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81
081 답이 정해진 인생이란 없는 거죠
수향루 호위무사 대기실.
흠칫! 부르르!
간이침상에 늘어져 있던 진무앙이 몸을 떨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언제나처럼 눈을 감고 가부좌를 하고 있던 목일석이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자네, 왜 그러나?”
진무앙은 목을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갑자기 오싹해서요. 목 호위, 혹시 한기 같은 거 안 느껴집니까?”
“한기? 전혀! 수향루 전체가 사내들의 열기로 후끈후끈하구만,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린가.”
“…그렇군요…….”
“한기를 느꼈나?”
“예, 누군가 칼로 제 목을 아주 얇게 포를 뜨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실감이 지나치게 강해서 진짜인 줄 알았어요.”
“흠… 자네, 수련을 너무 게을리해서 그런 거 아닌가? 자네가 무공을 수련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네만.”
진무앙은 쓰게 웃었다.
“그런 거 수련해서 뭐합니까. 나는 무림인도 아닌데.”
목일석의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특급 호위를 할 정도의 무공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무림인이라는 걸 부인하다니.”
“난 그냥 떠돌이 낭인이고, 이렇게 살다 죽을 사람입니다. 무림하고 얽힐 일도 없고, 얽히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하하하.”
목일석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무공을 익힌 후 들은 말 중에 가장 재미있는 말이로군. 하지만 무림이라는 곳이 들어왔다 나가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던가……. 그럴 수 있었다면 내 인생도 많이 달라졌겠지.”
진무앙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건 목 호위가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지를 못해서 그런 겁니다.”
“내려놓지를 못했다?”
“어차피 빈손으로 온 세상,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세상이 준 것들 다 훌훌 내려놓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진무앙이 다시 침상에 누워 팔베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목 호위가 스스로 자기 발목을 쇠사슬 같은 인연에 내줬으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거죠.”
진무앙을 보는 목일석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깊어진 눈으로 잠시 침묵하다가 중얼거렸다.
“쇠사슬 같은 인연에 내 스스로 발목을 내줬다라…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속 편해서 좋겠군. 하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살아야겠네. 나는 자네처럼 그렇게 내려놓는 성격이 못 되거든.”
진무앙은 피식 웃었다.
“나처럼 살라고 한 말 아닙니다. 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죠. 감히 누가 그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답이 정해진 인생이란 없는 거죠. 그냥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 좋아하는 걸 하며 살다가 가는 겁니다. 그게 제가 아는 인생입니다.”
“평생 강호에 발 담그며 살다가 귀천을 앞두게 된 노강호 같은 소리를 하는군.”
진무앙이 와락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거, 악담이죠?”
목일석은 싱긋 웃으며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그들 사이에 드물게 이루어지는 짧은 대화가 끝난 것이다.
* * *
강서성 위두의 백양객잔 별채로 이른 아침부터 말을 탄 세 명의 무림인이 들이닥쳤다.
이곳에서 발생한 대량 살인 사건 때문에 출동해서 현장 조사를 하고 있다가 그들을 본 위두현의 포두와 포쾌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현장 지휘 책임자인 포두가 무림인들을 보고 말했다.
“무림맹 분들인 거 같긴 한데, 위두지소에서 오신 분들은 아닌 것 같고, 누구쇼?”
무림맹은 각 성의 대도시 두세 곳에 지부를 두고 있고, 현급 이하의 지역엔 지소를 운영한다.
강력 사건 조사와 관련된 관부와 무림맹의 협약 덕분에 그 지역 양측의 포두와 무인들은 서로 친분이 깊었다.
등에 구환도를 매고 있는 중년인이 포권을 하며 말을 받았다.
“무림맹 복건 지부의 선풍도(旋風刀) 척구명이오.”
포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서 지부가 아니라 복건 지부에서 오셨단 말이오?”
척구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사건의 범인은 복건성 하문에서부터 곳곳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연쇄살인마요. 불과 열흘 사이에 범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오십 명을 넘소.”
포두는 물론이고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건 뚜렷한 두려움이었다.
도처에서 쉴 새 없이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시대이기는 했지만, 열흘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오십 명을 넘게 죽인 연쇄살인범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척구명이 말을 이었다.
“피해자들은 무림인과 평범한 사람이 뒤섞여 있소. 그래서 이 사건은 무림맹이 조사 중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라오.”
포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입밖으로 내기 어려워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거야말로 관부가 바라던 일이 아닌가.
“얼마든지 협조하겠소.”
“피해자들의 신분은 파악되었소?”
“백양보주와 그의 호위무사 둘, 그리고 제자 둘이오.”
“사망 추정 시간은?”
“자시에서 축시로 넘어가는 시간이오. 그때 별채에 묵었던 손님들 중에 복도에서 나는 둔탁한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여럿 있소.”
“어젯밤 이곳에 묵은 손님들의 명단은 확보하셨소?”
“물론이오.”
“그들 중에 지금 없는 사람이 있소?”
“한 사람이 없소. 여자인데…….”
포두의 말에 척구명이 말을 끊었다.
“혹시 왜국의 옷을 입은 절세미인이 아니오?”
포두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걸?”
“으음… 역시… 또 한발 늦었군.”
낮게 중얼거린 척구명과 일행 두 명이 눈빛을 교환했다.
포두가 척구명에게 물었다.
“그녀가 범인이라는 거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소, 목격자가 없어서. 하지만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어, 우리는 그녀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소. 게다가 피해자들은 모두 평소 그 지역에서 강간과 윤간을 일삼던 파락호들이라 그녀의 미모를 보고 그냥 둘 리 없는 놈들뿐이니.”
“으음…….”
포두가 신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백양보주와 제자들도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한 자들이었소.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아녀자들의 수가 수십 명을 넘지만, 워낙 이 지역에서 힘이 센 토호라 우리도 쉽게 징치하지 못하던 참이었소.”
“그녀가 떠나는 걸 본 사람이 있소?”
그때 허름한 마의를 입은 초로의 노인이 끼어들었다.
“소인이 봤습니다요.”
척구명이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너무 더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당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집 근처를 지나가는 걸 봤습니다요.”
“어디로 갔소?”
“북서쪽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던데, 말을 타고 있는 게 아니니 지금쯤이면 해서촌을 지나가고 있을 겁니다요.”
“고맙소.”
“별말씀을요.”
노인에게서 눈길을 뗀 척구명이 포두에게 말했다.
“위두지소에서도 사람이 나올 거외다. 알아낸 게 있으면 그들에게 말해주시구려. 그러면 내게 전해질 터이니.”
포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 기꺼이 협력하리다.”
척구명 일행은 바로 위두를 떠났다.
그들이 사라진 후 마을 사람들이 노인 주변으로 몰려들어 그를 타박했다.
“어르신, 그녀가 백양보 사람들을 죽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디로 갔는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뒈졌어도 벌써 뒈졌어야 할 놈들을 죽인 건데…….”
“이놈들이 벌인 패악질을 어르신도 알잖아요. 천벌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녀의 행방을 알려주시면 어떡해요. 그러다 잡히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죽은 놈들이 전부 백양보주 사제와 비슷한 놈들뿐이라잖아요. 오히려 우리가 마음은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던 놈들을 죽여주었으니 숨겨줘도 모자랄 판인데…….”
초로의 노인이 조용히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북서쪽 해서촌이 아니라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노인이 북동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허허허, 내 한마디가 그녀에게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구먼.”
그제야 사정을 짐작한 마을 사람들이 웃으며 돌아섰다.
* * *
다가닥! 다가닥!
힘차게 말을 달려 위두를 벗어나던 척구명의 일행 중 한 명이 그에게 물었다.
“대형, 이쪽은 북동쪽이잖습니까? 노인은 분명 북서쪽이라고 했는데, 왜 이 방향으로 가시는 겁니까?”
척구명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에게 협조적이었던 마을 사람들이 있었나?”
질문을 한 사내는 침묵했다.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척구명이 말을 이었다.
“탐문을 했으니 너희도 알겠지만, 모든 마을 사람이 은근히 그녀를 돕고 싶어 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녀 손에 죽은 자들은 모두가 죽기를 바랐던 자들이었으니.”
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척구명과 함께 여러 번 경험한 상황이 아니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내게 말하던 노인은 침착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해서촌을 지나가고 있을 거라는 말을 할 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짓말을 한 거지.”
다른 사내가 물었다.
“대형, 노인이 거짓말을 했다고 쳐도 왜 다른 방향이 아니라 북동쪽을 택하신 건지…….”
“지금까지 그녀는 계속 북상했어. 목적지가 북쪽에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노인이 말한 북서쪽이 거짓말이라면 남는 건 동, 서, 그리고 정북과 북동 방향이야.”
여기까지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아 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척구명이 말을 이었다.
“사람의 사고방식은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흐름을 따르는 경향이 있지.”
두 사람은 그의 말에 귀를 바짝 세우고 경청했다.
척구명은 복건 지부에 몸을 담고 있지만 무림맹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조사관이었다.
이런 배움의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여인이 북쪽으로 갔다면 노인은 북서쪽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동이나 서를 말했을 수도 있어. 그는 그녀가 북상하고 있다는 걸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가 간 방향이 북, 동, 서가 아니었기에 북서쪽이라고 말한 거지. 북동의 반대 방향이 북서니까.”
“아……!”
“역시 대형이십니다.”
“그렇게 감탄하면 내가 무안해진다. 간단한 심리분석일 뿐이니까.”
“하하하하하.”
세 사람은 웃으며 북동쪽으로 말을 달렸다.
* * *
오늘도 평화로운(?) 수향루.
후원의 바위에 앉아 눈을 감고 햇볕을 음미하고 있던 진무앙이 전신이 그늘에 가려졌다.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향, 내가 지금 태양의 장엄무쌍한 기를 받아들이면서 무상의 신공을 연마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이럴 때 방해하는 건 무림의 절대금기라구.”
“호.호.호. 절대금기 같은 소리하고 자빠지셨어요. 내 눈에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웅묘처럼 늘어져 있는 걸로 보이는데?”
“난향의 안목은 정말 문제가 심각해. 나의 이 군살 하나 없는 멋지고 탄탄한 몸매를 보고 웅묘가 떠올라?”
“응. 그나저나 눈이나 뜨고 말하는 게 어떨까? 들어올리기 힘들면 말만 해. 내가 눈꺼풀을 잘라줄 수도 있으니까.”
진무앙은 즉시 눈을 번쩍 뜨며 투덜거렸다.
“나 지금 목에 소름 돋았어. 보여?”
“왜?”
“왜긴 왜겠냐? 난향이 말을 너무 이쁘게 해서 그렇지.”
“원하면 말만 해. 더 예쁘게 해줄 수도 있어.”
“하.하.하.하. 하루 한 번만 들어도 넘칠 정도의 호강인데 나도 양심이 있지, 더 바랄 수야 있나.”
“당신한테 양심이 있었어? 처음 알았네.”
진무앙이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했다.
“하루 일 구박 안 하면 하루가 안 가기라도 해? 굳이 아침부터 찾아와서 혼자 잘 놀고 있는 날 구박하는 이유가 뭐야?”
난향은 대답은 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석초하고 소소가 안 보이네? 매일 아침에 여기서 투닥거리는 거 같던데.”
“석초는 일이 있다면서 나갔고, 소소는 수련하고 들어갔어.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야?”
“혼자서만 너무 잘 노는 거 같아서 당신한테 일 좀 시키려고.”
진무앙의 눈이 반짝였다.
“일거리 들어왔어? 진작에 얘기하지. 뭔데?”
마침 섭운룡에게 받았던 잔금까지 떨어져 가던 터였다.
큰집에서 살던 사람이 작은집으로 옮기기 어려운 것처럼, 돈이라는 게 묘해서 한번 씀씀이가 커지면 다시 줄이는 게 쉽지 않다.
난향이 말했다.
“들어왔다기보다… 아무튼, 당신이 수락할지 모르겠네.”
“왜?”
“의뢰자가…….”
“누군데?”
“나야.”
“응?”
진무앙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