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85
085 가자
노군객잔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곽북현의 번화가에서 제일 커다란 객잔이 그곳이었으니까.
진무앙이 현에 들어설 즈음 비가 그쳤다.
사람들에게 물어 노군객잔의 위치를 확인한 진무앙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비슷한 옷을 입고 박도를 찬 다섯 명의 사내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손에 사람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있었는데, 남자가 지나갈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잡고 종이 속 그림과 대조하고 있었다.
“이놈은 아니네.”
“계속 허탕만 치는군.”
“오늘 한 놈이라도 잡아야 하는데.”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며 걷던 그들의 시선이 진무앙에게 꽂혔다.
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수상한 놈이다!”
죽립을 깊이 눌러쓰고, 허리를 덮는 도롱이 아래로 긴 칼이 덜렁거리는 모습.
곽북현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모습이 아닌가.
사내들이 진무앙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중 가장 건장하고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대뜸 손을 뻗어 진무앙의 얼굴을 잡으려 들었다.
“얼굴을 보여라! 수배된 놈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다!”
사내들은 현상금이 붙은 범죄자들을 잡으며 하루를 연명하는 이곳의 파락호들이었다.
진무앙은 피식 웃으며 암월도의 손잡이 끝으로 사내의 손목을 가볍게 쳐올렸다.
툭!
“끄으으…….”
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내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진무앙이 죽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내놈이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네놈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걸 하늘에 감사해라.”
부드럽고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죽립 아래 드러난 그의 눈을 본 사내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뭐야?”
“대형!”
“여기서 싸면 어떡해요!”
“으아, 쪽팔려!”
네 명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사내를 둘러싸 사람들의 눈을 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은 느긋한 팔자걸음으로 노군객잔으로 걸어갔다.
소동이 일어난 곳은 객잔의 바로 앞이었다.
문 근처에 앉아 멀거니 거리를 보고 있던 점소이가 진무앙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르듯이 뛰어왔다.
하지만 곧 그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을 만나기 위해 낙양의 수향루에서 온 무사라는 말을 하자 심드렁한 얼굴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1층의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일다향 정도가 지난 후 화복을 입은 오십대의 배뚱뚱이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가 노군객잔의 주인인 조흠이었다.
그와 인사를 나눈 진무앙은 바로 영채신이 요양하고 있다는 이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영채신은 눈을 꼭 감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잔뜩 찌푸린 창백한 안색과 이마에 송골송골 솟은 식은땀, 그리고 목과 손등에 푸르게 솟은 힘줄.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태가 불량하긴 했지만 영채신은 키가 좀 작다는 점을 제외하면 굉장한 미남이었다.
진무앙이 조흠에게 물었다.
“조 대인, 영 공자가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엿새쯤 되었소. 하루가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걱정돼서 이 낭랑에게 서신을 보내게 된 거요.”
“잘하셨습니다.”
진무앙이 계속해서 물었다.
“서신에 영 공자가 귀신에 홀린 것 같다고 쓰셨던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조흠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문을 힐끔거렸다.
누가 들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밖에 사람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얘기하셔도 됩니다.”
“나는 지금 사람이 내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는 게 아니오.”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귀신이 듣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조흠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약사의 귀신은 영력이 뛰어나 못 듣고, 못 보는 게 없소.”
진무앙은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이곳 사정을 전혀 모르는 터라 대인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군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조흠이 말문을 열었다.
“노군산 입구에서 동쪽으로 이십여 리쯤 가면 난약사라는 절이 하나 있소.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된 폐찰이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그곳을 지나는 젊은 남자들이 행방불명되거나 돌아와도 영 공자처럼 반폐인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소.”
“그게 귀신의 짓이다, 이런 말씀이로군요. 이 정도면 작은 일이 아닌데, 곽북현의 포도아문에서는 그걸 두고 보기만 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포두들이 조사를 하겠다면서 여러 번 난약사에 갔소. 하지만…….”
조흠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무앙이 말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겁니까?”
“그렇소.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아무도 난약사에 가지 않소이다.”
“영 공자는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된 겁니까?”
“이곳에 왔을 때 영 공자의 수중에 돈이 없어 잘 곳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그걸 본 마을 사람 중에 누군가 그를 놀리려 난약사에 가면 공짜로 잘 수 있다고 한 것 같소.”
영채신은 조흠과 난향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면 난약사까지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진무앙이 조흠의 말을 받았다.
“그걸 듣고 영 공자는 난약사에 갔고, 다음 날 돌아왔는데 그 후로 계속 인사불성 상태라는 말이로군요.”
“그렇소.”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영 공자의 상태를 살펴볼 테니 저 혼자 있을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조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영채신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영채신과 함께 있는 건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이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오. 이 낭랑의 얼굴을 봐서라도 협조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 게 있으면 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조흠이 나갔다.
진무앙은 침상 옆에 서서 영채신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가 어떤 상태인지는 파악이 끝난 터라 더 보고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 녀석은 양기를 탈취당해 이 꼴이 됐어. 채양보음을 목적으로 하는 사공을 익힌 여자에게 당한 거 같은데… 특이한 건 이놈이 그걸 당하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거지. 이런 경우는 사공을 펼친 여자가 도중에 채양보음을 중단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데…….’
진무앙은 채영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궁금해졌다.
흥미를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곧 사라졌다.
그는 채영신의 정신만 차리게 하면 되었다.
그것이 난향의 의뢰였다.
그리고 그는 받은 돈만큼만 일을 하면 된다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은퇴 예정 용병낭인이었다.
진무앙은 영채신의 정수리 백회혈과 하단전에 손바닥을 올렸다.
사공에 침습당해 인사불성인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백회혈로 사기를 뽑아내고, 허해진 단전에 양기를 보충하면 된다.
물론, 내력 운용의 섬세함이 절정에 달하지 않은 무인에게는 꿈같은 치료법이긴 하지만.
반각도 지나지 않아 영채신의 볼에 홍조가 돌아왔다.
“아아… 으으음… 소… 천… 소천…….”
영채신의 바짝 말라 쩍쩍 갈라진 입술 사이로 신음과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천? 누구지?’
혼절한 상태에서도 이렇게 찾을 정도니 영채신의 마음에 깊이 각인된 상대일 터였다.
그때 영채신의 눈꺼풀이 바들바들 떨리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는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정신을 차렸다기는 어려웠다.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건 서넛을 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무앙을 본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으으… 누구십… 니까?”
“진무앙. 수향루의 특급 호위무사다. 루주님의 부탁을 받고 네 정신을 돌려놓으려 왔다.”
영채신의 눈이 커졌다.
“이모님이요?”
“그래.”
갑자기 영채신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떠오르더니 일어나려 버둥거렸다.
눈살을 찌푸린 진무앙이 물었다.
“너, 뭐하냐?”
“가야 합니다.”
“어딜?”
“난약사에요.”
“그 몸으로? 그리고 거길 왜 가? 사람들 말을 들으니까 거기서 귀신들려 이 꼴이 되었다고 하던데.”
“섭 낭자가 거기 있어요. 엄청나게 요력이 센 괴물도 있고, 아무한테나 칼을 마구 휘두르는 무서운 검객도 있어서 섭 낭자가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 검객 살인범이에요. 마을에 그를 수배하는 전단이 붙어 있는 걸 봤어요.”
용을 쓰며 꿈틀거리던 영채신은 결국 상체를 일으켜 앉았고, 허겁지겁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모습으로 영채신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진무앙이 투덜거렸다.
“난향은 알까? 이 녀석이 이렇게 여러 가지 하는 놈이라는 걸.”
그가 영채신에게 물었다.
“섭 낭자가 소천이라는 여자냐?”
영채신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네가 비몽사몽 중에 그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다.”
영채신의 몸을 아래위로 훑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몸으로 거기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걸어서 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기어서 가려고?”
후들거리는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일어나던 영채신은 힘이 풀린 듯 다시 쓰러졌다.
털썩!
무인도 아닌 백면서생이 엿새나 누워 있었던 데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몸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식은땀이 얼굴을 뒤덮었고, 목과 손등엔 푸른 힘줄이 지렁이처럼 튀어나와 꿈틀거렸다.
누가 봐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런데도 영채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팔로 상체를 떠받치며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 다가간 진무앙이 손끝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툭 밀었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던 영채신이 신음과 함께 나뒹굴었다.
“어어… 어…….”
쿠다당.
바닥에 큰대자로 누운 그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진무앙을 보며 항의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난약사에 가야 한다고요! 가서 섭 낭자를 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진무앙은 영채신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영채신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급함과 억울함, 그리움이 뒤섞인 물기였다.
흑백이 또렷하고 맑은 눈은 그가 어떤 심성을 가진 남자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했다.
진무앙은 갈등에 빠졌다.
‘이 자식을 내버려 두고 돌아가? 아니면 그냥 낙양으로 끌고 가? 두고 가면 바로 난약사로 갈 게 분명하고… 낙양으로 데려가면… 다시 돌아와 난약사로 가겠지…….’
영채신이 어떻게 할지 눈에 선하게 보이자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났다.
‘그 여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려면 이 자식 눈으로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보게 해주면 될 것 같은데.’
결론은 났지만 영채신을 도울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건 의뢰대금의 범위를 넘어서는 명백한 초과근무였다.
일을 더한다고 난향이 대금을 더 지불할 여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아는 그의 마음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꿈틀거리던 영채신이 둘둘 말린 채 침상 옆에 세워져 있던 누렇게 바랜 족자를 건드렸다.
투툭. 데구르르-
족자가 쓰러지며 펼쳐졌다.
무심코 그것을 본 진무앙의 눈이 커지며 별처럼 반짝였다.
족자 속에는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감고 있는 절세미인이 그려져 있었다.
눈처럼 흰 피부와 오뚝한 콧날, 그린 듯 수려한 눈매.
그 모든 것보다도 한눈에 확 들어오는 길고 짙은 눈썹이 굉장히 인상적인 미인도였다.
진무앙의 마음이 움직였다.
족자 속 여인은 아름다웠지만 그를 매혹시킨 건 그녀의 미모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강렬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영채신이 힘겹게 족자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섭 낭자,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내가 반드시 구해줄게요.”
진무앙이 그에게 물었다.
“족자 속 그 여자가 섭소천이냐?”
“예.”
진무앙의 갈등은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끝이 났다.
“가자.”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던 영채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어딜…….?”
“난약사.”
진무앙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영채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래. 이 낭랑의 부탁도 있고, 또 내가 정이 많고 의로운 성격이라 남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못 본 척하지 못하거든.”
난향이 들었으면 바로 입술에 침이나 바르라고 했을 테지만 영채신은 진무앙이 어떤 남자인지 모른다.
“감사합니다.”
진무앙은 영채신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앞으로 날 진 호위님이라고 불러라. 난 널 채신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먼저 뭐라도 먹자. 기력이 있어야 섭 낭자를 구하러 갈 수 있을 것 아니냐.”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