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엇갈린 마음
길쭉한 얼굴의 남자가 에바 라일리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라일리 양은 소설 속에서 카이든이 나탈리를 마주치고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 순간 가짜 감정이 시작된다는 얘기인가요?”
“맞아요. 소설 속에서 카이든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대가 내 곁에 없다면 내 마음은 텅 비어 황량하고 메마른 호수가 돼버릴 것이오.’라고요. 아주 상투적인 말이죠.
그런데 작가는 이런 진부한 표현을 자주 써요. 필력이 뛰어난 작가임에도 일부러 이런 표현을 자주 보여줌으로써 카이든이 가짜 감정에 푹 빠져 있다는 걸 독자에게 드러내려고 하는 거죠.
자기의 감정이 아닌 나탈리의 감정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찾다 보니, 자기가 주체가 된 진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에만 반응하면서 ‘집착’과 ‘괴로움’을 가지게 되고요.
로건 작가님은 그것은 잘못된 ‘사랑(LOVE)’의 감정이었다는 걸 이런 방식으로 곳곳에 드러낸 것이라고 봐요.”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그레디 모리슨이 처음으로 토론회에 끼어들었다.
“글쎄요. 그건 라일리 양의 개인적인 바람이 아닌가요?”
에바와 멤버들의 시선이 그레디에게로 향했다.
“제가 보기엔 이 로건 작가라는 양반은 그렇게까지 깊이 있게 생각한 것 같지 않은데요? 그냥 흔한 사랑의 표현을 남발한 것뿐이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표현을 남발한 작가들은 널리고 널렸죠. 그럼 그 작가들도 모두 가짜 사랑을 주야장천 일부러 넣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건가요?”
에바가 다소 감정 실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야 많은 연애 소설들이 서간체 형태라 상투적인 사랑 표현이 남발될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로건 작가님의 글은 작가가 주인공의 마음까지 전부 관찰하는 시각으로 쓰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왜 그렇게 바보 같은 표현을 많이 사용했을까요?
그리고, LOVE 2권인 Rekindled Flames(다시 불붙은 불꽃)를 보면, 평소에 산책로를 걸으며 행복해했던 카이든은 나탈리를 사랑하게 되면서 홀로 걷는 산책로가 더 이상 즐겁지 않고 더 많은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전에는 그렇게 맛있게 먹던 메리 부인의 음식도 그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고요. 대신에 나탈리와 함께 먹은 싸구려 시장 음식에 더 끌리죠. 그리고 전에는 없던 시기와 질투심이 생겨나고요.”
“…….”
“사랑에 빠진 카이든의 감정들은 나탈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전부 없었던 감정들이에요.
즉 나탈리가 나타나고 처음으로 사랑(Love)이라는 감정을 가지자마자 그는 자기가 가졌던, 자기가 주인공이었던 모든 감정을 잃어버려요.
잘못된 사랑의 길로 가는 모습을 작가가 일부러 부각해 보인 거죠.”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던, 그레디가 반박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홀린 듯 잠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거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요?”
태오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흘렀다. 자기 글에 대해 칭찬하는 에바를 도리어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에바는 날 선 목소리로 바로 받아쳤다.
“아니요! 집착과 진짜 사랑은 다르죠! 진짜 사랑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그래서 흔들리지 않죠. 당연히 집착도 없고, 쓸데없이 강한 시기나 질투도 없어요.”
“…….”
“물론 가슴이 아프고 슬플 수 있겠지만, 그건 온전히 자기감정에서 나오는 성숙한 사랑이죠. 그 사람을 앞으로 한층 더 성장시킬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거고요.
하지만 가짜 사랑은 자기가 주체가 된 감정은 모두 포기한 채, 상대방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그곳에서 평안과 행복을 찾으려 들죠.”
“…….”
“그런 가짜 사랑의 전형적인 행태가 결혼하고도 자신의 배우자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심한 경우,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망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자기가 주체가 된 감정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에게 맞춘 감정으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들… 바로 그런 것들이 가짜 사랑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죠.”
“…….”
“소설 속의 카이든을 보세요. 나탈리가 웃어주면 세상은 한없이 밝아지지만, 나탈리가 무표정하면 먹구름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렸고, 나탈리가 돌아서면 슬픔 속에 주저앉아 어쩔 줄 모르는 아이가 돼버리잖아요?
이것은 곧 인생이라는 자기 연극에서 주인공이 뒤바뀐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고 봐요. 상대를 자기 연극의 주인공으로 세워둔 채, 정작 본인은 주목받지 못하는 조연 역할을 스스로 자처하고 마는… 그런 어리석은 가짜 사랑.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기감정을 놓쳐버린 우매함이 있는 것이고요.”
“글쎄요. 저는 아무리 들어도 말장난인 것만 같군요. 말은 쉽지만,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이후의 토론은 거의 일방적으로 에바 라일리와 그레디 모리슨의 설전으로 이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던 다른 멤버들은 그들의 열띤 토론을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그레디가 에바에게 물었다.
“좋습니다. 작가가 그런 주제 의식을 가지고 글을 썼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카이든이 마지막까지 진짜 사랑의 감정을 찾지 못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시죠?”
에바는 주저 없이 답했다.
“자기가 주체가 되지 못한 사랑의 감정은 결국 파멸뿐이죠.”
“파멸이라고 하면…?”
“현재 인기 있는 많은 대중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카이든은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라일리 양은 작가가 그런 잘못된 사랑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네, 로건 작가님은 한 인간이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 글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기가 주체가 된 감정을 버렸다고 보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 다른 감정에 휘둘려서 결국 자기를 죽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주인공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요.”
“…….”
“이 소설의 마지막을 보면 죽을 결심을 하고 독약까지 구해서 나탈리를 처음 만났던 술집으로 가죠. 하지만 카이든은 그곳에서 그 독약을 버리고 허탈하게 웃고 있어요.
전 이 순간이 자기감정을 되찾은 주인공이라고 봐요.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것이죠.”
말이 없어진 그레디 모리슨의 모습에 의기양양해진 에바는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이 소설책의 맨 앞장을 보세요.”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휘릭-
휘리릭-
“이 맨 앞장을 보면 ‘윌리엄을 기리며’라고 쓰여있는 것이 보이죠? 작가가 왜 이 사람을 기린다고 했을까요?”
회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기린다는 것은 죽은 사람한테 쓰는 표현 아닌가요?”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나 영감을 준 사람이 죽은 게 아닐까요?”
“단순히 가족이나 친구가 이 책 출간 즈음에 죽어서 기린다는 의미 같은데?”
“글 속에 뭔가를 숨기기 좋아하는 작가란 걸 고려하면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도 같고….”
“라일리 양은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에바가 답을 했다.
“제 생각에는, 이 ‘윌리엄’은 이 시대에 자기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고 봅니다. 일단 이 이름 자체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의 대표 격이니까요.”
이 당시 영국에서 ‘윌리엄’이란 이름은 매우 흔했다. 한국에서의 철수가 평범한 이름의 대명사인 것처럼 말이다.
“즉, 로건 작가님은 이 시대에 가짜 사랑, 가짜 가치에 빠진 모든 이들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볼 수 있죠.”
그레디 모리슨이 에바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에바를 보는 그의 눈빛이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 * *
독서토론회가 마무리되고 다른 회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에바와 그레디의 설전은 계속됐다.
얕잡아 보는 마음으로 그레디를 대했던 에바는 로건 작품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이해에 꽤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레디도 자기의 의도를 이 정도로 정확히 읽고 있는 독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단순히 소설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있어. 하긴 성향상 그럴 수밖에 없겠지.’
강한 성격의 두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빠르게 감정의 소통을 이루고 있었다.
“라일리 양, 혹시 신성로마제국의 ‘괴테’라는 작가를 아시나요?”
“유명한 분이라는 걸 알지만, 번역된 작품만 몇 개 알고 있어요.”
“그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작품은 들어보셨나요?”
“처음 들어보네요.”
태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신성로마제국(훗날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서간체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라이프치히에서 출간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몇 년 뒤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큰 유명세를 떨쳤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출간은 조금 더 지나서였기 때문에 에바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괴테 작가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읽고서 느낀 점은 그 책의 주인공인 베르테르보다 ‘LOVE’의 주인공 카이든이 훨씬 더 성장한 인물이라고 보이더군요.”
시종일관 로건 작품에 대해 비판으로 일관하던 그레디가 그를 인정하는 듯한 얘기를 꺼내자 에바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그렇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제가 비록 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책은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주인공이 끝내 자기감정을 찾지 못한 인물로 표현됐나 보네요?”
“네,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그레디의 얼굴에서 많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소설 제일 앞 장에 나온 ‘윌리엄을 기리며’에서 ‘윌리엄’은 그레디의 친한 친구를 가리켰다.
그 친구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유학 도중 세상을 등졌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읽고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형제와 다를 바 없었던 친구의 죽음에 이어, 그 소설로 인한 자살 열풍에 그레디는 괴테의 작품을 구해서 읽어보게 된다.
그리고 며칠 뒤 ‘LOVE’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레디는 주인공 베르테르가 자기감정이 아닌 사랑하는 여자 로테의 감정에 빠져서 자살조차도 합리화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베르테르가 자기감정의 주인공이 되어 인생을 바라보았더라면, 과연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즉,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수많은 젊은이가 모방 자살을 하는 것도 결국 책 속의 감정에 빠져 어리석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윌리엄’이란 아주 흔한 이름을 통해, 자기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사라져간 수많은 젊은이를 기리고 있었다.
그런데 에바가 그런 그레디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깊이 있는 대화는 마음의 교감을 가지게 하고, 깊은 감정의 교류는 사이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독서클럽에서의 만남은 두 사람을 더욱 가까운 사이로 만들었다.
* * *
그레디 모리슨이 돌아간 후 태오가 에바에게 물었다.
“라일리 양? 오늘 만나본 그레디 모리슨 경이 어떻던가요?”
에바는 얼굴을 붉혔다. 얼버무리며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에 싫다고 단칼에 거절하지 않는 것만 봐도, 이미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더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레디 모리슨 남작은 라일리 양이 맞선 상대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굳이 알려야 할 이유도 없고요. 일단 앞으로 몇 번 더 만나보면서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바는 고개를 숙인 채, 로건 작가의 책만 만지작거렸다.
* * *
에바와 그레디가 교류한 지 보름 정도 지나자,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한 달이 되자, 거의 매일 태오의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는 주로 소설 얘기를 하다 이제는 사회, 문화, 예술 전 분야에 걸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에바 라일리는 그레디 모리슨의 박식함과 놀라운 식견에 매번 탄복했고, 그레디는 그녀의 날카로운 반박과 해석에 귀를 쫑긋 세웠다.
문제는 사랑의 크기와 속도였다.
어떻게 보면, 태오가 분석해 맺어준 커플이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에 에바의 이상형이 나타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에바가 그레디 모리슨을 먼저 좋아했고 그 속도도 매우 빨랐다.
그렇다고 그레디가 에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속도가 다를 뿐이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로 보였다.
* * *
어느 날 카페를 홀로 찾은 에바가 태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샌더슨 경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
“제가 그레디 남작님께 반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레디에 대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에바는 몹시 괴로워했다.
“그리고… 소설 속의 카이든이 보인 가짜 사랑에 대해 제가 지적을 했었는데, 그 카이든이 바로 제가 돼버린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심란하고요.”
책 속의 사랑과 진짜 사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 급격히 뜨거워진 사랑의 열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길을 잃게 하기 쉽다.
에바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감정에 로건의 소설 속 주인공인 카이든처럼 자기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그레디 모리슨 남작의 감정을 자꾸만 살피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태오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는 라일리 양이 소설 속의 카이든보다 훨씬 발전된 인격체라고 봅니다. 최소한 라일리 양은 현재 자기의 감정이 움직이는 모습을 걱정하며 관찰하고 있잖아요? 그저 맹목적으로 몰두하는 게 아니고요.”
“…그런가요?”
“네,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그레디 남작님이 곧 다가올 테니.”
수줍게 웃고 있는 에바의 모습에서 그레디에게 깊이 빠진 그녀의 감정이 느껴졌다.
* * *
며칠 뒤.
태오의 예상대로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레디 역시 에바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다.
“샌더슨 경. 라일리 양이 자꾸 생각나서 미치겠습니다.”
힘들어하는 그레디를 보며 태오는 은근히 기뻐했다.
“하하,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서 라일리 양에게 용기 내 말씀해 보세요. 그녀도 남작님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하니까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레디 모리슨의 표정이 어두웠다.
“…하지만, 라일리 양이 제게 가진 감정은 진짜가 아닐 겁니다. 그저 제가 그녀가 열광하는 로건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빠진 것뿐이죠.
특별한 조건으로 만들어진 감정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아마도 제가 로건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동안 속았다는 생각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저를 떠나고 말 거에요. 그게 두렵습니다.”
카이든의 주체성 없는 감정을 비난했던 에바와 그레디였지만, 정작 사랑에 빠지자 카이든과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모습에 크게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 일주일 뒤, 켄싱턴 T&S 카페 본점.
카페 한구석. 태오가 난감한 표정으로 에바와 그레디를 지켜보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시작됐던 얘기가 신분 계층의 문제에서 큰 말다툼으로 번졌다.
그리고 대화 도중 에바가 로건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순간, 그레디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그놈의 로건! 로건! 당신은 로건이 아니면 그 어떤 근거도 될 수 없는 거요? 로건이 당신의 정신적 지주라도 되는 겁니까? 스스로가 주체가 돼야 하는 것은 사랑뿐만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 해당하는 겁니다! 제발 좀 당신만의 주체적 생각을 가지란 말이오!”
에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제가 언제 로건 작가님을 정신적 지주로 모셨나요? 작가님의 높은 통찰력을 빌린 것뿐이죠. 남작님이나 저나 로건 작가님 정도의 지혜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니까요!”
“로건 작가의 높은 통찰력보다, 라일리 양의 해석이 더 좋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 작가는 그 정도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고요!”
“그걸 남작님이 어떻게 아세요? 설마… 로건 작가님을 질투라도 하시는 건가요?”
“질투? 흥! 당신이야말로 정말 한심하군요. 별 볼 일 없는 통속소설 작가 나부랭이 하나를 가지고 무슨 대단한 존재처럼 쩔쩔매고 앉아 있으니… 쯧쯧.”
순간 에바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사과하세요!”
“뭘요?”
“방금 로건 작가님을 보고 별 볼 일 없는 작가 나부랭이라고 한 말, 사과하시라고요!”
“그런 생각이나 비판도 내 마음대로 못 합니까?”
“제가 로건 작가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줄 잘 알면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결국 저를 철저히 무시하고 조롱하고 있다는 말 아닌가요?”
“그런 형편없는 놈을 좀 뭐라 했다고, 그게 라일리 양을 무시한 거다? 그야말로 당신은 어리석은 ‘카이든’과 다를 바 하나 없군!”
에바는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형편없는 놈? 인제 보니 남작님은 상대해서 안 될 사람이었군요? 정말 실망스러워요.”
그레디 모리슨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나도 당신 같이 소설 나부랭이 하나 떠받드는 사람하고는 상대하고 싶지 않군요!”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정말 아깝네요.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속이 좁을 수가 있죠? 만나본 적도 없는 훌륭한 작가님을 함부로 무시나 하고.”
“됐으니까 그만합시다. 나도 이런 내가 너무 싫으니까!”
“네! 저야말로 그만하고 싶네요!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았으면 해요!”
“그래요. 다시는 보지 맙시다! 다시는!”
“하-”
두 사람의 말다툼을 지켜보면서 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낭만주의 시대로 들어가나 보다. 연인들의 유치한 사랑싸움이 현대와 이리도 비슷해지는 걸 보니….’
하지만 현대에서도 그랬듯, 지금 이들의 감정에 태오가 섣불리 끼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말려봐야 그들의 감정만 더 나빠진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두 사람 간에 사랑의 감정이 굳건해질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 뭔가는 태오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찾아야 한다.
‘그게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니 시간문제일 뿐이야….’
다만 그 시간이 줄어들어야 쓸데없는 감정 낭비도 줄어들 것이다.
태오는 냉랭한 얼굴로 돌아서는 두 사람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