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테오 스쿨 개교
◈ 8개월 후. 1785년 2월, 테오 무역회사 부대표실.
샌더슨 조약이 실행되고 1년이 되는 날.
무역회사의 부대표실에는 태오를 비롯하여 사이먼 휴즈 무역회사 부대표, 스키피오 마셜 상업교육연구소 원장, 콜린 피터슨 경 등 당시 샌더슨 조약을 협상할 때 함께했던 핵심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사이먼 휴즈 부대표는 그동안의 조약 실행에 따른 무역 성과를 간략히 보고한 후, 총평을 덧붙였다.
“……이렇게 보시다시피,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무역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자료에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지난 1년간의 무역교역량과 품목, 손익 차 등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영국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스키피오 마셜 원장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농산물과 공산품의 부가가치가 다르다 보니, 초반 성적이 우리에게 유리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격차가 너무 빨리 벌어지기 시작하네요. 걱정이 들 정도입니다.”
무역협정을 직접 이끌었던 당사자들로서 당연히 기뻐해야 할 것 같은 소식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태오와 스키피오 원장이 예상했던 시나리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프랑스의 경제가 망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적당한 무역 균형을 통해 이득을 챙기려던 조약의 애초 목적이 완전히 퇴색해 버린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경제 붕괴가 가지고 올 후폭풍이 우려스러웠다.
‘프랑스의 미국독립전쟁 참여가 사전에 차단돼 국가 재정에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상태대로라면 3~4년 안에 프랑스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말 거야.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은 결국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소리고, 심지어 내가 알고 있던 시기보다 더 빨리 터질 수도 있다는 건데….’
프랑스 혁명이 가져오게 될 파급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오로서는 이만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뀐 역사를 보면서 한때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면 혁명은 결코 피할 수 없는 흐름인 듯했다.
‘몇 건의 사건들은 내가 알던 역사와 달라졌어. 하지만 시간과 과정이 조금씩 달라질 뿐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정해진 것처럼 펼쳐지고 있다.
휴- 학교가 완공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고, 각종 사업까지 프랑스 혁명 전에 정리하려면 골치가 아주 아프겠는걸. 좀 더 속도를 올려야지, 안 되겠어.’
지금으로서는 학교 설립과 기타 시작한 사업을 프랑스 혁명 전에 자리 잡히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공사 진행에 다른 문제점은 없습니까?”
태오가 공사 진척 사안을 정리한 자료를 넘기면서 스키피오 원장에게 물었다.
전체적인 진행 상황은 계속해서 체크하고 있었지만, 학교와 관련해 세부적인 공사의 진행 점검은 테오 스쿨 학교장이 될 스키피오 마셜 원장이 전적으로 맡고 있다.
“지난번에 급식소 건물 하수구 시설과 관련해서 조금 잡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부 관리와 몇 번 만나 대표님의 의중을 전달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 학교와 같은 큰 건물을 완공하려면 비용과 자재의 조달 문제뿐만 아니라, 꽉 막힌 행정관리들과의 소통도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현대에는 행정 진행 정보가 공개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갖추고 있지만, 18세기에 그런 행정 서비스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다행히 태오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명성으로 인해서 일 처리는 큰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 3년 뒤, 런던 테오 스쿨(Theo School).
1788년 6월.
드디어 런던 코번트 가든 인근에 테오 스쿨(Theo School)이 완공되었다.
4년여 간에 걸친 보수 공사와 새로운 교육동 건설이 차질 없이 진행되어, 중세와 근대 양식의 건물이 잘 어우러진 훌륭한 학습 공간이 탄생했다.
테오 스쿨(Theo School)의 개교식을 축하하기 위해 각계각층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특히 조지 3세를 대신해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이 참석했는데, 미래의 역사에서는 훗날 조지 3세를 이어 왕이 될 조지 4세였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쯤 조지 3세의 정신적인 문제점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하고, 덕분에 왕세자인 웨일스 공이 정치적인 힘을 얻을 때였다.
하지만 바뀐 역사에서 조지 3세는 너무나 건강했고, 평소 방탕한 생활과 도박으로 구설에 자주 올랐던 웨일스 공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개교를 축하드립니다, 샌더슨 자작. 이렇게 훌륭한 교육시설을… 그것도 무상으로 서민들을 위해 운영한다니요. 국왕 폐하께서도 영국 국민을 위한 자작의 공헌에 크게 감동하고 치하하셨습니다. 하하-”
테오 스쿨(Theo School)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은 가난한 서민과 빈민층의 아이들로 제한되었다.
산업혁명기의 고된 노동으로 교육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던 안타까운 아이들에게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셈이다.
테오 스쿨은 단순히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침과 점심 식사는 물론 책과 학용품, 교복 등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일정 성적을 유지하는 경우 장학금 형식의 주급까지도 받을 수 있게 했다.
얼마나 혜택이 많았는지, 처음 입학 설명을 들었던 학부모들은 혹시 사기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 샌더슨 자작의 원대한 구상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학부모들은 크게 기뻐하며 태오를 칭송했다.
-글쎄. 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샌더슨 경 소유의 회사나 호텔, 공장 등에 취업시켜 준대요.
-샌더슨 자작님 회사야 주급도 엄청나고, 대우도 좋아서 서로 일하려고 난리잖아요?
-이번에 무역회사에만 50명 넘게 직원을 뽑았답니다. 새로 생긴 호텔에도 인력이 많이 필요하고요. 애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하면 그런 좋은 곳에서 일할 수가 있대요.
그러나, 귀족들의 눈에는 이런 무상 교육 사업이 못마땅하게 비쳤다.
특히 서민과 빈민층 교육에 대한 무용론을 펼치면서 괜한 헛바람만 넣는 돈 낭비라며 공공연히 비난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하지만 계몽시대에 접어들어 깨어진 사고를 하는 귀족과 지식인들이 많아지면서, 교육 사업은 국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며 태오를 치켜세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조지 왕의 공개적인 지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왕세자님께서 친히 오셔서 폐하의 축하 말을 전해주시니 저로서는 정말이지 크나큰 영광이옵니다.”
“직접 와서 멋진 학교를 둘러보니 자작의 그간 노력이 새삼 존경스럽군요. 정말 좋은 시설과 환경입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하하.”
실세 중의 실세인 태오 앞에서는 왕세자인 웨일스 공마저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웨일스 공 뒤로는 태오와 눈이라도 마주치기 위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귀족들이 줄을 섰다.
태오는 다가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차별 없이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들 중에는 얼굴이 까맣게 탄 학교 주변 농장의 농부들도 보였다.
이들은 태오가 4~5년 전에 사들인 농장의 소작농들이었다.
“자작님. 학교 개교를 정말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자작님.”
“저희 아이들도 이번에 입학을 했어요. 잘 좀 부탁드립니다.”
테오 스트리트에 레스토랑과 예식장, 무도회장과 호텔업 등을 운영하면서 농산물의 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태오는 사업의 효율성을 위해 농경지를 구매하고 소작농을 모집했다.
이 당시 각종 세금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대부분 소작농의 현실.
17세기 말부터 도입되었던 ‘토지세’는 원래 토지 소유자에게 국가의 군비 지출을 위해 부과되는 것이었으나, 토지 소유자들은 이 세금 부담을 임대료에 모두 반영하여 소작농에게 부담을 떠넘겼다.
게다가 농업용품 수입 시 관세의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도 모조리 소작농들에게 전가했다.
이러한 폐해를 잘 알고 있던 태오는 세금 부담을 농지 소유자인 태오 회사가 전적으로 부담하게 하여 소작농들에게는 토지세를 한 푼도 물지 않도록 했다.
농업용품도 태오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사들여 무상으로 대여를 해줌으로써 소작농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 주었다.
덕분에 많이 늘어난 수입에 신이 난 소작농들은 다 함께 합심하여 테오 스쿨의 급식에 필요한 농산물의 상당량을 무료로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태오는 이들의 자발적 기부를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소작농들의 진심을 느낀 후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이러한 태오의 행동은 소작농을 착취하던 대부분의 귀족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
일부 격앙한 귀족들은 단체로 조지 왕을 찾아가 태오의 행동을 즉각 중지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폐하! 샌더슨 자작의 행동은 귀족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이옵니다.
영국의 힘을 등에 업고서 각종 천박한 사업으로 떼돈을 버는 샌더슨 자작이야 소작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오로지 영지에서 나오는 소작으로 가문을 유지해야 하는 수많은 귀족은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 샌더슨 자작의 행위로 인해 소작농들이 반발하여 소작제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면, 귀족 가문의 유지가 매우 어렵게 되고, 결국 그것은 대영제국의 근간이 뿌리째 뽑히는 일이 되고 말 것이옵니다. 부디 폐하께서 이 사안을 엄중히 살펴 샌더슨 자작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어허- 시끄럽소! 샌더슨 경이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벌하란 말이오? 국법에 나온 대로 토지세를 지키고 있는 것이 죄란 말이오? 그게 어찌 귀족제도의 근간을 흔든다는 말이고?
그리고 샌더슨 경이 벌어들이는 엄청난 이익 대부분이 학교와 소작농들을 위해 쓰이고 있는 것은 알고나 하고서 그런 말들을 하는 거요?
경들은 식민지와 각종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이익으로 각종 사치품과 보석에 왕실의 마차보다 더 화려하고 비싼 마차를 굴리면서 살고 있지 않소?
국가를 대신해 국민을 위해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샌더슨 경을 칭찬하지 못할망정 내치라니… 뭐, 풀 한 포기라도 심어봤어야 알지. 에잇- 썩들 물러가시오!
크게 노한 조지 왕은 따지러 온 귀족들에게 오히려 호통 쳤다.
왕자들과 직접 농사를 지어 ‘농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탈했던 그는 소작농의 노고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소작농의 마음을 헤아리는 태오의 태도를 높이 사고 있었다.
조지 왕은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 집행할 것을 명령했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리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역사와 달리 건강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위세가 대단해진 조지 왕의 위엄은 결국 태오의 행동에 그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게 하는 든든한 배경이 됐다.
결국 다른 지주들도 소작농들의 원성에 밀려, 토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들어온 채소들이 정말 싱싱하더군요. 감사합니다.”
“아이고, 자작님.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아이들이 먹는 건데, 항상 좋은 것으로 다 대령하겠습니다, 허허.”
그때 태오 곁으로 굳은 표정의 사이먼 휴즈 부대표가 다가왔다.
그리고 귀에 대고 급한 뉴스를 전했다.
“대표님! 보름 전에 프랑스의 국왕이 과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의 신분별 대표를 불러 170여 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했다고 합니다. 혹 이것이 마셜 교장이 언급했던 프랑스 정부의 붕괴 조짐이 아닐까요?”
‘삼부회 소집’이란 얘기를 듣자마자 눈이 동그래지는 태오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확실히 삼부회를 소집했다고 합니까?”
휴즈 부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정보일 겁니다. 여러 정보원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으니까요. 이게 마셜 교장이 경고한 붕괴의 시발점인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안 그래도 바뀐 역사 속에서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등장할지 태오는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삼부회… 소집이라….’
그런데 드디어,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등장했다.
게다가 실제 역사의 혁명 시기보다 1년이나 이른 시점.
미국독립 승인으로 더 늦춰질지도 모른다는 태오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태오의 심각한 표정에 휴즈 부대표의 얼굴에도 덩달아 긴장감이 서렸다.
“대표님도 마셜 교장처럼 어떤 ‘큰일’이 터지리라고 보시는 겁니까?”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우리도 뭔가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 같네요.”
◈ 4개월 뒤. 1788년 10월, 테오 결혼정보회사.
테오 스쿨(Theo School)이 개교를 한 뒤, 또다시 몇 개월이 정신없이 흘렀다.
조건이 되는 적당한 학생들을 모집하고 그에 걸맞은 교사와 강사들을 모집하면서 테오 스쿨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처음에는 공부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던 사람들이었지만, 테오 스쿨의 주인이 테오 샌더슨 자작이란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믿음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보다는 일을 시켜 가정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들의 생각이 강한 탓에, 학교 모집인원은 개교한 지 5개월이 다 되어갔지만 삼 분의 일도 채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배움의 열망이 가득한 가난한 아이들이 전국에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또한 당장은 학교를 못 다닌다고 해도 언젠가는 배움을 위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서민들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여기에 태오의 조언을 들은 조지 왕이 급격히 불어나는 국가의 수입을 빈민들을 위한 구호 수단에 대거 투입하면서 빈민 계층의 활력은 더욱 커졌다.
보리나 귀리 같은 싼 곡물로 만든 빵이나, 시장에서 남은 음식물 쓰레기로 겨우 생활을 연명하던 가난한 서민들에게 생선과 저렴한 육류가 주기적으로 제공될 수 있었고,
빵 한 덩어리로 다섯 식구가 겨우 버티던 극빈층의 가족들에게는 빵 다섯 덩어리가 매일 돌아갈 정도로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와 활기를 찾아가는 영국의 서민들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170여 년 만에 소집된 삼부회에서 가혹한 세금부과 문제가 조금도 해결되지 않으면서, 흉작으로 굶주린 파리 시민들이 결국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한 달 만에 프랑스에서는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선언’이 발표되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삼부회 소집부터 불과 3개월여 만에 일어난 혁명적인 일들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들고 일어난 민중들은 영주와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관련한 증서들을 닥치는 대로 찢고 불태웠다.
식을 줄 모르고 자꾸만 커지는 민중 봉기에 프랑스의 많은 귀족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해외로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이는 곧 영국 및 유럽의 귀족 사회에도 큰 혼란과 공포로 연결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영국과 유럽의 귀족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프랑스 혁명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