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백작 부인의 눈물
휴즈 백작 부인이 하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성화세요?”
“보여줄 그림이 있어서 그래.”
“당신답지 않게 그림 하나 보여주겠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나중에 볼 테니 옆에 놔두고 가세요.”
짜증 섞인 아내의 타박에도 휴즈 백작은 꿋꿋이 그림을 내밀었다.
“샌더슨 경이 특별히 추천한 작가의 그림인데… 이걸 꼭 봐야 할 것 같아서 가져온 거야.”
“샌더슨 경이요?”
그제야 조금 관심을 보이는 백작 부인이었다.
“자초지종은 나중에 따지고 어서 그림이나 봐봐. 일단 보고 말합시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남편의 재촉에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 무릎에 놓인 그림을 내려다봤다.
‘……!’
* * *
복도에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샌더슨 경! 샌더슨 경!”
2층 계단으로 모습을 드러낸 휴즈 백작이 급히 태오를 찾았다.
“……?”
“샌더슨 경! 어서 좀 올라와 보시겠소? 아내가 샌더슨 경께 물어볼 것이 있답니다.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 알고 싶은가 봅니다.”
“아, 네!”
자리에서 일어난 태오가 서둘러 백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상기된 표정의 백작 부인이 물었다.
“회사 직원이 그린 작품이라고요?”
“네, 우리 회사에서 그림을 담당하는 직원이 있는데, 그 친구가 그린 광부의 초상화입니다.”
찰리의 그림을 유심히 살피던 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 직원분이 전문 화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인가요?”
“아, 이거. 역시 예리하시네요. 사실 나이도 아주 어리고,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아이라 그림을 아는 사람들이 보면 아무래도 많이 서툴러 보일 겁니다.”
백작 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
“배우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자기만의 색깔을 뚜렷이 내고 있어요.
“아, 그렇습니까?”
액자를 꼭 거머쥔 백작 부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제가 늘 상상으로만 꿈꾸던 그런 화풍이에요. 천재가 아무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터득해 순수하게 자기만의 영감으로 재해석해 나간 그림. 세상 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는 그런 세계의 그림….”
그런데 느닷없이 백작 부인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깜짝 놀란 휴즈 백작이 다가가 아내를 살폈다.
“아니, 당신… 왜 우는 거요? 또 두통이 심해진 게요?”
얼른 눈물을 닦아낸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광부가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하고 너무 행복해서요.”
“어이구- 난 또. 놀랐잖소.”
“제가… 제가 꿈에서나 찾던 그런 그림이에요.”
“허허, 내가 뭐라 그랬소. 나도 딱 보는 순간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백작 부인은 찰리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다.
“샌더슨 경? 이 그림을 그린 분이 어리다고요?”
“네, 아주 어린 친구입니다.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시간이 된다면 그분을 집으로 꼭 한번 초대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물론이지요, 부인. 제가 최대한 빨리 시간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샌더슨 경.”
다시 찰리의 그림으로 시선을 옮긴 백작 부인에게서 커다란 감정의 변화가 느껴졌다.
‘지난번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바뀌고 있어….’
태오는 문득 이런 비슷한 변화를 겪었던 환자가 떠올랐다.
명문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 홀연히 연극계로 뛰어든 남자.
그는 연극으로 새 삶을 시작하면서 평생을 따라다니던 극심한 두통과 환영,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백작 부인 역시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했다.
누구보다 강한 예술적 열망으로 가득한 부인이었지만, 시대적 제약으로 그 길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백작 가문으로 시집와 가족을 위한 삶에 자신의 뜨거운 열망이 억눌렸고, 그저 좋은 그림을 보는 것으로 달래며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무기력증이 몸과 마음을 덮쳤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찰리와의 미술 시간을 갖게 되면 큰 치료 효과를 볼지도 몰라.’
태오가 조심스레 자기 생각을 전달했다.
“부인…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초상화를 그린 친구에게 그림을 배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네?”
“이런 화풍을 늘 꿈꾸셨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실 정도라면, 일종의 강한 결핍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 찾아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로 마음에 병이 생길 수가 있을까요? 몸이 아플 수도 있고요?”
“네, 그런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휴즈 백작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 같습니다. 사실 이 사람도 예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배우고 싶은 선생이 없다고 늘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꿈에서나 바라던 그림을 그리는 화가 선생이 나타났으니, 딱 됐네요. 허허.”
백작 부인 역시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 켄싱턴(Kensington)
태오는 켄싱턴 하이 스트리트(Kensington High Street) 지역의 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브룩 모건과 함께였다.
태오가 지금 보고 있는 건물은 결혼정보회사와 같은 거리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웅장한 규모에 한눈에 봐도 좋은 자재로 튼튼하게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문의조차 받지 않는다고요?”
브룩 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돈을 얼마를 준다고 해도 팔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거참.”
그동안 이곳 켄싱턴에서 ‘테오 스트리트’를 만들기 위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결혼정보회사와 카페 1호점을 열었고, 결혼정보회사를 기준으로 그 아래의 건물들을 하나씩 매입해 나머지 부대시설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도회장.
무도회장은 18세기의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장소였다.
청춘남녀들이 무도회장을 통해 존재를 알리고, 무도회장을 통해 만남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태오가 결혼중매업자로 유명하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사교 무도회를 통해 결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
심지어 무도회가 아닌 중매인을 통해 만나는 경우에는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이라는 편견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회원의 확보에 ‘무도회’는 꼭 필요한 행사였다.
그런데 이 당시 ‘무도회’라고 불리려면 초대 손님이 최소 200명 이상, 많게는 500~600명 정도였는데, 무도회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를 수용할 정도의 규모 있는 건물이 있어야 했다.
또한 각각의 방마다 시중을 들 하녀들과 라이브 밴드도 고용해야 했고, 옷을 맡아 주는 방과 조금 쉬면서 디저트나 음료를 먹을 수 있는 티룸(Tea room)도 별도로 갖춰야 했기 때문에 여분의 방도 많이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무도회를 개최하려면 최소 300파운드 이상의 돈이 들어갔는데, 이것은 런던 일반 사무직 직원의 몇 년치의 연봉에 맞먹는 목돈이었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상대를 찾아 주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무도회를 열려 했고,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끊임없이 지적되고 있었다.
태오는 결혼정보회사 회원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참여할 수 있는 최고의 무도회장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것이 제대로만 정착된다면 결혼에 드는 비용 부담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마침, 결혼정보회사가 있는 거리 끝 모퉁이에 무도회장으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인 건물이 발견돼 태오는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건물 소유주는 절대 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세보다 배로 쳐준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근사한 무도회장을 갖추면 환상적일 텐데. 더구나 저 건물을 사버리면, 이 거리 맨 위의 결혼정보회사부터 여기 끝까지 한 거리가 정말 ‘테오 스트리트’가 되는 건데….’
태오가 아쉬운 눈빛으로 브룩 모건에게 물었다.
“저 건물과 토지의 소유주가 한 분이라고 하셨죠?”
“네.”
“저 부동산 소유자분을 제가 직접 만나볼 수는 없을까요?”
모건이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노령의 공작부인이신데, 워낙에 고집이 센 데다 재산도 엄청나서 돈 욕심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저 건물 매입 건으로는 절대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한번 물어는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 윈저성(Windsor Castle)
윈저성의 접견실에 국왕을 비롯해 대신과 귀족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태오도 조지 왕의 초대로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와의 ‘평화 회담’과 관련한 뜨거운 설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폐하, 저들의 얘기에 너무 귀를 기울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허무맹랑한 자들이 아니옵니까? 독립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국왕 폐하!”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아우성에 귀가 먹먹할 지경.
조지 왕은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며칠 전, 북아메리카 식민지 대표로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을 방문했다. 평화적 사태 해결을 위한 회담 때문이었다.
영국 측은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 주장을 포기하고 전쟁을 종결하는 데 합의만 해준다면, 모든 상황을 1763년 이전으로 되돌려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즉 독립전쟁 포기 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통상 및 외교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갖게 해주고, 식민지인들이 동의한 세금만 거둘 것이며, 총독 선출 자율권을 보장하는 등의 파격적인 제안을 내밀었다.
여기다 모든 상황이 안정되면, 영국 군대까지 식민지 내에서 완전히 철수하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만약 이러한 통 큰 제안이 독립전쟁이 터지기 전에 나왔더라면,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측의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제스처를 벤저민 프랭클린은 단칼에 거절했다.
식민지 대표단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국가의 건설이었다.
나름대로 많은 것을 포기한 영국으로서는 큰 실망을 넘어 괘씸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다.
“폐하! 카리브해에 있는 우리 영국 해군을 당장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향하게 하시어, 오만불손한 식민지 놈들을 박살 내버려야….”
“그만! 그만!”
조지 왕이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언성을 높여 질책했다.
“경들의 말을 듣고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전쟁을 시작했고, 경들의 말을 믿고 하우 장관을 사령관으로 파견해 다 이긴 전쟁을 눈앞에서 놓쳤지 않았는가?
또 경들의 주장을 위안 삼아 전쟁 상황이 나아지리라 여기고, 제대로 수습도 못 할 전쟁을 지금까지 엄청난 돈을 퍼부으며 수행하고 있단 말일세!
그런데 지금 전쟁이 어떤 꼴인지 보라! 오합지졸에 군수품도 변변찮은 식민지 독립군이라더니, 세계 최강군이라는 우리 영국군이 참 쉽게도 무너지더군?
나라를 위해 충정을 다하는 참 군인이라고 칭송했던 그 잘난 장군들은 적지에서 무도회장을 찾아 술판이나 벌이고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면서, 군수품이 부족해서 전쟁에서 지고 있는 양 투덜거리기나 하고 있지 않았던가?”
정신병이 없는 건강한 조지 3세는 역사책에서 보았던 나약한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추상같은 국왕의 권위가 살아있었다.
“샌더슨! 테오 샌더슨 경!”
조지 왕의 부름에 태오가 대신과 귀족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네, 폐하!”
조지 왕이 태오를 가리키며 울분을 토해냈다.
“나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머저리가 확실해!
몇 년 전 다들 어림없다던 식민지 전쟁을 샌더슨 경은 맞혔고, 또 설마 했던 독립선언 역시 샌더슨 경이 정확히 예측했었지.
빌어먹을 하우 사령관은 내가 밀어붙이라고 말했음에도 여유를 부리며 아주 관대하게 적을 대해 식민지 군의 살길을 친히 열어줬고.
새러토가 전투 이전부터 샌더슨 경이 소규모 공격에 대비하라고 그렇게도 일렀건만, 이 멍청한 사령관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더니 아주 형편없고도 처참하게 깨졌다.
결국 우리는 모두 틀렸고, 샌더슨 경은 모두 옳았도다!”
태오는 자메이카로 떠나기 직전, 조지 왕과 고위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규모 게릴라 전술에 대비해야 함을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오의 충고들은 전장에서 하찮게 여겨졌고, 그에 따른 영국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폐하, 외람되오나 그 소규모의 공격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한 귀족이 조심스럽게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시 게릴라전에서 호되게 당한 영국군 지휘관 중의 한 명이었다.
“그 입 다물라!”
조지 왕이 벌게진 얼굴로 버럭 호통치자, 변명하려 나섰던 귀족은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몸을 숨겼다.
조지 왕의 노여움에 관료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치만 살폈다.
아무리 입헌군주제로 왕의 힘이 약화하였다고 해도, 18세기 국왕의 권력은 현대인의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었다.
게다가 이전보다 건강해지고 괄괄해진 조지 왕은 상대적으로 주위 신하들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
“샌더슨 경!”
“네, 폐하.”
“샌더슨 경이 재작년 영국을 떠나면서 했던 말을, 나를 포함해 여기 있는 대신들도 똑똑히 기억할 것이오. 그리고 마치 우리의 멍청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하나씩, 하나씩 전부 다 실현이 되고 있고!”
관리들에게 호통치듯 힘주어 말하던 조지 왕은 태오를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자네가 말한 ‘최선의 선택’에 대해 내가 너무 가벼이 생각한 듯하네. 지나고 보니 경의 ‘최선’이라는 게 그때마다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었는지 뒤늦게야 깨닫고 정말 후회도 많이 했다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자- 좋아! 이제는 경이 그 어떤 얘기를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으니, 지금 엉망진창이 돼버린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번 말해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