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97
097 살 수가 없다, 진짜!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연백지가 뛰어들어 오더니 거두절미하고 소리쳤다.
“오늘도 안 나가?”
목침을 끌어안고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을 자던 진무앙이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며 투덜거렸다.
“백지야, 꼭두새벽부터 어딜 나가라는 거야! 너, 이러는 거 며칠째인 줄 알아? 나, 잠 좀 자자. 새벽까지 일했다고!”
연백지가 이불을 확 잡아당기며 말했다.
“꼭두새벽? 해가 중천에 떴어, 인간아!”
진무앙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태양의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지 마. 지금 시간이 진정삼각(辰正三角:8시 45분경)인데 어떻게 해가 중천에 떠!”
무공이 일정한 경지를 넘어서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몸이 먼저 정확한 시간을 알아차린다.
물론 극소수의 초절정고수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림인은 그 경지 근처도 못 가보고 죽지만.
연백지가 한 대 쥐어박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에 노을빛 서기가 어리며 무시무시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진무앙이 말했다.
“백지야, 벽력천화강을 펼치기 전에 난향의 얼굴을 떠올려 봐. 도움이 많이 될 거다.”
벽력천화강의 기운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연백지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는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앙은 목침을 끌어안고 벽 쪽으로 더 몸을 밀착시켰다.
연백지가 손가락을 세워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말로 할 때 일어나지?”
진무앙이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향루 안에서 말로 안 하면 어쩔 건데?”
연백지가 손톱을 바짝 세우고 진무앙을 노려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하으으…….”
그녀의 앓는 신음을 들은 진무앙이 짜증을 냈다.
“아침부터 내 침상에서 이상한 신음소리 내지 마. 잠 깬다고!”
그의 말을 들은 연백지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녀는 상체를 숙여 진무앙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부드럽게 숨을 불어 넣었다.
“하아… 하아…….”
후다다닥!
꿈쩍도 안 하던 진무앙이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으아아아! 잠 좀 자자구! 백지야!”
연백지가 살벌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제 일어났네.”
“내가 목석이냐?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계속 잠을 자냐구!”
“잠 못 자게 하려고 그런 거거든!”
연백지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소소하고 아침 같이 먹으려면 이제 일어나야 하잖아. 빨리 일어나서 밥 먹고 같이 북부대로 구경하러 가자, 응?”
살벌한 미소를 지은 얼굴과 달리 그녀의 말투는 사근사근했다.
진무앙이 그녀를 째려보며 말했다.
“꼬시지 마. 아침 댓바람부터 썰렁한 북부대로에 뭐 볼 게 있다고 구경을 가? 그리고 구경만 할 것도 아니잖아.”
구경은커녕 틈만 나면 던져대는 화탄을 피하느라 생난리를 치르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연백지가 진무앙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이듯 말했다.
“구경만 할게. 약속한다니까. 나 못 믿어?”
“믿겠냐?”
“음…….”
그때 문이 빼꼼히 열리며 소소의 작은 얼굴이 나타났다.
아이가 진무앙과 연백지에게 물었다.
“숙부님, 이모님, 싸우시는 거예요?”
후다다닥!
진무앙과 연백지는 바람처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연백지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소소에게 말했다.
“싸우긴 누가 싸워. 무앙이 안 일어나기에 깨우느라 그런 거야.”
진무앙도 한숨을 내쉬며 소소에게 한마디를 했다.
“꼬맹아, 이 아줌마는 이모가 아니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네가 그렇게 부르면 나하고 백지하고 촌수가 이상해진단 말이다.”
소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이상해지는데요?”
진무앙은 대답이 궁해졌다.
연백지와 그의 관계를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게 있다.”
그 순간, 소소의 머리 위로 강석초의 통통하고 둥글둥글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가 진무앙에게 물었다.
“그런 게 어디에 있는데?”
“후우… 이것들이 아침부터 작정했나. 왜 단체로 지랄들이야…….”
연백지가 한숨을 쉬며 투덜거리는 진무앙을 구박했다.
“애도 듣고 있는데 지랄이 뭐니, 지랄이!”
진무앙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제는 말도 못 하게 하네!”
강석초가 소소의 어깨를 잡아당기는 한편, 연백지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연 낭랑, 같이 아침이나 먹으러 가요. 저 인간이 발광할 때는 혼자 두는 게 나으니까요.”
연백지가 뒷걸음질로 진무앙과 거리를 벌리며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진무앙은 모자란 잠을 마저 자야겠다며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정원에 남은 연백지와 강석초는 소소의 권법 수련을 지켜보았다.
연백지가 도착한 후 벌써 열흘을 훌쩍 넘게 반복되고 있는 일상이라 특별할 게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소소를 보는 연백지의 눈빛은 특별했다.
“저 아이, 매일이 다르네.”
“소소는 무공 천재입니다, 연 낭랑.”
연백지를 대하는 강석초의 태도는 무앙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세상에 이렇게 깍듯할까 싶을 정도.
그는 난향에 비견될 정도로 사나운 연백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연백지는 고개를 저었다.
“석초야, 저 아이는 천재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 있는 재질이 아니야.”
그녀가 강석초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앙이 저 아이의 자질을 못 알아보았을 리 없는데, 별말 없었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수련하게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때 수련을 끝낸 소소가 송골송골 땀이 솟은 얼굴로 다가왔다.
강석초가 들고 있던 수건을 소소에게 건네며 말했다.
“소소야, 닦아.”
수건을 받은 소소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작은 숙부님.”
연백지가 수건으로 얼굴과 목의 땀을 닦은 소소에게 물었다.
“소소야.”
“예, 이모님.”
“너, 무공을 정식으로 배우고 싶지 않니?”
소소의 눈이 반짝였다.
“배우고 싶어요.”
“내가 가르쳐 줄까? 나한테 배우면 천하에서 너를 위태롭게 할 사람은 거의 없게 될 거야.”
소소는 기대에 찬 연백지의 눈을 보며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죄송해요. 저는 이모님께 무공을 배우지 않겠어요.”
똑 부러지는 거절이다.
연백지의 눈이 커졌다.
“아니, 왜?”
“진 숙부님이 가르쳐 주시는 게 아니면 배우고 싶지 않거든요.”
“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거 별로 좋은 생각 같지가 않은걸. 그 인간이 가르칠 마음이 있었으면 벌써 가르쳤을 거거든.”
“숙부님이 안 가르쳐 주시면 그것도 좋아요.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것일 테니까요.”
강석초가 끼어들어 한마디를 했다.
“소소야, 그 인간을 두 달 가까이 옆에서 지켜봤으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 무앙은 생각이라는 걸 하며 사는 인간이 아니야.”
소소는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강석초가 주먹으로 퉁퉁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답답하네. 소소야, 이건 네게 엄청난 기회야. 연 낭랑에게 무공을 배우는 건 무공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연이라구.”
소소는 여전히 웃으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씀과 배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소소가 수건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작은 숙부님, 이건 빨아서 돌려 드릴게요.”
별채로 들어가는 소소의 작고 여린 등을 바라보며 연백지가 고개를 저었다.
“고집 센 아이네.”
“놀랄 정도로 심성이 반듯한 아입니다.”
“아까워. 가르치면 열다섯이 되기 전에 절정지경에 발을 딛고도 남을 자질인데…….”
“포기하지 마시죠.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아이 아닙니까.”
연백지가 강석초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저 아이와 내가 사제의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이어지겠지.”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석초야.”
“예.”
“네 형제들도 알아? 무앙이 여기에 있다는 거?”
강석초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알면 벌써 들이닥치고도 남았을 겁니다.”
연백지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 그랬겠지.”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런데, 석초야.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무앙이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 뻔히 알면서도 이곳으로 돌아온 것.”
강석초는 쓰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는 사람이라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아이 때문일 리는 없고… 각방 쓰는 걸 보면 언니에 대한 미련 때문도 아닌 것 같고…….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너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아?”
강석초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릅니다. 저 인간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연백지는 순순히 수긍했다.
“하긴 그래. 누가 무앙의 속을 알겠어…….”
말을 하던 그녀의 눈썹 끝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뭘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저 인간 뱃속에 굉천뢰를 잔뜩 밀어 넣지 않으면 내 화병이 낫지를 않을 텐데!”
강석초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위험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열받으면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은 연백지도 진무앙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별채.
목침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던 진무앙이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똑.
“숙부님, 소소예요.”
“들어와라.”
소소가 들어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진무앙도 침대 턱에 걸터앉았다.
아이는 머뭇거리기만 하며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진무앙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입 다물고 있어?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냐?”
소소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조금 숙이며 입을 열었다.
“숙부님…….”
“말해라.”
“……왜 저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으세요?”
진무앙이 눈을 꿈벅이며 되물었다.
“뭘?”
“‘그것’에 대해서요. 제가 ‘그것’ 너머를 보는 능력이 있어서 데리고 계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묻지 않으세요?”
“물어봐야 하는 거였냐?”
“알고 싶어 하시잖아요. 그럼 저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 몸이 좀 더 건강해진 다음에 생각할 일이야.”
“빨리 알고 싶은 거 아니셨어요?”
“빨리 알고 싶지.”
“그럼 제 몸에 좀 무리가 되더라도 ‘그것’ 너머를 보는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아서라. 닭의 배를 가른다고 계란이 나오는 거 아니다.”
진무앙이 손을 들어 소소의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꼬맹아, 너의 ‘빨리’와 나의 ‘빨리’는 단어만 같을 뿐, 개념은 완전히 달라.”
소소가 똘망똘망한 눈을 들어 진무앙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요?”
아이의 눈을 담담하게 받으며 진무앙이 대답했다.
“내 시간은 멈춰 있거든. 그래서 나의 ‘빨리’는 바로 다음 순간이 될 수도 있고, 네가 늙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일 수도 있어. 네게는 엄청난 시간의 차이겠지만 내게는 지금이나 그때나 차이가 없어.”
소소의 깨끗한 이마에 가느다란 주름살이 여러 개 생겨났다.
고민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
아이는 진무앙의 말을 알아들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냥 지금처럼 살면 된다. 때가 되면 네가 좋든 싫든 나는 움직일 테니까. 알았냐?”
알 리가 있나.
그래도 소소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숙부님.”
“가서 쉬어라.”
소소가 나가자 진무앙은 목침을 끌어안고 벌러덩 누우며 투덜거렸다.
“아으으으… 이제는 꼬맹이까지 질문 공세네. 살 수가 없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