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89
089 남자라서 죄송합니다
진무앙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죄송합니다, 사숙. 제 능력이 모자라 그들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능력이 닿는 대로 최대한 많이 구하려 노력하긴 했지만…….”
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음양반인귀와 음혼마군의 사술이 특출나긴 해도 전진의 파사신공과 네게 인연이 닿은 보타암의 법술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음양반인귀가 도주한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며 계속해서 물었다.
“음혼마군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음양반인귀를 보니까 그들이 남자들에게서 탈취한 양기로 단전을 꽤나 많이 복구했다는 걸 알겠다. 하지만 그 상태로 너와 호각으로 싸워왔다는 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연적하가 힘없이 머리를 푹 떨구었다.
진무앙이 손가락으로 그의 정수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냐. 나름 최선을 다했던 것 같은데. 사정이 있어 보인다. 그게 뭔지 말해봐라.”
연적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갑자기 난약사의 사기가 강해지면서 제 법술을 방해해기도 했지만 제자가 어리석어 본교의 비전을 극한까지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제거하지 못한 겁니다.”
“두루뭉술 넘어가지 말고. 사실을 말해라.”
연적하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스승님께서 급작스럽게 등선하셔서 저는 본교 제마법술의 정수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연적하를 보는 진무앙의 눈에 안쓰러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동안 네 스승을 구하지 않은 날 많이 원망했겠구나.”
연적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왜 사백을 원망하겠습니까! 스승님께서도 사백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백 덕분에 천하를 덮었던 재앙이 사라졌다고 하셨고, 웃으며 등선하셨습니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진무앙에게 연이어 물었다.
“그런데, 사백, 변방에 계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대혼돈 시대가 저문 후 변방을 떠도는 사백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천하가 내 집인데, 중원과 변방이 따로 있겠냐. 발길 가는 대로 살았다. 피곤하면 쉬고, 기운을 차리면 또 걷고, 그렇게……. 십오 년쯤 전에는 중원에도 왔었다. 잠깐이긴 했지만, 흐흐흐.”
“이곳에 들르시지 그러셨습니까.”
“네 얼굴 보러?”
“예.”
“미친놈. 내가 얼마나 바빴는데 널 보려고 여기까지 오겠냐. 네가 절세미인이라면 몰라도.”
“남자라서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용병으로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
진무앙의 대답에 연적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요… 용병이요? 사백이 그 일을 하셨다고요?”
“왜? 이상하냐? 사람들은 나보고 용병이 천직이라고 하던데.”
“허……!”
“나 그 계통에서 꽤 유명해, 임마.”
“별호라도 있으십니까?”
“응.”
“뭡니까?”
“몇 개 있는데 제일 유명한 건 아마 혈수광랑일 거다.”
연적하의 안색이 확 변했다.
“혈수… 광랑? 설마 변황무림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그 미친 살인귀 혈수광랑이 사백이시란 말입니까?”
“미친 살인귀?”
연적하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내가 너한테 헛소리하겠냐? 미친 살인귀는 모르겠고, 혈수광랑이 나인 건 맞다.”
말을 하며 진무앙은 쓰게 웃었다.
천하에 그의 별호를 아는 사람은 넘치도록 많았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이름을 아는 사람도 그가 별호의 인물과 동일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연적하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연적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남자하고 회포를 푸는 취미 없다는 거 너도 알지?”
“……예.”
“전진법술의 정수를 배우지 못해서 유명전의 떨거지들을 제압하지 못한 거라고 했지?”
“예.”
“정수를 배우면 저들을 제압할 수 있고?”
“물론입니다.”
“그렇다 이거지……. 좋다. 그럼 내가 그걸 가르쳐 주마. 배워서 그놈들을 잡아봐.”
연적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예? 사백이 그걸 알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진무앙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왕철이 그거 만들려고 머리 싸매고 끙끙거릴 때 옆에서 조언해 줬던 사람이 나야, 임마.”
“예? 하하하. 사백도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선사께서는 조사야님과 함께 본교의 제마법술을 만드신 분은 고금십대고수 중의 한 분인 절대무존이라고 하셨습니다.”
연적하는 진무앙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왕철은 수백 년 전 전진교를 창시한 개파조사 중양자 왕중양이 도교에 귀의한 후 바꾼 이름이다.
진무앙은 연적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말했다.
“네게 가르칠 건 용소구천술이다.”
연적하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진무앙에게 넙죽 엎드려 절하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백, 정말 용소구천술을 알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배우기 싫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것만 배울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진무앙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용소구천술은 방어수법인 만검귀종, 공격수법인 신검복요, 마지막으로 광역이동기법인 어검비행술로 이루어진다. 구결을 말해줄 테니 외워라. 자세 바로 하고.”
결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연적하의 귀가 쫑긋 섰다.
그를 보는 진무앙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철우(鐵牛), 네 제자도 너만큼이나 고지식하고 성실하구나. 내가 이놈에게 전진의 도맥을 이어주는 건 다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이 녀석 걱정은 하지 말고 도솔천에서 태상노군하고 속 편하게 노닥거려도 돼.’
그가 중얼거린 철우라는 이름은 전진교의 마지막 교주로 알려진 철우 진인을 가리켰다.
철우 진인은 대혼돈시대의 대미를 장식했던 개벽대전에서 사망했다.
진무앙의 입술 사이로 용소구천술의 구결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천지정명 예기분산…….”
그의 음성에는 아득한 옛날에 실전되어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어진 심인지법(心印之法)이 포함되어 있었다.
심인지법은 말이나 글, 그림에 시전자의 혼을 담아 전수하는, 무공의 차원을 뛰어넘는 초상승의 공부였다.
심인지법이 포함된 것을 보거나 듣게 되면 마음에 각인됨과 동시에 깨달음까지 진행된다.
염화미소, 이심전심, 일이관지와 같은 말이 나오게 만든, 고대 초월자들이 자신의 심득을 후계자에게 전하던 신비로운 기법이 심인지법이었다.
반각 후.
연적하가 눈을 떴다.
반각 전과 달리 그의 눈에는 현묘한 신광이 그윽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가 혼이 저 멀리 구천으로 달아난 표정으로 진무앙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백… 제자의 용소구천술 성취가 구성을 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배우자마자 구성의 성취라니.
무림사에 드문 초천재라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 그가 넋이 나갈 만했다.
진무앙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받아들여. 네놈의 머리로는 내 신비로움을 감당할 수 없다니까 그러네.”
그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그 떨거지들 잡으러 가자.”
“예, 사백!”
힘차게 대답한 연적하도 일어났다.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 섭소천이 정신을 잃은 영채신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나왔다.
그녀를 본 연적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너는… 반인귀의 못된 제자 년이로구나!”
말을 하던 그는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진무앙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적하가 입을 다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진무앙은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섭소천에게 물었다.
“섭 낭자, 안에 있으라고 했는데 왜 나왔소?”
그가 섭소천에게 반존대를 하는 걸 본 연적하의 얼굴에 놀람과 의혹의 기색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섭소천은 두려운 표정으로 연적하를 힐끗거리며 진무앙에게 물었다.
“진 소협, 전주와 사부님하고 싸우러 가시려는 건가요?”
진무앙과 연적하는 단음강벽을 펼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섭소천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분위기를 보고 두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연적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소… 소협? 이 요녀가 감히 누구에게!”
그때 진무앙이 손바닥으로 그의 뒤통수를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퍽!
“입 닥쳐, 이 자식아!”
난데없는 일격이라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은 연적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렸다.
“사백… 왜 이러……?”
진무앙이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귓구멍에 말뚝 처박았냐? 닥치라고 했잖아.”
“읍… 읍……”
[임마, 섭 낭자 앞에서 한 번만 더 사백 어쩌고 하면 턱뼈를 뽑아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라!] [예… 사백…….]움찔한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무앙은 즉시 손을 뗐다.
“아… 드러……. 사내놈 입에 손을 대다니, 내 인생의 오점이다. 석초가 알까 무섭네…….”
진무앙은 투덜대며 손바닥을 연적하의 상의에 쓱쓱 닦았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섭소천에게 말했다.
“섭 낭자의 말이 맞소. 우리는 그놈들을 제거하러 가려던 참이오.”
섭소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럼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귀문관 내부의 길은 수시로 변화무쌍하게 바뀌어요. 제가 그 길을 아니, 두 분께 도움이 될 거예요.”
진무앙과 섭소천의 눈이 허공의 한점에서 뜨겁게 부딪혔다.
사실 그에게 섭소천의 도움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진법 조예는 높지 않았지만 몇 가지 진법은 예외적으로 엄청나게 해박했다.
그리고 그 예외에 천살귀문진이 해당되었다.
예전에 그가 한번 파훼했던 적이 있는 진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큰 섭소천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건 그녀의 눈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떻게든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절절한 마음과 자신에게 참혹한 악행을 강요했던 자들에 대한 원한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섭소천은 그의 여자였다.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관계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가 아닌가.
그가 섭소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소. 섭 소저가 그렇게 바란다면 같이 갑시다.”
섭소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바람처럼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연적하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사백, 저 애물단지를 왜 데려가시려고……?] [애물단지? 반인귀보다 먼저 죽고 싶은 거냐? 원하면 말만 해. 바로 목을 꺾어주마.]섭소천의 손을 잡으며 째려보는 진무앙의 눈에서 번뜩이는 살기를 읽은 연적하가 질겁하며 말했다.
[헉… 사백,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말이 헛나온 겁니다!]그는 허겁지겁 전진교의 장문령부인 보천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용소구천 어검비행!”
눈부신 금빛 광채에 휩싸인 보천검이 눈 깜박할 사이에 세 개로 늘어나더니 나란히 허공에 둥둥 떴다.
그것을 본 연적하의 얼굴에 감격한 기색이 떠올랐다.
섭소천은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어떠냐는 표정으로 진무앙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기가 충만한 곳이라 그런지 용소구천술이 제대로 발휘됩니다, 사백!]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방금 배운 사문의 최강법술을 써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것 같았다.
“하하하하하!”
연적하의 마음을 짐작한 진무앙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최상의 법술은 사기(邪氣)와 요기(妖氣)가 늪처럼 고여 있는 곳이어야 펼칠 수 있었고, 또 진정한 위력을 발휘했다.
난약사에는 천살귀문진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진법은 좌도방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주변의 사악한 기운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진이었다.
그래서 난약사 전체는 사기로 가득 차 있었고, 덕분에 연적하는 용소구천술을 온전히 펼칠 수 있었다.
즉, 사기가 없는 곳에서 전진교의 제마법술은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진무앙은 섭소천의 허리에서 영채신을 빼앗아 들었다.
섭소천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소협, 왜…….?”
“이렇게 내가 옆에 있는데 섭 낭자가 다른 남자를 안고 있어야 되겠소?”
말을 하며 그는 영채신을 검신 하나에 툭 걸쳐 놓았다. 그리고 강인한 팔로 섭소천의 허리를 안고 보천검의 검신에 올라탔다.
섭소천이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연적하가 검신에 걸쳐진 채 축 늘어져 있는 영채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젊은이도 데려가실 겁니까?”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자. 저 친구를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게 놓은 게 있다.”
“알겠습니다.”
검신에 올라탄 연적하가 주문을 외우듯 소리쳤다.
“난다요!”
세 사람을 태운 보천검이 유성처럼 어두운 허공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