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비워진 그림
사이먼 휴즈 자작이 경제 얘기를 떠들 때는 시큰둥하던 친구들이 도박이 시작되려 하자 눈빛이 돌변했다.
아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려 애를 썼다.
‘사이먼의 주의를 끌기 위해 과장된 표정으로 계속 쓸데없는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네. 전형적인 바람잡이 패턴… 정말 사기 도박단인가?’
도박은 휘스트(Whist)라는 게임이었다.
총 4명이 자리에 앉아서 두 명끼리 한 팀이 되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클럽에서 매우 흔하게 하는 카드 게임이었다.
그렇게 도박이 시작되고….
‘……?’
처음 몇 판은 평범하게 돌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사이먼 휴즈를 제외하고 테이블에 앉은 3명은 물론, 주위에 서 있던 친구들까지 서로 간에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노골적으로 포착됐다.
‘뭐야? 게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거기다 저 모습들은 뭐지? 전문적인 도박 사기꾼들이 아니잖아?’
사이먼의 상대편이 된 두 사람은 물론, 같은 편이 된 친구까지 은밀한 눈빛을 쉴 새 없이 주고받았다.
누가 봐도 짜고 치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났다.
문제는 사이먼이었다.
사이먼 휴즈 자작은 카드 게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들의 이런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태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대단한 사기도박도 아니었어. 아주 수준 낮은 눈속임에 불과했네. 휴즈 자작을 호구로 잡고서 친구들끼리 이용해 먹고 있었던 거야.
제법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 저런 허술한 일에 당하다니…. 친구라고 너무 믿고 있는 데다, 초기에 비기너스 럭이 길었던 게 화근이었던 건가?’
도박 중독은 보통 비기너스 럭(Beginner’s Luck)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즉 새로운 게임을 막 시작하자마자, 일이 잘 풀리면서 행운이나 성공을 빨리 맛보게 되는 경우, 처음에 맛본 짜릿함을 잊지 못해 좀 더 빨리 중독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명석하고 운까지 따랐던 사이먼은 처음 도박에서 좋은 성공 경험을 많이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연달아 터지면서, 스스로 굉장히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큰 성취감을 맛보았으리라.
그렇게 취미와 재미로 시작하였던 도박은 따분하게 살던 사이먼을 자극하면서 더 큰돈에 대한 목표 의식까지 생기게 했다.
이에 비해 계속 돈을 잃게 된 친구들은 어느 순간부터 한패가 되었고, 속임수를 써서 사이먼의 돈을 뺏으면서 전혀 다른 재미를 들였던 것 같다.
‘더 이상 볼 필요도 없겠군.’
태오는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켜고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며칠 뒤. 런던 웨스트민스터, 휴즈 백작의 타운하우스.
태오는 회사의 정보조사관인 그레고리 도슨을 통해 사이먼 휴즈 자작과 어울리고 있는 친구들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곧 그 조사 결과가 나오고 그들의 의심스러운 돈의 행방이 확인되자마자, 태오는 휴즈 백작에게 방문 의사를 통보했다.
연락을 받은 크리스토퍼 휴즈 백작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타운하우스로 태오를 불렀다.
워- 워-
마차가 웨스트민스트 궁전 주변에 있던 휴즈 백작의 타운하우스 건물 뒤로 들어가자 저택과 연결된 중정이 나타났다.
마차에서 내린 태오가 건물을 둘러보았다.
‘와- 현대로 따지면 거의 중급 호텔 규모겠어.’
휴즈 백작의 타운하우스는 명망 있는 귀족들이 모여 사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주변에 있었다.
비록 시골의 대저택에서처럼 드넓은 정원은 없었지만, 건물 자체는 주위의 명성 높은 귀족 집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외장재가 진짜 빨간 벽돌이네….’
런던에서 진짜 벽돌은 그 집안의 부(富)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보통 타운하우스의 겉면은 석회와 대리석 가루, 점토 등을 섞어 흰색의 돌처럼 보이도록 칠해 놓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런던에서 채석장까지의 거리가 너무 먼 관계로 진짜 벽돌과 돌을 사용해 짓기에는 운송비가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붕이 덮인 그리스 신전 형태의 길을 지나자 현관문이 나타났다.
태오가 도어 노크를 두드렸다.
텅- 텅- 텅-
마중 나온 집사의 안내를 받은 태오는 거실에서 잠시 기다렸다.
거실 주변을 둘러보니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많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초상화는 물론 풍경화나 신화의 한 장면을 담은 그림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벽 곳곳에 걸려 있었다.
휴즈 백작의 경직된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백작 부인이 미술에 관심이 많은 것이 아닌가 했다.
‘……?’
그런데 특이하게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는 쪽의 벽은 텅 비어 아무 그림도 걸려있지 않았다.
벽의 난 자국이나 공간으로 보아 원래 그림이 걸려있던 자리 같았다.
‘왜 저 자리만 그림이 없는 거지?’
그때 집사가 내려와 태오에게 전했다.
“샌더슨 경,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오는 집사를 따라 층계로 올라갔다.
똑똑-
2층 가장 안쪽 방으로 간 집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곧 백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모시게.”
덜컹-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서니, 한쪽 벽 가운데에 마호가니로 짠 웅장한 침대가 보였고, 그 옆으로 휴즈 백작이 서 있었다.
침대에는 바짝 말라 병색이 짙은 중년의 여성이 머리에 두건 같은 것을 두른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광대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야위었는데, 눈빛마저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듯했다.
“이런 몰골로 뵙기를 청해서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수척한 모습과 달리 젊게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고운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편찮으신데도 이렇게 직접 만나주시니 제가 더 감사할 따름이죠.”
“그동안 외부 출입은 거의 못 했지만, 근래 병문안을 온 다른 부인들에게서 샌더슨 경의 훌륭한 중매 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감명도 많이 받았고요.”
“감명이라니요. 부끄럽습니다.”
“백작님께서도 말씀하셨겠지만, 제가 몸이 많이 안 좋답니다. 갈수록 더 안 좋아지고 있고요. 지금보다 더 아프기 전에 우리 큰아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보는 게 제 소원입니다.
저는 샌더슨 경의 중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사이먼의 결혼 상대를 부탁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런던에 안 계셔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진즉에 의뢰하지 못한 걸 정말 많이 후회했었어요.”
휴즈 백작 부인은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 태오가 결혼정보회사를 세웠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휴즈 백작을 졸라 켄싱턴으로 남편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휴즈 백작이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샌더슨 경이 이렇게 급히 방문한 것을 보면, 아들놈에 대해서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혹시 저희 아들을 보고 오셨나요?”
태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도박에 심취해 있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얼마 전에 리버틴 클럽을 찾아가 아드님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랬더니요?”
“큰 아드님은 현재 도박에 강하게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런 아드님을 이용하고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그동안 많은 돈을 뺏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허허- 참.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심한 자식 같으니라고!”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친구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에 휴즈 백작은 실망과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백작 부인 역시 눈을 감은 채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오가 말을 이었다.
“이 상태에서는 설사 도박장에서 나온다고 해도 쉽게 마음을 잡기가 힘들 겁니다. 당연히 결혼도 힘들 거고요.”
도박에 빠진 사람들이 그 세계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뇌 속에서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보상회로’가 생성돼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뇌에서 만들어지는 ‘보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약물이나 도박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보상’은 자연적인 보상에 비해 그 만족감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대량의 도파민 방출과 함께 강한 중독 증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한 그 인위적인 보상을 다시 맛보기 위해 끊임없이 탐닉하면서, 기존의 정상적인 보상들에서는 아무런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인해 인위적인 보상을 얻기 위해 더욱더 약물이나 도박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샌더슨 경, 그냥 취미로 하는 도박이 아니라, 아들놈처럼 그렇게 큰돈을 날려가면서도 계속하는 건, 분명 마음에 병이 든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이걸 치료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요?”
백작은 태오에게 간절하게 치료법을 물었다.
“아드님의 도박 중독을 멈추게 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태오의 말에 백작 부부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게 뭡니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어서, 어서 알려주십시오!”
백작의 재촉에 태오가 단호한 목소리 답했다.
“격리입니다.”
‘격리’란 말에 다소 실망한 얼굴의 휴즈 백작이었다.
“음… 격리요? 격리라면 도박장 출입을 막는 건데, 확실한 치료법이라는 게 그저 도박장에 못 가도록 하는 것이 다라는 겁니까?”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물에 중독된 사람이 약물을 끊고 멀리하면 점점 정상이 되듯, 도박 역시 똑같은 원리로 도박장을 멀리하는 것만이 도박 중독에서 멀어질 수 있는 첫 단계이자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도박에 깊이 빠져버린 놈이 스스로 그만두고 격리에 순순히 응하려 할까요? 나만 해도 여러 차례 도박장에 가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붙잡기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네, 사실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은 격리에 잘 따르지도 않고 효과도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도박만큼 자신에게 보상을 줄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휴즈 자작님은 매우 높은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기질로 인해 그렇게 빨리 도박에 중독된 것이고요.
그런 성향의 경우, 사업가로서의 큰 성취감을 맛보게 해주면 도박에서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느끼게 되면서 도박을 끊는 확실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업가로서의 성취가 도박을 끊게 할 수 있다니,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태오는 사이먼 휴즈 자작이 누구보다 강한 소속감과 자율감, 목표에 대한 높은 성취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도박을 통해 그 심리적 욕구를 대신 충족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렸다.
“아드님의 경우 누구보다 일에서 오는 성취욕이 큰 분입니다. 그런 분이 그 욕망을 해소할 수단이 없다 보니 도박에서 나오는 보상으로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빠져들게 된 것이고요.
만약 그 에너지를 가지고 사업에 뛰어든다면, 그곳에서의 보상은 도박에서보다 훨씬 커서 도박 중독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죠.”
“…….”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곧 설립 예정인 제 무역회사에 아드님을 채용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귀족 사회에서는 눈총을 받게 되는 터라, 백작님께 먼저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백작 작위를 받게 될 아들에게 무역회사 취업을 권유하면, 노발대발하면서 반대하는 것이 이 시대 귀족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도박 중독으로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고 결혼도 못 할까 봐 밤잠을 설치고 있던 백작 부부였다.
“도박을 끊고 정신을 차린다면야, 무역회사 일을 하는 게 무슨 큰 흠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요즘처럼 돈을 많이 버는 무역 상인들이 더 큰소리치고 대접받는 세상에서 말이죠.
샌더슨 경의 회사에 취업시켜 도박을 끊을 수만 있게 해준다면 정말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백작 부부는 아들이 도박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만 해준다면,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믿고 따를 것을 굳게 약조했다.
“제가 아드님을 책임지고 빠른 시간 안에 치유해 결혼까지 시킬 것을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아드님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시면 안 됩니다. 이것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농장 일로 크게 꾸지람하면서, 앞으로 금전적 지원은 일절 없을 거라고 이미 공언했습니다. 하여간에 저희는 무조건 샌더슨 경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백작 부인은 고개까지 숙이며 몇 번이고 부탁했다.
“샌더슨 경. 제발 제 아들이 정신 차리도록 꼭 좀 보살펴 주세요.”
“네, 너무 심려 마십시오.”
* * *
방에서 나오는 길에 휴즈 백작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도박에 빠진 아들 녀석이 무역회사에서 순순히 일하려고 들까요? 제가 억지로라도 회사로 보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회사로 오지도 않을 거고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저는 샌더슨 경만 믿고 있겠습니다.”
“네. 제가 하는 대로만 지켜봐 주시면 됩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려가시죠.”
“네.”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나가면서 보니 2층 복도 벽에도 멋진 그림들로 가득했다.
“정말 미술관에라도 온 것 같네요. 그동안 여러 귀족 집안에 가봤지만, 백작님 댁처럼 훌륭한 미술 작품이 많은 곳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미술에 조예가 아주 깊으신 듯합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다들 우리 집에 오면 많은 그림 때문에 깜짝 놀라더군요. 사실 난 그런 안목이 전혀 없습니다. 아내가 미술에 관심이 많죠.”
역시 예상대로 아내의 취향이 반영된 작품들이었다.
1층으로 내려오면서 텅 빈 벽을 태오가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아무 그림도 걸려있지 않은 건가요? 보아하니 그림이 걸려있던 자리 같은데요.”
태오의 물음에 휴즈 백작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원래 저 자리에는 우리 가족 그림을 걸어두려고 비워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3년 전 아내가 아프면서 그 계획이 번번이 미뤄졌지요. 아내는 건강을 회복하면 행복한 모습으로 온 가족을 그림에 담아서 저곳에 걸어 둘 거라고 늘 말했거든요.”
그렇게 몇 년이 흘렀지만, 아내의 병은 회복되지 않고 더 악화되기만 했다.
자연히 비워진 자리는 채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유명한 초상화가를 불러, 온 가족이 몇 시간이나 앉아서 그림을 그린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림에 드러난 아픈 자기 모습을 끔찍이 싫어했고, 가족 그림이 자기 때문에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면서 몹시 우울해했다고 한다.
다른 화가를 불러 안 아플 때의 모습으로 외모를 바꿔서 그려달라고도 부탁해 봤지만, 매번 아내는 그림 속의 모습이 자기 같지 않다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사실 그림을 잘 모르는 휴즈 백작이나 다른 가족이 보기에도 건강하게 그려진 백작 부인은 예전의 그녀 모습이 분명 아니었다.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가가 건강했던 아내의 예전 모습을 알 턱이 없는데, 그때 모습 그대로 어떻게 재연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병든 아내의 억지일 뿐이지요.”
결국 그렸던 그림들은 모두 걸지 못한 채 텅 빈 자리로 남았다.
“참 후회가 됩니다. 3년 전 아프기 전에,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들과 당시 건강했던 아내가 다 함께 가족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 조금 더 낫고 나면 그리자고 하다가 그만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백작은 아픈 아내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가 되면서 이제는 가족 그림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사연을 듣고 나니 그 빈 공간이 왠지 더 허전하게 느껴지는 태오였다.
“그림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아내에게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꼭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다면 아내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
* * *
따각. 따각.
마차 타는 곳까지 배웅해 준 백작을 뒤로하고서 회사로 돌아가는 태오의 머릿속에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찰리가….’
아버지의 건강했던 광부 시절의 모습을 감정까지 담아 훌륭히 그려냈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듣자 하니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고, 웬만한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조차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싫어한 백작 부인이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휴즈 백작의 집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게다가 커다란 크기의 가족 그림을 그리기엔 실력이나 경험 면에서 찰리가 아직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왕립예술원의 전문가들이 찰리를 외면했듯이, 백작 부인 역시 그런 전문가의 눈과 같을 수 있다.
그래도 광부의 초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뭉클하게 느껴지던 슬픔과 행복감을 잊지 못하는 태오였다.
그림을 보면서 행복하고 기쁨 감정을 찾는 백작 부인이라면, 어쩌면 찰리의 그림 속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가족 전체 그림은 힘들겠지만, 백작 부인의 예전 모습이라도 그려보라고 해봐야겠어. 어쩌면 찰리의 상상력 속에 백작 부인이 그렇게 찾는 그 감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