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라일라 양과의 대면
◈ 다음 날 오후. 런던 세인트 제임스(St. James), 프라이스 공작부인 저택.
워- 워-
“도착했습니다, 나리.”
프라이스 공작부인의 저택은 메이페어의 남쪽에 인접한 세인트 제임스(St. James)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인트 제임스는 오래전부터 런던 상류층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명성만큼이나 고급스러움과 위엄이 넘치는 저택들로 즐비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작부인이 반갑게 태오를 맞았다.
“샌더슨 경,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공작부인. 제가 사는 곳과 멀지 않아서 찾기가 어렵지 않았네요.”
“다행이네요, 잠시 여기서 차 한잔하시죠? 손녀가 곧 내려올 겁니다.”
“네.”
차를 마시며 손녀를 기다리는데, 난처한 표정을 한 하녀가 공작부인 곁으로 급히 다가왔다.
“에바는 왜 안 데리고 혼자야?”
공작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하녀가 대답했다.
“아가씨가… 발목이 아파 계단을 내려오기가 힘들 것 같다고….”
“뭐야?”
“…그래서, 2층 서재에서 손님을 맞겠다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는 공작부인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는 태오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공작부인 앞에서 하녀는 큰 죄를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뭘 그러고 서 있어? 어서 들어가서 일보지 않고.”
“아, 네! 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녀는 잽싸게 사라졌다.
공작부인이 민망한 얼굴로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저 녀석이 어제저녁에 내가 좀 뭐라고 했더니 골이 나서 저러는 걸 거예요. 나랑은 얼굴도 마주치기 싫다는 거죠.”
그동안 할머니의 결혼 강요에 시달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공작부인이 태오에게 부탁했다.
“하녀들과 함께 가셔서 손녀와 얘기를 나눠 주시겠어요? 같이 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다투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 상담이 제대로 안 될 것 같네요.”
회사 상담실이 아닌 이상, 집안에서 미혼의 숙녀와 단둘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하녀를 붙여준다는 말이었다.
“네, 저는 상담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공작부인이 하녀 둘을 불렀고, 태오는 그녀들을 따라 손녀의 방으로 향했다.
* * *
똑똑똑-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청아하고 앳된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차갑게 느껴졌다.
덜컹-
문이 열리자 문제의 손녀가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바 라일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테오 샌더슨입니다.”
마주한 그녀는 풍성한 금발이 찰랑거리는 늘씬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특히 살짝 올라간 눈매와 도톰한 입술은 남자라면 누구나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였다.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에바의 까칠한 말투가 이어졌다.
“중매에 무슨 상담이 필요하다는 건지 조금 의아하네요. 죄송하지만, 간단히 해주셨으면 해요. 제가 몸이 조금 피곤해서요.”
말투에서 풍기는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감정이 그녀만의 매력을 크게 반감시키고 있었다.
‘겉모습은 아름답게 빛나지만, 그 아름다움을 악한 감정으로 스스로 갉아 먹고 있는 것 같네.’
신사들이 그녀의 외모에 혹했다가도 가시 돋친 그녀의 말을 듣게 되면, 금세 피곤해하며 피하기 일쑤였으리라.
‘흠… 확실히 쉽지는 않겠네.’
외할머니 덕에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불행한 존재로 인식하게끔 만들기 쉽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것이고, 그런 마음에 더 센 척하다 보니 지금의 까칠한 성격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했다.
“할머니가 돈 많이 줄 테니, 내가 끔뻑 넘어갈 남자로 구해달라고 요청했나 보죠?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아, 맞다! 거기다 심지가 굳고, 돈 욕심은 없어서 지참금 따위는 필요 없이 오로지 나만을 사랑해 줄 만한 그런 귀족 청년? 큭큭….”
에바는 공작부인이 내세운 조건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네! 정말 그런 사람을 데리고 오면 할머니 성화가 아니더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겠네요. 참, 저는 시시한 귀족은 별로예요. 최소한 백작가 이상이었으면 해요. 그런 신사가 있으며 언제든지 시간과 장소만 정해주세요. 꼭 나갈 거라고 약속드리죠. 하지만 이런 세상에 지참금도 없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 싶네요. 호호호.”
첫 만남임에도 예의를 차릴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데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이상하다… 아는 아가씨 같은데?’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태오가 에바에게 물었다.
“저기…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네?”
“어디서 뵌 분 같아서 말이죠.”
“글쎄요. 전 처음 뵙는데요?”
에바는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태오를 내리깔아 봤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숨어있던 기억 하나가 번뜩하고 떠올랐다.
‘아! 무도회장에서 봤던 그 악녀!’
태오는 그제야 에바가 누구였는지 생각이 났다.
루이스 팔머 경과 애슐리가 있는 무도회장에서 나타나, 잘난 척하다 애슐리에게 한 방 먹었던 아가씨였다.
수년 전에 잠깐 스쳐 지나간 탓에 기억을 못 한 것도 있었지만, 그때와는 얼굴이 많이 달라 보였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에바는 못된 눈매에 지나친 화장으로 거부감이 들던 아가씨.
그런데 화장기 하나 없는 지금의 에바 모습은 오히려 청순함이 돋보이는 우아한 아가씨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무도회장에서의 나쁜 기억과 공작부인을 통해 들은 사연, 그리고 지금의 삐딱한 태도 때문인지, 그녀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건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네. 건물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내가 너무 쉽게 달려들었나.’
얼른 상담을 마치고 돌아갈 생각에 태오가 질문을 간추려서 했다.
“라일리 양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상형이 있나요?”
“이상형이라… 재밌군요. 그렇지만 조건을 따지고 맞춰서 결혼하는 건데, 그딴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전 그냥 좋은 귀족 가문이면 됩니다. 어차피 귀족들의 결혼이야…….”
그렇게 골치 아픈 상담을 한참 이어가는 도중.
쨍그랑-
날카로운 유리 파편 음이 서재를 울렸다.
책장을 닦고 있던 젊은 하녀가 그곳에 놓인 꽃병을 잘못 건드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화들짝 놀란 나이 든 하녀가 에바의 눈치를 살피며 젊은 하녀를 윽박질렀다.
“너 뭐 하는 거야?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서 그 귀한 걸 깨뜨리면 어째?”
그런데 전혀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에스더! 괜찮아? 손 다친 거 아니야?”
“괜, 괜찮습니다. 아가씨.”
“거길 왜 건드려? 안 닦아도 되는 곳을.”
에바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하녀를 걱정해 주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직접 깨진 유리까지 치우려 들었다.
“아유- 아가씨. 가만히 놔두세요. 다쳐요. 제가 치울게요.”
나이 든 하녀가 깨어진 꽃병을 잡으려는 에바를 말렸다.
에바는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 하녀를 조용히 다독였다.
“너 내 얘기 엿듣는다고 정신 팔려 그런 거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내가 다 봤어. 하여간 이거 할머니가 아끼시는 꽃병이니까 빨리 치워야 해. 깨진 걸 아시면 아주 난리 날 테니.”
공작부인이 아끼는 꽃병이라는 소리에 하녀가 울상을 지었다.
“어, 어떡해요. 아가씨?”
“너무 걱정 마. 만약에 걸리면 내가 깼다고 할게.”
“네? 아, 네. 고…고맙습니다.”
에바의 태도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상대하는 감정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에스더. 책장은 물걸레질하지 말고, 마른걸레로 먼지만 잘 털어야 해. 내가 이 책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잘 알잖아?”
“네, 아가씨… 흐흑. 죄송해요. 여기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으흑.”
“바보같이 이런 일로 울긴 왜 울어?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
감정 섞이지 않은 목소리라 겉으로 보기에는 냉정해 보일 수 있겠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따뜻함과 배려심이 녹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태오를 혼란스럽게 했다.
‘뭐지? 전혀 다른 감정이잖아…?’
태오나 다른 귀족들 앞에서 보여준 모습과 하녀들 앞에서 보인 모습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예전 무도회장에서 보였던 건방진 태도와 공작부인과의 말과는 뭔가 달라. 왜 보잘 것 없는 어린 하녀의 실수를 저렇게 감싸고도는 거지? 에스더라는 하녀는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개인적으로 가까워질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러나 곧 나이든 하녀의 말에서 에바의 관대함이 평소 그녀의 성품임을 알 수 있었다.
“에스더! 조심 좀 해. 인정 많은 에바 아가씨였으니 망정이지, 공작부인 앞이었으면 넌 오늘 눈물 꽤나 쏟았을 거야.”
‘인정 많은 에바? 저런 모습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소리잖아?’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무언가 모순되게 느껴졌다.
보통 저런 성격을 가진 공작 집안의 손녀라면, 하녀의 실수를 용납 못 하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에바는 하찮은 하녀의 실수를 감싸다 못해, 대신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나서고 있었다.
“샌더슨 경,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네.”
다시 자리에 앉은 에바와의 상담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까 하녀에게서 보인 호의적이고 좋은 감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다시 가시 돋친 말투로 일관했다.
‘진짜 이 아가씨 정체가 뭐지?’
그렇게 상담이 마무리될 때쯤, 벽면 책장에 가득 꽂혀있는 책들이 보였다.
아까 하녀에게 하던 말이나 정리된 모양새를 보면 정말 책을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신사분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고상한 책은 없어요. 수준 낮은 대중 소설책들이 전부에요. 놀고먹는 일뿐인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죠.”
“취미 정도가 아니신 것 같은데요?”
“네?”
“책장에 배지가 있는데요? 저건 독서 클럽 배지 같은데…. 독서 클럽 회원이신가 보죠?”
당시 영국에서는 도서 대여점 등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독서 클럽이 많이 운영됐다.
“네. 뭐 열심히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요즘 유일하게 즐기는 사회활동이에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특이한 책장이 눈에 띄었다. 다른 책장과 달리 여닫이 유리문까지 달린 고급스러운 책장이었다.
그리고 그 책장에는 ‘LOVE’라는 제목이 달린 책이 칸마다 가득 꽂혀있었다.
젤 위 칸에는 제1권이 십여 권, 그 아래 칸에는 제2권이 십여 권 채워져 있었고, 그런 식으로 아래 5칸까지 꽂혀있었다.
‘어? 같은 책을 일부러 십여 권씩 샀네?’
모두 동일한 작가가 쓴 책으로, 각 권에는 부제목이 달려있었다.
• LOVE Vol 1. Glimpse (제1권. 일견)
• LOVE Vol 2. Rekindled Flames (제2권. 다시 불붙은 불꽃)
• LOVE Vol 3. Absence (제3권. 결핍)
• LOVE Vol 4. Destiny’s Dance (제4권. 운명의 춤)
• LOVE Vol 5. Yielding to Fate (제5권. 숙명에 굴복)
모두 ‘LOVE’라는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시리즈물로 나온 연애 소설책 같았다.
작가 이름을 살펴보니 로건(Logan)이었고, 출판사는 ‘제이든’이었다.
‘흠… 에바는 로건이란 작가의 광팬임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같은 책을 저렇게 많이 사서 정성스럽게 전시해 둘 리가 없을 테니까.’
현대 사회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여러 장 구매해 소장하는 열성 팬들이 많다.
에바도 그런 식으로 책을 사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다.
어쩌면 이것은 태오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애지중지하는 그 책을 사서 읽어보면 에바 내면의 감정 상태와 성향을 좀 더 명확하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 * *
에바와 별 소득 없는 상담을 마친 태오였지만, 앙칼져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내면의 모습이 다르다는 특이한 단서를 하나 얻었다.
자기 속내를 숨기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자기 모습인 양 편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녀들에게 대하는 전혀 다른 태도와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보면 에바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특히 소중하게 소장하고 있는 LOVE라는 책에 어떤 답이 있을 수 있었다.
태오는 공작부인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LOVE라는 소설책을 구하기 위해 곧장 유료 도서 대여점으로 향했다.
* * *
런던 리든홀, 미네르바(Minerva) 도서판매 대여점.
고급스러워 보이는 붉은색의 라운지가 눈길을 끄는 한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파이프를 입에 문 중년의 남자가 일어나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 아니, 샌더슨 경 아니세요? 야- 이거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하하.”
“네, 하비 씨.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런던 리든홀(Leadenhall)에 위치한 미네르바 도서판매 대여점은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일과 판매를 하는 꽤 큰 서점이었다.
일종의 유료 대출 대여점 형태의 도서관(Lending Library)이었는데, 영국은 18세기 초부터 이런 형태의 서점이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대여점에서는 보통 소설책 한 권이 나오면 25개 정도의 복사본을 만들어, 그걸 대여해 주면서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 책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원본 책을 복사해서 반값 이하에 대여해 주고, 가족이나 친구끼리 돌려본 후 며칠 뒤에 반환하는 방법이 많이 이용됐다.
“하비 씨, 여기에 혹시 ‘로건’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책이 있나요?”
“로건… 이요? 아, 로건 작가! 있지요. 몇 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가의 어떤 책을 찾으시죠?”
로건은 작품을 여러 개 쓴 중견 작가인 듯했다.
“음… 총 5권으로 된 장편 소설 같은데요. 제목은 LOVE였어요. 1권 소제목이 Glimpse였던 것 같고요. 일단 제1권만 필요합니다.”
“아, LOVE.”
태오의 설명에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팡- 팡-
그는 상자 위의 먼지를 털고서 그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왔다.
그의 손에는 에바의 방에서 보았던 LOVE라는 책의 제1권 Glimpse(일견)가 들려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 같았는데, 벌써 진열장에서 치워버린 모양이었다.
“이 책 맞으시죠?”
“아,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점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샌더슨 경, 이거 너무 죄송한데, 우리가 이 로건 씨 작품은 복사본이 없어요. 인기가 크게 없다 보니 사장님이 구태여 복사본을 만들지 말라고 했거든요.”
현대였다면, 대형 서점에서 책의 복사본을 만들어 대여해 준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영국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었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초기 출판업을 크게 발전시킨 역할을 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책을 구매하도록 할게요.”
“아, 그러시겠습니까?”
장편 소설이라고 해도 보통 3권 정도인 경우가 많았다. 과연 5권이나 되는 소설 속에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 궁금했지만, 일단 한 권만 사서 분석해 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에바 양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 정도 감이 올 것으로 기대됐다.
* * *
늦은 밤.
침실의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태오는 벌써 몇 시간째 로건 작가의 책을 읽는 중이었다.
탁-
드디어 제1권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 책을 덮었다. 의미를 파악하고 분석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더 지체됐다.
‘…….’
처음에는 그저 통속 소설이려니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내용이 진행되면서, 점점 소설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에바의 심리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읽어 나갔지만, 도리어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사고와 식견에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이 정도의 통찰력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니….’
글 속에 녹아있는 이야기들은 오랜 연륜과 치열한 고민이 있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있을 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걸 보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작가는 아닌 게 분명했다.
‘시대에 비해 너무 깨어진 사고야. 당연히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긴 한데….’
로건 작가의 LOVE라는 소설은 가난하지만 매사 긍정적이었던 귀족 집안 출신의 ‘카이든’라는 남자가 겪게 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는 ‘나탈리’라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상인의 딸을 술집에서 보고 첫눈에 반하면서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작가 로건은 ‘사랑(LOVE)’이라는 감정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카이든’이라는 가난한 귀족을 통해 소설 속에 잘 녹여내고 있었다.
사실 이 당시의 연애 소설은 편지 형태의 서간문이 인기 있었지만, 이 작품은 현대 소설의 하나처럼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
그래서인지 태오가 읽기에는 더 편했다.
원래는 제1권만 읽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에바의 심리 파악 때문만이 아니라 책 자체에 들어있는 작가의 의중이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 정도로 로건의 책은 인간 감정에 대한 통찰력이 매우 뛰어났다.
‘이런 책에 심취해 있는 에바라면….’
아직 한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에바의 심리상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건 작가의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이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순진한 한 귀족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 시대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은근한 비판으로 넘쳐났다.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외에 위선적인 귀족들에 대한 환멸과 증오, 답답함이 깊이 베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18세기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대의 지식인만큼이나 합리적이고 날카로웠다.
에바가 하녀들에게 그렇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면서도, 귀족이나 고귀한 가문 출신의 젠트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 혹시 이러한 사상과 맥이 통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루이스 팔머 경을 그때 그래서…?’
에바 라일리는 몇 년 전 무도회장에서 애슐리의 남편이 된 루이스 팔머 경에게 굉장한 호감을 보였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팔머 경은 하인이나 하녀들에게 시종일관 인간적으로 대했는데, 그 모습에 반한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도 문제지만, 이런 글의 작가를 열렬히 좋아한다면, 그렇지 못한 귀족들과 얘기 나눌 때 경멸의 마음이 들기가 더 쉽지. 그렇다면 아까 백작가의 혈통을 소개해 달라는 식으로 말했던 것들은 모두 마음에도 없던 소리였다는 건가?’
에바가 로건 작가의 시대를 앞선 사상과 성숙한 의식을 광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면, 그간 결혼 상대자로 소개받았던 젊은 귀족들의 미성숙한 사고와 언행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짜 귀족이었던 아버지를 들먹이며, 손녀의 피에도 그런 사기꾼 기질이 있을 것이라 몰아세우는 할머니에 대한 반감이, 소위 ‘고귀한 신분’을 자랑하는 귀족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 시대에서 그런 반감은 아주 불순한 사상이었다.
더구나 귀족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에바가 좋아할 만한 감정을 지닌 귀족 신랑감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워 보였다.
‘이거 참- 공작부인이 내세운 다른 조건까지 고려해 보면… 이번 의뢰는 사실상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