진무앙은 거침없이 인피면구를 벗었다.
하도 오래 쓰고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면구를 쓰고 있다는 자각이 희미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의 사마휘처럼 다른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면 면구를 벗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드러난 진무앙의 조각처럼 수려한 얼굴을 본 사마휘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어렸다.
“그거 알아? 당신을 볼 때마다 영원히 박제해서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거.”
진무앙이 밭은기침을 토하며 질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쿨럭, 휘아, 그런 엽기적인 생각을 왜 해! 누가 들으면 변태 소리 듣기 딱 좋아. 인생에 보탬이 전혀 안 되는 그런 이상한 생각은 얼른 버리고 절대 다시 하지 마.”
“호호호호호.”
눈물이 찔끔 나도록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사마휘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무앙, 낙양에 얼마나 더 머물 거야?”
“나도 몰라. 떠날 때가 되면 떠나게 되겠지.”
“당신다운 말이네.”
그녀가 턱에 손을 괴고 진무앙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돌아왔을 때도 당신이 낙양에 머물고 있었으면 좋겠어.”
진무앙이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금방 떠나지는 않을 거라 네 바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아주 높아.”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사마휘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진무앙이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왜 일어나?”
“식사 시간 끝났어.”
“응? 아직 입도 제대로 대지 못했는데?”
사마휘가 뜨거운 눈으로 진무앙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이른 시간에 밥이나 같이 먹으려고 당신을 불렀겠어?”
진무앙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야 무조건 찬성! 애당초 나도 밥만 먹고 갈 생각으로 온 건 아니라구.”
사마휘가 뒤편 벽의 한 지점을 누르자 스르릉 하며 평평하기만 하던 벽에 문이 열렸다.
문안으로 넓은 침상이 보이자 진무앙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를 보며 사마휘는 요대의 매듭을 잡아당겼다.
다음 순간, 진무앙의 눈이 커졌다.
스르르르-
요대를 풀자마자 벌어지는 하늘색 궁장의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웬만한 남자보다 키가 크고 늘씬한 데다 무공으로 단련된 탄력 넘치는 사마휘의 알몸이 드러나고 있었다.
진무앙은 사마휘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두 팔로 확 안아 올렸다.
어느새 눈가가 붉게 물든 사마휘가 그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진무앙은 기꺼이 그녀의 손에 몸을 맡겼다.
고개를 숙인 그가 사마휘의 붉은 입술을 강하게 빨았다.
밀실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뗀 사마휘가 진무앙에게 말했다.
“당신, 각오해. 오늘 나, 작정했어.”
진무앙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을 받았다.
“휘아, 쉽지 않을 거야. 나, 진무앙이거든, 흐흐흐.”
두 번째 밀실의 문이 닫혔다.
정오를 지난 시각.
해의 기울기가 점점 가팔라지고 있었다.
수향루의 후원 별채 앞, 자신이 기르는 수십 마리의 비둘기 떼에게 모이를 주고 있던 강석초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 인간, 사마휘를 만나러 간다더니, 몰골이 왜 저래?”
진무앙이 비틀거리면서 후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뒤엉켜 있었고, 옷매무새도 느슨했다.
거기다…
자신의 앞까지 걸어온 진무앙의 얼굴을 보는 강석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아! 너, 코피 나!”
진무앙이 강석초의 옆에 있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맷자락으로 코피를 슥슥 닦았다.
“요새 자주 나네…….”
그가 투덜거리자 강석초가 물었다.
“코피까지 흘리고, 뭔 일이야?”
“애들은 몰라도 되는 일이야.”
강석초의 눈썹이 꿈틀하며 하늘로 솟았다.
“애? 내 나이가 몇인데 헛소리야!”
진무앙이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평생 동정으로 산 놈이 어른들에 대해 뭘 안다고!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 되는 거 아니다.”
강석초가 부글거리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누구 때문에 동정으로 살게 되었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진무앙이 그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기억력 나쁜 새끼, 혼원탄옥강을 가르칠 달라고 네가 얼마나 날 쫓아다녔었는지는 그새 잊어버렸지? 그리고 그때 내가 분명히 말했었잖아. 이거 익히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 여자하고 잘 수 없다는 말은 아니잖아. 그게 어떻게 똑같아!”
“말귀를 잘못 알아들은 거야 네 이해력이 달려서 그런 거고.”
“그때 내 나이는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었다고! 그 어린 나이에 네 말을 어떻게 이해해!”
진무앙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강석초에게 물었다.
“열네 살이 어려? 나는 그때 여자는 물론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좌악 꿰고 있었어, 새끼야. 너, 지금 머리 나쁘다고 자백하는 거지?”
“아으으으… 이 벽창호 같은 인간이!”
이를 악문 강석초가 신음을 흘리며 곽 움켜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진무앙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나 지금부터 저녁 식사 때까지 잘 거니까 황제가 날 찾더라도 내 방문 두드리지 마. 깨우면 네놈 머리카락 다 뽑아버릴 거다.”
무자비한(?) 협박을 남기고 그는 휘적휘적 별채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부들대던 강석초가 중얼거렸다.
“코피에… 밤꽃 냄새… 이거 분명 그 짓하고 난 흔적인데… 사마휘를 만나고 왔는데 왜 저 인간한테서 그 흔적들이 보이는 거지?”
생각을 이어가던 강석초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와드득 쥐어뜯었다.
“아으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머리 터지겠다! 왜 저 인간만 만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기는 거냐!!”
그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 턱이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