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행복의 그늘 아래
◈ 맨체스터, 공동주택(Tenement Housing) 단지.
공장에서 30여 분 정도 마차를 타고 가니 스키피오 마셜 씨가 살고 있는 동네가 나타났다.
낮은 임금을 받는 맨체스터의 노동자들이 주로 머무는 집단 거주지로, 협소하고 허름한 구조의 건물들이 따닥따닥 밀집해 있었다.
‘런던 코번트 가든 시장 거리의 낙후된 집들보다 환경이 더 열악한 것 같네….’
남자들은 대부분 공장이나 항구로 일하러 갔는지, 집안에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주로 보였다.
‘집 번호가… 17번이라고 했는데….’
영국의 18세기 중반부터 대도시를 중심으로 집 번호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현대처럼 체계적인 번호가 부여돼 있지 않아, 거리 이름과 집 번호만으로 집을 찾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이 집이 맞는 것 같은데….’
한참을 두리번거리는데, 태오가 보고 있는 주택에서 한 중년 여성이 손에 물동이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부인! 실례지만, 스키피오 마셜 씨의 집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태오를 경계하던 여성은 물동이를 내려놓더니 말없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주택 2층의 제일 끝 방.
다행히 잘 찾아온 것 같았다.
감사의 인사를 건넨 태오는 층계를 올라가 그녀가 알려준 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마셜 박사님, 집에 계십니까?”
한참을 기다리자 집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곧 문이 열렸다.
덜컹-
“누구세… 아니, 샌더슨 경 아니십니까? 여기는 어떻게…?”
깜짝 놀라는 스키피오 박사였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아, 집을 제대로 찾았군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공장에 찾아갔더니, 며칠째 안 나오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돼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스키피오 박사는 당황해하면서도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제가 걱정돼서 오셨다니… 너무 감사하네요.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오세요.”
활짝 문을 열고 환대하는 스키피오 박사를 따라 태오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집은 좁은 데다 창문까지 작아 무척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공장 사무실이 그랬던 것처럼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장에는 사무실에서보다 훨씬 많은 책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책상과 침대는 보기 좋게 정돈이 되어있어서 아늑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 이거 T&S 커피 대표님께 이런 맛없는 차를 대접하게 돼서 너무 죄송하네요.”
그가 내어 온 차는 시중에서 파는 싸구려 터키식 커피였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향이 제법 좋은데요?”
“네, 그나마 제일 나은 커피라서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커피를 들이켜는데 그의 책상 위에 중후한 백인 중년 남자의 초상화가 보였다.
책상 한편에 소중히 모셔놓은 것으로 보아 스키피오 박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 같았다.
“혹시… 저 초상화의 주인공이 마셜 백작님이신가요?”
태오의 물음에 스키피오 박사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백작님이 박사님께는 특별했나 봅니다?”
“네. 사실 저를 낳아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노예로 잡혀 오기 전부터 고아나 마찬가지 신세였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저를 부모처럼 돌봐주고 지원해 주신 마셜 백작님이 제 아버지라고 여기고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흑인 지능에 대한 호기심으로 공부를 시켜보았던 마셜 백작은 스키피오의 뛰어난 머리와 성실함에 반해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베풀어 준 것 같았다.
만약 마셜 백작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스키피오 박사는 대학에서 더 커다란 업적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박사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어디 몸이 불편하신가요?”
움직임으로 봐서는 특별히 신체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감정 상태가 무척 어두운 것으로 보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게 느껴졌다.
“모르겠어요. 며칠 전 마셜 백작님의 기일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지고, 몸도 덩달아 힘이 없어지더군요.
이 상태로 출근했다가는 도리어 공장일에 방해만 될 것 같아서 며칠간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스키피오 박사는 백작의 기일을 맞아 우울해지면서 활력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몸이 아픈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박사님?”
“네.”
“저는 지금 박사님이 어떤 심정인지 잘 알 것 같습니다. 비록 마셜 백작님은 친부모가 아니셨지만, 박사님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시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면서 응원해 주셨으니까요.”
“…….”
“마셜 백작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든 죽기 전에 마셜 박사님의 이후의 삶을 위해 특별한 지원도 생각하셨을 겁니다.”
태오의 말에 스키피오 박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 아마도 그러셨겠지요. 백작님의 성품이라면 충분히 그러시고도 남았을 겁니다.
사실 전 백작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런 큰 품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저 저를 지켜봐 주고 지원해주시는 그 뜻에 감사했고, 그럴수록 어긋나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을 닦아 나가자고 생각했을 뿐이죠.
그리고 제가 나름의 성과를 하나씩 보여드릴 때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주시는 모습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고요.”
스키피오 박사가 마셜 백작의 초상화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막상 백작님이 세상을 떠나시자,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흑인 노예로 돌아가 버린 기분이었습니다. 백작님의 장례식장조차 들어갈 수 없었죠. 도련님들께서는 감히 검둥이 따위가 여길 왜 온 것이냐며 욕하고 내쫓더군요.
대학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저를 예전처럼 취급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갑자기 속살을 드러낸 무서운 세상에서 너무나 힘들고 두려워 돌아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죠.
그렇게 도망치듯 이곳으로 와서 노동자로 나름대로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며칠 전 백작님의 기일이 되니, 갑자기 제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건가 하는 한탄이 들더군요. 하늘에서 저를 지켜볼 백작님이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실까 하고 우울한 마음도 들었고요.”
그의 절망스러운 감정이 태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제는 본론을 꺼내도 될 것 같았다.
“박사님. 사실 전 오래전부터 런던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박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술혁신 이전에 대중들의 교육 수준이 향상돼야 잠재력이 폭발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
“그리고 저는 마셜 백작님이 생각하신 것처럼, 지금 박사님의 지식과 능력을 참으로 아깝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박사님.”
“……?”
“지금부터는 제가 마셜 백작님을 대신해 박사님을 후원하고 지원해드리고 싶습니다.”
“…네? 저를 후원하신다니요?”
느닷없는 제안에 깜짝 놀라는 스키피오 박사였다.
“박사님께서 런던에 제가 설립할 연구소와 전문학교 기관을 이끌어 주십사 하고 지금 제안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아니, 이건 제안이 아니라 꼭 들어달라고 간청드리는 겁니다. 그동안 학교설립을 위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지만, 그곳을 제대로 이끌 분이 없어서 참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박사님이 제 앞에 나타나시니 저로서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마셜 박사님이 학교를 이끌어주신다면 저로서는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을 겁니다.”
“저한테… 학교를 맡기신다고요? 진심이세요?”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 박사님의 사연을 가만히 들어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마셜 백작님이 지금의 박사님을 모습을 보고서 저를 이곳까지 이끄신 게 아닌가 하는….”
박사는 태오의 말에 끝내 눈물을 보였다.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 이곳에서 공장일을 하면서,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것이 전부 쓸모없이 돼버린 것 같아 밤마다 한숨을 내쉬던 스키피오.
그런 그에게 믿기 힘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태오로서도 비로소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한동안 고민했던 런던의 경제연구소와 교육기관 설립 문제는 박사의 참여로 이제 속도를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울먹이는 스키피오 박사를 초상화 속의 마셜 백작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 1781년 7월 하순, 폴 오스본의 저택.
“짐이 참 단출하네요.”
다른 짐마차에 실린 스키피오 박사의 이삿짐을 보면서 피터슨 경이 말했다.
주로 책과 부피가 작은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짐마차 하나면 충분했다.
스키피오 박사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에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은 콜린 피터슨 경이었다.
뛰어난 머리와 출중한 지식을 가지고도, 피부색과 배경 때문에 능력을 발휘 못 하는 걸 늘 안타깝게 여겼던 그였다.
스키피오 박사가 피터슨 경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피터슨 경,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샌더슨 경에게 추천도 피터슨 경이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살아가면서 차차 갚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박사님. 제가 드릴 수 있었던 도움이 너무 적어서 그동안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저도 너무 기쁘네요.”
눈시울을 붉히며 손을 잡는 스키피오 박사에게 피터슨 경도 앞으로의 삶을 응원했다.
태오는 오스본 씨와 캐서린 피터슨 부인과도 아쉬운 작별을 고했고, 다음을 기약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따그닥- 따그닥- 덜컹-
마차가 맨체스터의 항구를 빠져나가 숲속 길로 들어서자 스키피오 박사는 이내 잠이 들었다.
새벽부터 방을 정리하고 짐을 옮기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녹색의 풍경에 눈을 달래던 태오는 문득 패트릭 보가트 경이 떠올랐다.
‘한 달이 지났으니, 이제 곧 페리 후작의 생일 파티겠구나. 그동안 바흐 선생의 가르침으로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하네.’
사실 뭔가를 변화시키기에 한 달은 무척 짧은 시간이다.
더구나 피나는 연습이 필요한 예술 분야라면 더욱 그러할 터.
조금은 걱정스러웠지만, 바흐 선생의 확신에 태오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 며칠 후. 런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집.
“……그때는 제 욕심이 과해 행여나 패트릭 경이 힘들다고 도망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조금 했었습니다.
하지만 웬걸요. 음악의 재미를 느낀 패트릭 경이 오히려 저를 더 못살게 굴더군요, 허허.”
런던에 도착한 태오는 스키피오 마셜 박사를 집에 묵게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바흐의 집을 찾았다.
한 달 동안 패트릭이 얼마나 변했는지 너무나 궁금해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르치면 흡수하는 속도가 정말 남달랐어요. 사실 악보를 볼 줄 모르다 보니 각 음표의 높이와 길이 같은 것도 처음엔 악보를 통해서는 잘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피아노로 음을 잡아주고 길이나 높이를 알려주니 금세 따라 하더군요. 그러더니 며칠도 안 되어 악보마저 잘 읽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오면서 늘 목소리에 대한 놀림 때문에 입을 닫고 자신감 없이 살아왔던 패트릭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목소리를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자기 목소리가 오페라의 대가도 인정하는 천상의 소리였다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더 놀라운 건 소리를 쉽게 내는 요령을 가르쳐 줬더니 음역대가 더 올라갔다는 점입니다.”
“네? 그때보다 더 올라갔다고요? 허- 얼마나 고음일지 저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가네요.”
“하하- 생일 파티장에서 직접 들어보면 아실 겁니다.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이 시대의 귀족은 백수인 것이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
그만큼 시간이 넘쳐나는 패트릭이었기에 배울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정말 다행이네요. 음악을 거의 접하지 않아서 재미를 못 느낄까 봐 걱정했는데, 잘하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그러면 이제 곧 페리 후작님 생신이신데, 그때 부를 곡은 이미 정해졌겠네요? 어떤 곡이죠?”
이제 공연이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곡을 부를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바흐 선생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쉽게도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네? 아직도요?”
“여러 곡이 떠올랐고 연습을 시켜보았어요. 그런데 제 욕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곡이 괜찮은가 싶으면 또 다른 곡도 괜찮게 들리고, 그러다가 새로운 곡을 시켜보면 그것도 괜찮고… 허허, 이게 너무 재주가 뛰어나도 곡을 고르는 게 쉽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도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처음 서는 것이니, 대중적이면서도 패트릭의 고음을 자랑할 만한 딱 맞는 곡을 골라줘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어찌 됐든 첫 무대인데 행여나 그곳에서 기대치 못한 모습과 반응을 마주하면 괜한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감도 떨어질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한 곡을 잡아서 골라주는 게 참 어렵네요.”
“네….”
아무리 패트릭이 천재적이라고 하더라도 며칠 남지 않은 공연이라면 당장 연습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곡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니 낭패였다.
그때 문득 태오의 머릿속에서 영화 ‘파리넬리’가 떠올랐다.
패트릭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도, 영화 속의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태오는 영화 파리넬리에서 주인공이 불렀던 노래 하나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그럼 선생님… 오페라 이다스페(Idaspe) 중에 나오는 아리아, ‘행복의 그늘 아래(Ombra fedele anch’io)’는 어떨까요? 패트릭 경의 목소리에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순간 바흐의 두 눈이 번쩍 치켜떠졌다.
“…행복의 …그늘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