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96
096 변명이 휘황찬란하네
“불꽃놀이 잘 봤어. 담을 넘으려고 아주 용을 쓰던데, 보는 재미가 쏠쏠했어.”
한 손엔 장죽, 한 손엔 찻잔을 든 난향이 활짝 웃으며 진무앙을 맞았다.
“그 관음증, 진짜 악취미야. 조심해.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미친년 소리를 듣게 된다구.”
진무앙이 투덜거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난향이 가볍게 눈을 흘기며 말을 받았다.
“새삼스럽긴. 당신 지론이 ‘남녀불문하고 무공 익힌 것들 중에 제정신 가진 것들 없다’ 아니었어?”
“그 미친 거하고 변태관음증으로 미친 거하고는 질이 완전히 달라.”
“당신은 어쩜 그렇게 아무 말이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을 수가 있어?”
“부러워? 그럼 난향도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던가.”
“당신처럼?”
“그래. 나처럼.”
“사양하겠어.”
“왜?”
“천하에 부러워할 인생이 없어서 풍잔노숙하며 천하를 떠도는 당신을 부러워하겠어?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요새 이슬 맞으며 노숙하면 삭신이 쑤셔.”
진무앙이 갈고리처럼 굽은 열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쑤신다고? 지압해 줄까? 내가 그거 하나는 진짜 잘하잖아.”
“그것도 사양하겠어.”
“또 왜?”
“당신이 지압만 하지 않을 걸 아니까.”
진무앙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지압 말고 뭘 한다는 건데? 나도 모르는 걸 난향이 어떻게 알아!”
“입술에 침 발라.”
진무앙은 반사적으로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한 그가 움찔하며 말했다.
“이거, 난향이 시켜서 한 거야. 내 본심이 아니라고.”
“한번 더 침 바를래?”
난향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진무앙의 척추에 힘이 빠졌다.
“아니…….”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향이 화제를 바꾸었다.
“채신이의 서신은 벌써 며칠 전에 도착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늦었어?”
“알면서…….”
“백지 때문에?”
“응.”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지가 세월이 흐른다고 포기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왜 야반도주를 한 거야?”
“백지 성격을 잘 아니까 했지, 왜 했겠어.”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얘기해 봐.”
“난향도 백지가 두 가지를 동시에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거 알지?”
“알아.”
“화기와 무공에 대한 백지의 재능이 몰락한 벽력당을 재건하고도 남을 정도였다는 것도 알지?”
“물론.”
“내가 백지의 옆에 계속 있었으면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진무앙의 질문을 받은 난향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지금 당신이 백지를 떠난 게 그녀를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거야?”
진무앙은 길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흐아… 내 옆에 있었으면 백지의 재능은 평범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에서 멈추었을 거야. 아까도 말했잖아. 백지는 날 사랑하면서 화기 연구와 무공 수련을 위한 폐관을 병행할 수 있는 성격이 못돼.”
“실전된 벽력당의 비전을 백지에게 전해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거야? 당신이 그걸 가르치지 않았으면 백지가 가문의 비전을 수습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냐고.”
“…….”
“백번 양보해서 당신 말이 맞다고 쳐. 그럼 떠나기 전에 걔한테 당신과 벽령당의 재건 중에 어느 쪽을 택할 건지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진무앙이 졸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답이 나와 있는 걸 물어봐서 뭐 해?”
난향은 말문이 막혔다.
부인하고 싶었지만 진무앙의 말이 옳았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연백지는 진무앙의 이름을 듣자마자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았나.
그녀는 그를 폭사시켜 버리겠다고 방방 뜨고 있었지만, 그런 미움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이런 지경이니 당시에 연백지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그녀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진무앙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하품 때문에 찔끔 배어 나온 눈가의 물기를 손끝으로 털어내며 진무앙이 말을 이었다.
“백지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가문을 자랑스러워했는지 난향도 알잖아. 그녀가 내 옆에 있었다면 엄청나게 괴로워했을 거야. 그 미친놈에게 몰살당한 가족의 염원을 저버리고 벽력당의 재건을 외면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난향이 진무앙을 째려보며 말했다.
“처녀가 아이를 가져도 할 말이 있다더니. 변명이 휘황찬란하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루주님.”
말을 한 진무앙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밀었다.
난향이 물었다.
“뭐야?”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대금을 주셔야지. 설마 떼먹으려는 건 아니지?”
난향은 혀를 차며 전낭에서 은자를 꺼내 진무앙에게 건넸다.
그의 눈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영채신 건의 의뢰대금은 총 오십 냥이었고, 난향은 출발하기 전에 선불로 이십 냥을 줬었다.
그러니 그는 삼십 냥을 받아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어온 돈은 스물여덟 냥이었다. 두 냥이 비는 것이다.
그가 물었다.
“난향, 계산이 잘못된 거 같은데? 삼십 냥을 받아야 하는데 왜 달랑 스물여덟 냥만 줘?”
난향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아까 당신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담장을 넘으려고 했어?”
진무앙은 뻔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향루의 담장 안으로 들어와야 백지가 공격을 안 할 테니까.”
“맞아. 이곳은 당신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확실한 안전지대야. 그렇지?”
진무앙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얼마나 난향한테 고마운데.”
“세상에 공짜가 어딨겠어?”
“응?”
“안전한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설마… 난향, 나한테 돈을 받겠다는 거야? 농담이지?”
“나는 장사꾼이야. 돈거래에 농담 같은 거 안 해. 당신은 이곳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해. 액수는 하루에 한 냥.”
“헉!”
진무앙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난향, 나한테 왜 이래? 너무하잖아.”
“너무할 거 하나도 없어. 백지가 이곳에 머문 건 열흘이지만 당신과 함께 있었던 건 첫날과 오늘 이렇게 이틀뿐이라 두 냥을 뺐어. 당신 월봉 줄 때 안전 비용은 공제하고 나갈 거니까 기억해 둬.”
진무앙이 흥분한 얼굴이 되어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내 월봉이 은자 다섯 냥인데… 안전 비용이 하루 한 냥이면 한 달에 삼십 냥… 숨만 쉬어도 매달 스물다섯 냥의 빚이 불어난다는 건데, 그게 말이 돼? 난 뭘 먹고 살라는 거야?”
난향은 장죽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며 한가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싫으면 때려치우고 나가든지.”
진무앙의 기세가 확 꺾였다.
이곳을 나가면 당장 오늘부터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소소와 함께 풍잔노숙을 해야 했다.
게다가 따라 다니면서 오대금용화탄을 마구 던져댈 게 뻔한 연백지는 또 어쩌고.
아무튼 호위무사를 때려치우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건 아니고… 그래도 먹고살 수는 있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요, 루주님?”
세상에 이런 갑질이 또 있을까 싶었지만, 지금은 성질대로 행동할 때가 아니었다.
슬프게도(?) 애가 딸리면 남자는 오늘만 살기 어려워진다.
이건 진리다.
연기로 동그라미 세 개를 한꺼번에 만든 난향이 말했다.
“월봉의 절반은 줄게. 숙식은 제공하니까 당신이 술만 조금 줄이면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나머지 안전 비용은 따로 의뢰 들어오는 게 있으면 거기서 제하는 걸로 하고. 어때?”
진무앙은 이러다 생활력이 강한 남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난향이 턱에 손을 괴고 진무앙을 빤히 보며 물었다.
“당신, 정말 많이 변했다.”
진무앙이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뭐가?”
“예전 같았으면 벌써 다 때려치우고 훌쩍 떠났을 텐데, 지금 참고 있잖아.”
“사정 잘 알면서. 비실비실한 꼬맹이 데리고 밖에서 백지를 피해 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진무앙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난향이 살짝 고개를 모로 꼬며 말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도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믿어. 믿으면…….”
“믿어도 복 안 오니까 그 말 하지 마.”
“췟!”
난향의 눈빛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해졌다.
그녀가 말했다.
“백지가 설사 벽력당의 최종 화기인 벽력멸절뇌룡을 발동시킨다 해도 당신 피부에 작은 화상이나 입힐 수 있겠어? 그리고 코앞에서 수십만이 죽어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당신이 소소의 건강을 걱정한다고? 웃을까?”
“…웃지 마.”
“돈 문제도 그래.”
“그건 또 뭐가?”
“억만금을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곳이 가까이에 있는데, 당신은 다섯 냥, 열 냥에 절절매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억만금을 어디서 얻어?”
“금적산 대인의 무덤이 섬서성 서안에 있잖아.”
난향의 말에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난향이 말을 이었다.
“당신 성격에 변방에 있었다면 귀찮아서 그곳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여기는 그곳과 천 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낙양이야.”
진무앙이 인상을 썼다.
“천 리가 가까워? 그리고 나보고 그 자식 무덤을 도굴이라도 하라는 거야?”
“당신이 무덤에 들어오면 금 대인은 기꺼이 웃으며 안에 있는 것들 전부 가져가라고 할걸?”
“살아 있는 사내놈도 별론데 죽은 놈 집엘 정신 사납게 왜 기어들어 가? 일 없어.”
“…솔직히 말해봐. 왜 참는 거야?”
“난향, 진지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려는 한 남자의 진심을 의심하지 마.”
가만히 진무앙을 바라보던 난향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며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결국 웃음이 터졌다.
“…풋! 호호호호호호호! 내가 오래 살긴 했나 보다. 당신 입에서 그런 정상적인 말이 나오는 걸 다 듣고.”
진무앙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난향을 똑바로 보았다.
무저갱처럼 깊고 태양처럼 강렬한 눈빛.
조금씩 난향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진무앙이 난향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정말 알고 싶어?”
난향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무앙이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말했다.
“네 곁에 계속 있고 싶어서. 진심으로. 그뿐이야.”
난향의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크게 흔들렸다.
“갈게.”
진무앙은 일어섰다.
난향은 그를 잡지 않았다.
밤이 왔지만 밖은 환했다.
수향루의 장사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 * *
후원 별채로 향하는 청석로를 걸으며 진무앙은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슬쩍 난향의 거처를 올려다보았다.
‘난향이 내가 한 말을 믿을까? 의심이 많아서 쉽게 믿지 않을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좀 믿어주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질문 공세라고! 대답하려면 생각을 해야 하잖아.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난향, 내 생각 없이 사는 일상에 딴지 좀 걸지 말아줘!’
후원의 월동문을 지나자 별채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 * *
난향의 거처.
난향은 창에 드리운 주렴 뒤에 서서 후원으로 멀어지는 진무앙의 등을 보고 있었다.
장죽을 입에 문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의 마지막 말은… 솔직히 믿을 뻔했어. 너무 진지해 보이는 눈빛이었거든. 칭찬해. 당신 연기력 정말 많이 늘었네…….”
장죽을 몇 모금 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당신, 잊었나 봐. 당신이 진심을 드러낸 날엔 언제나 나를 안았었다는 걸…….”
돌아서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시 한 구절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인도해수심(人道海水深).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고 말하지만,
부저상사반(不抵相思半).
내 그리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해수상유애(海水尙有涯).
바닷물은 그래도 끝이 있다지만,
상사묘무반(相思渺無畔).
아득한 그리움은 한이 없구나…….
여도사이자 시인이었던 이야가 쓴 상사원(相思怨)의 한 구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