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2
12화 반전
◈ 리치먼드 티 가든
대니얼 버크 경과 사라 클라크는 첫 만남치고 꽤 긴 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둘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얘기에 깊이 빠져들었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쯤에는 각자가 가진 가벼운 고민까지 털어놓는 사이로 급진전했다.
태오는 옆에서 흐뭇한 얼굴로 이 두 사람의 얘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요?”
시간을 확인한 사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 네. 그러고 보니 벌써 3시간이나 지났네요.”
“클라크 양은 이제 집에 들어가 보셔야죠?”
“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걱정돼서요.”
사라를 먼저 집으로 들여보낸 태오는 버크 경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3시간이 넘는 자리를 하고서도 버크 경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샌더슨 씨. 오늘 기분이 정말 이상하네요.”
“···?”
“전에 여자들과 얘기를 나눌 때면 시간이 정말 안 가고 지루하기만 했거든요. 거기다 제가 하려는 광산업에 대해 살짝 언급이라도 하는 날에는, 예외 없이 노골적으로 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요.”
버크 경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클라크 양과의 대화는 정반대였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3시간이나 지났다는 샌더슨 씨의 말을 듣고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이지 말이 통하는 여자와 대화한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미처 몰랐네요.”
남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고 관심 가져주는 여자 앞에서 힘이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강하게 끌리게 된다.
특히 일하는 남자를 한심하게 여기는 귀족 여성들만 보다가, 사라가 보인 뜻밖의 반응은 버크 경을 감동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편, 어릴 적부터 많은 독서와 토론을 통해 사고의 폭이 넓어진 사라는, 대니얼 버크 경이 꿈꾸는 사업이 앞으로 격변하는 세상에서 실제로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지를 스스로 가늠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버크 경이 추구하는 일에 대한 사라의 진심 어린 격려와 응원이 그녀의 말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었고, 그 감정이 그대로 버크 경에게 전달됐던 것이다.
“솔직히 여자분이 합석한다는 샌더스 씨의 말에 상당히 불쾌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라 클라크 양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어요.”
아무래도 첫눈에 반한 듯싶었다.
첫인상에서 받은 강한 호감과 이후 이어진 그녀와의 멋진 대화 속에서 대니얼 버크 경은 그녀에게 흠뻑 빠진 것 같았다.
게다가 태오의 능숙한 리드는 18세기 젊은 남녀의 서투른 감정의 교류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연결 짓게 하면서, 마치 꽤 긴 시간 연애를 한 듯한 감정 상태에 도달하게 했다.
“그리고···”
버크 경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이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 좀 부끄럽기도 하고 말하기가 민망한데요, 저는 왜 대화를 하는 중간중간 이렇게 마음이 울컥한 지 모르겠더군요. 단순히 클라크 양과 제가 말이 잘 통해서라고 하기엔 뭔가 다른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태오는 버크 경이 지금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심리학자로서 잘 알고 있었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자존심도 강한 법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속에서 그동안 버크 경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왔다.
그러다 오늘 사라를 만나, 사회 저변에 깔린 잘못된 가치에 대한 속 깊은 대화를 처음으로 터놓고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를 지지하고 알아봐 주는 그녀의 진심 어린 말에 상처받았던 그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크게 치유 받았던 것이다.
“사실 처음 클라크 양이 이곳에 왔을 때, 샌더슨 씨가 일부러 만남의 자리를 주선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버크 경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탁자 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음이 좋지 못했어요. 뭔가 모르게 기분도 많이 상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기분입니다. 오히려 제가 괜히 클라크 양의 마음에 들지 않은 말만 골라 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요.”
“아니요, 오늘 말씀 너무 잘하셨어요. 클라크 양도 상당히 즐거워 보였습니다.”
“아···그러면 정말 다행인데···.”
대니얼 버크 경의 표정이 곧 어두워졌다.
“하지만, 저는 상속 받을 재산도 별로 없고, 당장에 보여줄 만한 능력도 없는데··· 그런 제게 과연 클라크 양이 호감을 느낄는지 모르겠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클라크 양도 버크 경에게 충분히 호감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태오의 말에 대니얼 버크 경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럴까요? 그게 정말이면 너무 좋겠네요.”
남자는 자기 성향에 맞는 외모의 여자를 만나면 첫눈에 빠지기 쉽다. 거기다 대화까지 잘 통하고 편하게 느껴진다면 운명의 상대로 인식하고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본인의 타오르는 감정만 가지고 성급하게 달려들지는 마세요. 사라 클라크 양 같은 스타일은 조금은 마음을 추스르고 오늘 보여주신 것처럼 존중하며 만나셔야 합니다. 만나보셔서 아시겠지만, 클라크 양은 매우 특별한 여성이니까요.”
버크 경이 태오의 충고에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클라크 양도 제게 호감이 있는 거라면 절대 급하지 않게 천천히 다가서겠습니다.”
“네. 그렇게만 하시면 아주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대니얼 버크 경.
리치먼드 티 가든에 앉아 있는, 가난하지만 눈빛이 살아있는 이 잘생긴 젊은 귀족은 훗날 세계 최대의 석탄 채굴업 회사 수장이 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또한 채굴한 석탄을 직접 가공하여 여러 제품으로 판매하는 현대식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 세계 광산업계를 선도하는 선두 그룹으로 올라선다.
그리고 이런 대니얼 버크 경의 옆에는 평생 조언과 응원을 해준 인생의 동반자 사라 버크 부인이 있었다.
◈ 2개월 뒤, 로버트 클라크 남작의 집.
“맞습니다, 아버님. 그 무거운 석탄을 말이 끄는 마차를 통해 간다면 비용도 많이 들고 진흙 길에 빠지기 쉽다 보니 운송 시간도 더딜 수밖에 없었죠. 그때 애거튼 경이 운하를 만들 생각을 한 겁니다.”
저녁 시간.
클라크 남작의 다섯 딸과 대니얼 버크 경은 남작의 침대 주위에 빙 둘러앉아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태오도 버크 경을 따라 함께였다.
태오는 벽난로 근처에 기대선 채 버크 경의 얘기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이제는 한 가족과 다를 바 없게 된 대니얼 버크 경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남작의 집에 들러 광산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클라크 남작의 딸들은 이 시간을 가장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운하라면 강을 만든다는 건데, 그게 정말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듣던 둘째 딸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맞아. 쉽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당시 주변에서는 다들 애거튼 경을 비웃었어. 상속받은 전 재산을 들여 자기 광산에서 맨체스터 공장지대까지 운하를 뚫기로 작정한 그의 행동이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든.”
“그러게요. 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애거튼 경은 정말 대단해요.”
침대에 기대어 흥미롭게 듣고 있던 클라크 남작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니얼?”
“네, 아버님.”
“광산을 개발하겠다는 자네의 꿈을 다른 사람들이 많이 비웃는다고 했지? 마치 애거튼 경처럼 말이야.”
“네? 아···네. 하하. 뭐 조금 그런 편입니다, 아버님.”
“나는 자네의 그 생각을 지지하네. 사라하고도 얘기했지만, 난 자네의 사업적 판단과 방향이 옳다고 믿어.”
“그렇게 생각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좋은 광산이 헐값에 나온 것들이 있다고?”
“네. 자꾸만 물이 차니까 광산을 운영하기가 어렵다고 올 초에 버밍엄에 내놓은 큰 광산이 하나 있습니다. 입지가 너무 좋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다 보니 헐값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빨리 사들이지 않는 건가?”
“그게···.”
“돈 때문에 매입을 못 하고 있는 건가?”
“지금 열심히 투자금을 모아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절반 넘게 모았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조금이나마 투자를 하고 싶구만. 쿨럭- 쿨럭-”
“네? 아버님이요?”
기침을 하고 입을 닦은 클라크 남작이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사라의 결혼 지참금도 모두 그곳에 투자하게. 나는 왠지 자네 말처럼 대단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 말이지.”
“···아버님.”
클라크 남작이 태오를 쳐다보며 물었다.
“샌더슨 씨는 우리 예비 사위의 광산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후후, 무조건 잘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버크 경에게 투자까지 한 상태입니다.”
태오의 말에 남작이 크게 기뻐했다.
“허허- 그렇습니까? 캐링턴 경의 말을 들어보니 샌더스 씨는 경제적 안목도 엄청나다고 하던데. 이거 더 마음이 놓이는군요. 더 볼 것도 없구만. 당장 내일 투자를 계약해야겠어. 허허허.”
똑똑-
한참 사업 얘기가 오가고 있는데, 브라운 집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지금 토마스 클라크 경 부부가 도착했습니다.”
예정에 없던 상속인 토마스 부부의 도착 소식에 클라크 남작 가족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사라에게 토마스의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던 대니얼 버크 경의 표정도 굳어졌고, 지난번 불쾌한 첫 만남을 기억하는 태오의 인상 역시 절로 찌푸려졌다.
분위기를 감지한 클라크 남작이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어서 들어오라고 하게.”
남작은 아직 어린 딸들이 조금 더 클 때까지 만이라도 이 집에서 머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토마스를 좋게 대해야만 했다.
행여나 토마스 부부가 모질게 마음을 먹는다면, 자기가 죽자마자 모두 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토마스 부부의 온정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남작의 처지였다.
덜컹-
토마스와 그의 아내가 실실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하하-. 숙부님, 저희 왔습니다.”
“좀 괜찮으세요? 어머, 여기 다들 모여있었네?”
토마스의 아내는 재빨리 눈을 굴리며 방안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살피느라 바빴다
두 부부는 남작 딸들의 인사에는 본체만체 대꾸도 없이, 태오와 대니얼 버크 경을 불한당들 보듯 째려봤다.
“누구죠, 이 젊은이는?”
토마스의 물음에 클라크 남작이 대답했다.
“참, 소개가 늦었구만. 곧 사라와 결혼하게 될 우리 예비 사위일세. 서로 인사들 나누지, 그래.”
“네? 예비 사위요?”
버크 경이 먼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대니얼 버크라고 합니다.”
검소해 보이는 그의 차림새를 쓱 훑어본 토마스는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사라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너는 아버지가 이렇게 위중하신데,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날 생각을 안 하고 어디서 이런 남자를 데리고 온 것이냐? 줄줄이 딸린 니 어린 동생들은 어쩌려고?”
당사자를 바로 앞에 두고 하는 믿기 힘든 무례한 말투였다. 대니얼 버크는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사라는 심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토마스를 향해 불같이 화를 냈다.
“아버지 앞에서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버크 경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데 이런 남자라니요? 말씀을 너무 막 하시는 거 아니세요?”
예전부터 사라를 얄미워했던 토마스 클라크 부인이 냉큼 나서서 쏘아붙였다.
“사라! 너 말 한번 정말 웃기게 하는구나? 뭘 함부로 한다는 거지? 이 사람이 하는 말뜻을 정말 모르겠어? 좋은 조건의 남자들이 청혼할 때는 다 거절하더니, 이제 어쩌려고 그러냐고 답답해서 묻는 거잖니?”
아니꼬운 얼굴로 대니얼 버크 경과 태오를 번갈아 쳐다보던 토마스가 비아냥거렸다.
“그래, 대니얼이라고 했나? 자네는 물려받을 상속금이라도 있는 건가? 뭐, 꼴을 보아하니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설마, 저기 계신 대단하신 남자 매파를 끼고서 단단히 한몫 챙겨보려 이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 허허-.”
태오의 눈에 대니얼 버크 경의 턱이 조금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분노···’
인간은 화가 치밀어 올라 분노의 감정에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턱을 치켜들게 된다. 그리고 곧 눈으로 그 변화가 연결되면서 아래 눈꺼풀이 긴장하게 되고 위쪽 눈꺼풀은 올라간다.
하지만 대니얼의 턱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내 내려오면서 별다른 신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기감정을 사라만큼이나 잘 통제하는 대니얼이었다.
“저는 제 사업을 일구어 스스로 돈을 벌 겁니다.”
“사업? 무슨 사업?”
“광산을 개발할 계획입니다.”
“광산?”
대니얼 버크 경의 말에 토마스 부부는 서로 마주 보고서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푸하하, 그러니까 광산에서 일을 한다는 거야? 그 시커먼 석탄 가루를 얼굴에 뒤집어쓴 노동자들 말하는 거지?”
“호호호, 저도 알아요. 검둥이처럼 시커먼 백인들. 얼굴에 그 탄가루를 뒤집어써서 그렇다고 하던데.”
“크하하하- 맞아, 맞아.”
잔뜩 부아가 치민 남작의 셋째 딸이 소리쳤다.
“그건 광부고요! 버크 경은 광산을 운영하려는 사업가를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토마스가 인상을 구기며 윽박질렀다.
“조그만 게 어디 버릇없게 어른들 얘기에 나서는 거냐! 그리고 광부나 광산 하는 사업가나 다 매한가지 천박한 일을 하는 것들이지.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야?”
그때 갑자기 토마스 부인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벌리기 시작했다.
“참, 우리 이이는 이번에 메리엔 렌드먼드 영부인의 후원으로 곧 백작 영지의 관리감독관으로 임명될 예정이랍니다. 백작님의 영지 규모가 워낙에 커서 근처에 머무를 집도 아주 크고, 연 수입도 얼마나 많은지, 호호호, 들으면 다들 까무러치실걸요?”
아내의 자랑에 토마스 클라크가 거만한 미소를 띠었다.
“허험-. 당신은 뭘 그런 얘기를 이런 데 와서 하고 그래?”
보통 이 시대의 백작은 많은 토지와 농장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리감독관을 특별히 임명하여 맡기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대니얼 버크 경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잠시만요?”
“?”
“방금, 메리엔 렌드먼드 영부인이라고 하셨나요?”
토마스가 퉁명스레 반문했다.
“그런데?”
“혹시 윈저지역에 계신 렌드먼드 백작님의 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네가··· 렌드먼드 영부인을 알고 있나?”
“알다마다요. 제가 몇 달 전에도 찾아뵈었는데요?”
“뭐? 렌드먼드 영부인을··· 자네가 찾아뵈었다고? 무슨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