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드러난 비밀
◈ 런던 세인트 제임스(St. James), 프라이스 공작부인 저택.
에바 라일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에 며칠간 시달렸다.
그레디 모리슨 남작과 크게 다툰 다음 날부터였다.
그녀는 그렇게 꼬박 사흘을 침대에 누워 지냈다.
하녀가 이마에 올려놓은 물수건을 갈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이제야 열이 내렸네요. 너무 다행이에요. 어젯밤에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주인마님께서도 밤새 못 주무시고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이 드셨어요.”
에바가 말없이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창틀에 맺힌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에바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그만 하자…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니야. 난 로건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지. 나보다 로건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모습에 잠시 호감이 갔었던 것뿐이야.”
“아가씨? 혼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에바는 대답 없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이구- 왜 일어나시려고요? 배고프세요?”
“나 좀 부축해 줘.”
“네?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어딜 가시려고요? 화장실 가고 싶으세요?”
“부축이나 해줘.”
에바는 하녀의 몸에 기댄 채 바로 옆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책장으로 다가가 로건 작가의 작품 앞에 멈춰 섰다.
오늘부터 다시 ‘LOVE’를 1권 처음부터 모두 읽어볼 참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 그레디 모리슨 남작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잔. 저 책… 젤 위에 있는 1권 좀 꺼내줘.”
에바가 책장 맨 위 칸을 가리키자 하녀는 깜짝 놀라 만류했다.
“아가씨? 이런 몸으로 무슨 책을 보신다고 그러세요? 더 쉬셔야 해요.”
“어서.”
고집 센 에바의 성격을 아는 하녀는 체념하듯 책장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이 책 말씀이시죠?”
에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녀가 책장 문을 열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
책을 바라보고 있던 에바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잠깐! 수잔, 잠깐!”
“네?”
무엇을 봤는지 에바의 퀭한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에바의 놀란 눈동자가 몇 번이고 책장 위아래를 반복적으로 훑었다.
영문을 모르는 하녀는 무슨 일인가 싶어 덩달아 책장을 살폈다.
‘…….’
• LOVE Vol 1. Glimpse
• LOVE Vol 2. Rekindled Flames
• LOVE Vol 3. Absence
• LOVE Vol 4. Destiny’s Dance
• LOVE Vol 5. Yielding to Fate
에바는 고개를 길게 빼 제목이 쓰여 있던 책등의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소설 LOVE의 책등에 쓰여 있는 각 권 소제목 첫 번째 대문자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무심코 연결해 보던 중 어떤 글자가 에바의 눈에 잡힌 것이다.
‘G…… R…… A… D… Y… GRADY…?’
그것은 GRADY… 그레디 모리슨 남작의 이름이 아닌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했다.
소제목이 특이하다고 여겼는데 의도적으로 제일 앞 글자에 맞춰서 제목들을 만든 것 같았다.
가슴이 요동치는 에바였다.
‘그럼… 로건 작가님이… 그레디, 그레디 모리슨 남작이라고?’
에바가 책장을 부여잡고 넋이 나가 있자 하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시냐니까요? 다시 아프신 거예요?”
“…….”
“주인마님을 부를까요?”
에바는 하녀를 뿌리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서재를 서성였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다.
어쩌면 그레디 남작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자신이 지금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은 아닌가 하고 따져보았다.
‘그러고 보면, 두 달 가까이 만나는 내내 어딘가 좀 수상했어.’
남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사람의 사고방식이라고 하기에는 생각이 너무나 유연했다.
무엇보다 로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지나칠 정도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글쓴이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법한 세세한 부분까지도 쉽게 잡아냈다.
‘아- 바보처럼 왜 눈치채지 못했지? 작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말들을 남작님은 거침없이 했었잖아? 그렇지만 상상도 할 수 없었어! 정말, 정말 로건이… 로건 작가님이 그레디 모리슨 남작이었다는 거야?’
에바는 다시 책장으로 달려가 1권부터 5권까지 순서대로 책을 나란히 줄 세워 보았다.
그러자 더욱 명확하게 ‘GRADY’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맞아! 자기 이름을 소제목에 몰래 숨겨 둔 거야! 아- 역시 로건 작가님다워!’
이제 확신이 들자 에바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로건 작가는 그녀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와 만날 수만 있다면, 그가 글을 쓰는 모습을 옆에서 하루만 지켜볼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차를 마시며 작품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곤 했다.
로건 작가에게 깊이 빠진 에바는 어느 순간 모든 남자가 시시하고,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도 잠시뿐,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눠보면 곧 싫증이 났다.
이런 그녀에게 거친 파문을 일으킨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겉모습은 멋이나 부리는 젊은 귀족에 불과한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에바를 압도하다 못해 숨 막히게 했고, 때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가지고 놀았다.
가슴의 파문은 점점 거세졌고, 어느 순간 그레디 남작에게 깊이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로건 작가와 비슷한 사상 때문에 끌리는 것인지, 그레디 자체가 좋아서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레디 모리슨 남작이 로건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순간 에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샌더슨 경! 그분은 알고 있을 거야. 알고서 독서토론회에 데리고 온 거였어! 지금 당장 만나 보면 로건이 정말 그레디 남작인지 알 수 있을 거야!’
대충 옷을 걸친 에바는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가 마부를 찾았다.
* * *
테오 결혼정보회사, 5층 대표실
“샌더슨 경, 얼굴을 못 보니 너무 답답합니다. 그렇다고 라일리 양의 집을 찾아갈 수도 없고. 편지를 보내볼까도 했지만, 분명 절 우습게 여길 겁니다. 하-”
태오 앞에서 그레디 모리슨 남작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며칠 사이에 얼굴도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처음부터 속이지 말걸 그랬어요. 그냥 떳떳이 제가 로건 작가라는 걸 밝히고 만났어야 했는데….”
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죠. 오히려 로건이라는 작가에 깊이 빠져있던 라일리 양이라, 사실대로 밝혔더라면 라일리 양 스스로가 남작님을 진짜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할 수가 있습니다.
전 차라리 지금이 잘됐다고 봐요. 아마 그동안 라일리 양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남작님에 대한 진짜 마음을 냉철하게 따져봤을 거라고 봅니다.”
현대였다면 핸드폰이나 SNS라는 빠르고 좋은 연결 수단이 있지만, 지금 시대에는 그런 문명을 기대할 수 없으니 쉽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더 깊이 있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서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의 통지가 늦어지고 있지만, 태오는 두 사람이 반드시 연결될 것이라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후후, 정말 우습네요.”
“뭐가요?”
“제 모습이 마치 제 소설 속 카이든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제 감정은 아랑곳없이 어딘가에 휩쓸리듯 주체 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그레디 모리슨 남작도 에바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로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 * *
태오는 그레디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1층 카페로 함께 내려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의 마음을 다잡아줘야 할 것 같았다.
힘없이 층계를 내려가 카페 문을 연 그레디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태오가 그의 눈길을 따라가자,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에바가 보였다.
에바는 태오에게 확인해 보기 전에 이곳에서 잠시 마음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곧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매일같이 만나다 며칠간 보지 못한 그레디는 흡사 몇 년은 헤어져 있었던 연인과 마주한 표정이었다.
에바 역시 존경과 사랑이 넘치는 가슴 벅찬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여기서 또 이렇게 해결되는 것 같네. 우연도 여러 번 겹치면 필연이 된다더니, 두 사람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나 보구나, 후후.’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뜨거운 눈빛을 바라보며 절로 웃음이 나오는 태오였다.
◈ 2주 후, 켄싱턴 결혼정보회사 1층 VVIP 상담실.
프라이스 공작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그레디 모리슨 남작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모든 면에서 내가 원했던 조건을 전부 갖추고 있더군요.
에바는 더는 칭얼대지도 않고 아주 얌전해졌어요. 그레디 남작과 결혼만 시켜달라고 애절하게 바라는 눈빛이었죠. 내가 에바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또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고 하자, 그레디 남작은 고아원을 찾아서 추천까지 해주더군요. 지참금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요.”
“네, 그레디 모리슨 남작은 정말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돈이 가진 타락을 몹시 두려워하는 사람이죠.”
“샌더슨 경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얘기야 수도 없이 들었지만,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는지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사실 저도 포기하려던 찰나에 마침 괜찮은 신사가 나타났습니다. 운이 정말 좋았죠.
그리고 손녀분은 공작부인이 생각하시는 그런 철없는 아가씨가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의 상처와 자존심으로 강한 척하고 있었을 뿐이죠.”
공작부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약속대로 시세 가격으로 사거리 건물을 넘기라고 집사에게 말해놓았습니다. 며칠 안에 건물을 매도할 테니 준비를 해주세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자리에 일어서며 공작부인이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두 사람이 몇 달 뒤에 결혼식을 하면 꼭 샌더슨 경이 새로 연다는 결혼식장이란 곳에서 해보고 싶다더군요. 혹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 한번 다 같이 만나 의논했으면 합니다.”
“하하. 네, 그렇게 하시지요.”
◈ 3개월 뒤, 1779년 3월 초. 결혼정보회사 5층 대표실.
쏴아아아-
갑작스러운 장대비가 내리는 자정 무렵.
켄싱턴 하이 스트리트 결혼정보회사 대표실은 여전히 촛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드르륵- 쓱- 쓰윽-
테오 스트리트 완성을 위해 필요한 건물을 거의 다 매입한 태오는, 무도회장과 결혼식장, 책 대여점, 의상실 등을 차례로 오픈했다.
열흘 전에는 그레디 모리슨 남작과 에바 라일리 양의 결혼식이 테오 결혼식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아직 비어있는 상점들이 많아, 태오는 거리 세부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며칠째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 머물며 작업에 몰두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입점할 상점을 분석하고, 결혼 거리를 만들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열심히 살폈다.
그런데, 그때였다.
탁. 탁. 탁.
누군가가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이 밤에 올 사람이 없는데?’
다급하게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까닭 모를 불길함마저 느껴졌다.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세워둔 기다란 불쏘시개를 꽉 거머쥐었다.
덜컹-
그리고 곧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깜짝 놀란 태오가 들어온 사람에게 버럭 소리쳤다.
“누구시오! 누군데 이렇게 함부로….”
그런데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제독님 아니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매슈 벤담 제독이었다.
“제독님께서 이 밤에 여기를 왜…?”
“…….”
“제독님, 일단 앉으시죠.”
쏴아아아-
태오에게 벤담 제독은 너무나 고마운 은인이었다.
해적에게 몰려 무인도에 버려졌을 때 목숨을 구해주었고, 친히 추천장을 써준 덕분에 인텔리젼스 클럽에도 입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마냥 반갑게 맞을 수만은 없었다. 벤담 제독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독님, 이 늦은 시간에 왜 이렇게 비를 맞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지나치시는 길이었나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코트를 입은 채로 소파에 주저앉은 제독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왼쪽 팔에 단단히 묶여 있는 붉은색의 끈이 촛불에 반사돼 번쩍거렸다.
“후우- 후-우-.”
거칠게 내뱉는 벤담 제독 숨소리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흘렀다.
‘…….’
그리고 잠시 뒤, 무겁게 닫혔던 그의 입이 열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메이페어(Mayfair) 자택에 계신 줄 알고 갔다가 안 계신다는 말에 혹시나 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건데… 여기에 이렇게 계시니… 정말 다행이에요.”
“……?”
태오는 불안정한 감정을 쏟아내는 제독 앞에 앉았다.
“제독님?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큰 일이 터졌습니다. 현재 런던 세인트제임스 궁(St James’s Palace)을 중심으로 런던 시내로 통하는 길 대부분이 통제됐습니다.”
“길이 통제되다니요? 아니… 왜요?”
세인트제임스 궁에는 며칠 뒤에 있을 미국독립의 공식 승인식을 위해 조지 3세가 머물고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미국 대표사절단과 행사를 지켜보기 위한 각국의 수장들이 방문해 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태오가 다시 물었다.
“제독님?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겁니까?”
벤담 제독이 충혈된 눈을 치켜뜨며 대답했다.
“지금… 지금 런던 중심가에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태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군부… 반란이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