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고백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도착한 공주의 숙소.
다행히 마리아 공주는 집에 있었고, 염려와는 달리 건강하고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공주의 얼굴은 태오의 반가움과 대조적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일단은 별일은 없어 보여서 안심이 됐지만, 표정과 몸짓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태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태오가 먼저 입을 뗐다.
“통 연락이 없으셔서 찾아왔습니다. 혹시 특별히 몸이 불편하셨던 것 아니시지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말없이 고개를 젓는 마리아 공주.
넓은 거실에는 벽난로 근처 안락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도미니치 백작뿐이라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다.
공주는 창문 밖 겨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태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공주님, 혹시 연말에 보내드렸던 신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그런 거세요?”
보름 전 소개 상대의 초상화와 인적 사항을 정리한 서류를 공주 측으로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
마리아 공주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런던에 웬만한 유력가문의 자제는 다 찾아봤습니다. 그런데도 없으시다면, 지방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고요.
도대체 공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만약 제가 고르는 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공주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태오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제 이상형이 바뀐 것 같아요.”
“네?”
“얼마 전 오페라를 관람하다 보니 노래 잘하는 남자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소리만 해대는 사람보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남자와 함께 살면 삶이 더 즐거울 것 같아요.”
공주는 사춘기 소녀라도 된 듯 계속해서 삐딱하게 말했다.
걱정돼서 며칠을 고심하다 왔는데, 괜스레 짜증을 부리는 것 같아 태오도 기분이 상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공주님은 제가 소개해 주는 사람들과 결혼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네요.”
“네, 결혼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당당히 받아치는 공주의 태도에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성질을 냈다.
“그럼, 런던에 계시지 말고 빨리 왕국으로 돌아가세요! 저도 이렇게 계속 공주님 때문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럽습니다! 제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요. 받은 진행비도 다 돌려드리겠습니다!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처음 보는 태오의 화난 모습이었다.
잠시 태오를 바라보던 공주가 풀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몰랐어요.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워하고 계신지는.”
금세 시무룩해진 공주의 얼굴을 보니 다시 마음이 약해지는 태오.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큰돈을 받고 진행하는 일이라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네… 이해해요. 사실 제가 더 죄송하죠. 정말 노력하고 계신데, 제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태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물었다.
“공주님. 런던에 와서 지금껏 마음에 드는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나요? 너무 이상적인 상대만 찾으시는 것 같은데, 눈을 좀 낮추시고 살펴보세요.
제가 소개해 드린 분들과 만나 결혼하시면 크게 문제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만나보신 분 중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정말 없으셨어요?”
“…….”
“그럼 차라리 나폴리 왕국을 위한 사람을 골라보세요. 지금까지 공주님과 성품과 성향이 최대한 맞는 신사들만 소개해 드렸기 때문에 그 누구하고 결혼하셔도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마리아 공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후회가 없을 거라고요? 글쎄요… 전 하나같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답답하던걸요?”
“그중에서 그래도 그나마 덜 답답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덜… 답답한 사람?”
“네! 조금이라도 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던가요?”
“음… 뭐… 한 사람… 있긴 한데….”
태오가 크게 반색하며 물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왜 인제야 그걸 말씀하세요? 그분이 누구시죠? 조금이라도 덜 답답한 그분을 선택해 결혼하시면 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결혼하면 된다는 태오의 말에 공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리.
태오는 그동안 개인감정 때문에 공주의 감정을 세심히 살피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공주님을 덜 답답하게 해주신 그분이 누구죠? 경험상 그게 바로 좋아한다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당장 그분하고 만남을 이어가 봅시다. 그렇게 몇 번 만나다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예요. 제가 정말 장담합니다.”
속상하고 가슴 한 곳이 쓰린 태오였지만, 이 말은 진심이었다.
“누구시죠? 혹시 루손 백작님 자제분?”
“…….”
“아! 필립 자작님이시군요?”
마리아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구죠? 음, 더글라스 후작님은 아닐 테고….”
졸고 있는 도미니치 백작의 눈치를 살핀 공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보세요.”
“네?”
“가까이 와보시라고요.”
공주가 안락의자에 기댄 채 코까지 골고 있는 도미니치 백작을 다시 한번 힐끔 쳐다봤다.
그가 들을까 봐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공주님. 이제 말씀해 보세요.”
가까이 다가온 태오의 귀에 대고 마리아 공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테오… 샌더슨….”
마리아 공주의 뜨거운 열기가 태오의 귀와 뺨을 스쳐 지나갔다.
“런던에 와서… 절 답답하게 해주지 않은 유일한 분은… 샌더슨 경이세요.”
“……!”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린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리아 공주를 쳐다봤다.
또 짓궂은 장난인가 싶어 그녀의 감정부터 살폈다.
그러나 장난이 아니었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의 공주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눈빛과 감정으로 태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테오 결혼정보회사, 5층 대표실.
어떻게 켄싱턴의 회사까지 왔는지 몰랐다.
정신없이 마리아 공주의 집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왔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있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감정에 취해 이성적인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마리아 공주는 작년 말 피카딜리의 무도회장에서 기분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자신이 태오에게 마음을 완전히 뺏겼고,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음을 깨달았다.
당장 만나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당연히 자기를 밀어낼 것 같은 태오 때문에 속앓이를 심하게 앓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보름 넘게 연락할 수 없었고, 마음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바뀌면서 괜스레 태오에 대한 원망만 쌓여갔다.
그리고 태오의 소개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인제는 너무 불편하고 힘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이걸 어쩐다….’
기분이 묘했다.
분명 이성적으로는 고민되고 괴로웠지만,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날아갈 듯 행복했다.
‘하… 나 혼자 짝사랑하는 거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제어할 수 있겠지만….’
상대도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은 이성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아니야. 그래도 이건 절대 아니야! 아닌 건 아니라고. 이쯤에서 확실한 선을 그어야 해!’
◈ 한 달 후
그러나, 모든 이성적 다짐은 사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억지로라도 밀어내려 했던 태오의 결심은 공주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증기처럼 증발해 버렸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의 사랑은 오히려 뜨겁게 타올랐다.
비록 도미니치 백작의 눈을 피해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두 사람의 사랑을 긴장감 있게 만드는 요소에 불과했다.
도미니치 백작만 없다면, 다른 하녀들이나 시종들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관계로 두 사람의 대화는 훨씬 더 자유로웠다.
그러나,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은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기 마련.
낮에 잠시 만나는 것으로는 사랑의 갈증을 도저히 채울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마리아 공주가 한 가지 꾀를 냈다.
공주는 저녁이 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잠자리에 드는 척을 했다.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시녀의 입을 단단히 단속시키고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미리 건물 밖에 대기하고 있던 태오는 그녀를 태우고 집으로 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다 아침 일찍 데려다주곤 했다.
태오는 18세기로 와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리아 공주와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늘 머릿속에 현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던 그였지만, 공주를 만나고부터는 아니었다.
이제는 그 반대가 돼버렸다.
눈을 뜨면 21세기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그래도 공주와 함께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공주와 함께하는 시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 채, 불안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 1789년 5월 초. 테오 스쿨(Theo School), 교장실.
테오는 학교를 방문하고 싶다는 마리아 공주와 함께 테오 스쿨을 찾았다.
그런데 스키피오 마셜 교장으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지난달부터 특별코스로 개설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반의 선생님이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는 테오 스쿨(Theo School)에서는 학문에 두각을 드러내는 몇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이 학생들을 위해 고급교육 과정인 라틴어 문법과 그리스어 반을 개설했다.
이 당시 라틴어는 유럽에서 수 세기에 걸쳐 고등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문 중의 하나였다.
명망 있는 학교에서는 라틴어로 된 텍스트를 공부하고 번역하는 것을 배웠고, 이와 더불어 그리스어를 배워 고전을 공부하는 게 가장 주요한 수업으로 취급되었다.
처음에는 직업전문학교로 생각했지만, 학문에 두각을 보이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보이자, 태오의 결단으로 어렵게 선생을 구해 수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오늘 담당 라틴어 선생님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최소한 몇 달간 수업을 못 할 것 같다는 것이다.
“큰일이네요. 라틴어 선생님을 어렵게 구했었는데… 다시 찾아보더라도 시간이 꽤 걸릴 거 아닙니까?”
태오의 말에 스키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틴어 문법이나 그리스어를 안다고 해도 그걸 가르칠 정도의 실력을 갖춘 분을 찾기가 힘드니 참 고민이네요. 그것도 한 3~4개월 정도만 임시로 가르치는 분을 구해야 하니까요.”
수심 가득한 표정을 보던 마리아 공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제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좀 할 줄 아는데,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잠시 그 수업을 제가 맡아 볼까요?”
태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마리아 양이 라틴어 문법과 그리스어를 하실 수 있으세요?”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와 함께 배웠어요. 재미있어서 그 이후로도 죽 해왔고 어린 동생들도 가르쳐 봤습니다.”
스키피오 교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생들을 가르칠 정도셨다면 자격은 충분하실 것 같네요, 하하.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당분간 맡아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시계를 본 스키피오 교장이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오셨는데, 교실에 한 번 가서 아이들을 만나보시겠습니까? 사실 곧 수업 시간이라 와 있을 겁니다.”
“어머, 정말요? 좋아요, 전. 호호.”
누군가를 가르쳐서 도움을 준다는 것의 기쁨과 보람을 잘 아는 공주 같았다.
* * *
넓은 교실에는 다섯 명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지만, 마리아 공주의 수업은 열정이 넘쳤다.
그저 학생들에게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친근하게만 느끼게 해줘도 좋을 것 같다고 여겼는데, 공주의 실력은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덕분에 수업받는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다.
놀란 눈으로 수업을 지켜보던 스키피오 마셜 교장이 태오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거 참. 이거 설리번 선생님보다 더 수준이 높으신 듯하네요?”
“그래요? 후후.”
미국 대학에서 라틴어가 필수 과목이었던 태오가 듣기에도 공주의 라틴어 실력은 대단했다.
공주의 라틴어 수업을 참관하고 있는데, 스키피오가 교장이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참. 그때 말씀하신 ‘호레이쇼 넬슨’이라는 해군 장교분 말입니다.”
태오는 혹시나 하고 스키피오 교장에게도 넬슨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었다.
스키피오 교장은 군인, 특히 해군 장교들과 꽤 친분이 있었다.
“넬슨이라는 분과 같은 배를 탔던 장교분이 그러시더군요. 작은 키에 강단이 있고, 리더십과 해군에 대한 명예심이 대단하다고.
그런데, 결단력이 좋긴 한데 그게 지나치게 강해서 카리브해상에서 다른 상급 장교나 상인들과 많이 부딪혔고 법적 소송도 휘말리고 해서, 지금은 해군에서 완전히 떠난 상태라고 합니다.”
벤담 제독이 말한 내용과 일치했다.
“혹시 그럼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몇 년 전에 그 소송이 났던 카리브해의 네비스섬에서 한 여성을 만나 결혼을 했고, 지금은 심신을 회복한다면서 이탈리아에 휴양차 여행 중이라고 합니다.”
어이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이 중요한 시기에 여행이라니….
원래 역사가 이랬는지, 아니면 바뀐 역사 때문인지 답답해지는 태오였다.
‘이거 원. 곧 임진왜란이 닥치는데 이순신 장군이 해외로 여행 갔다는 소리나 다를 바 없잖아?’
프랑스 혁명이 그러했듯, 다른 역사의 시간도 달라지고 있다면 넬슨이 실제로 행했던 일의 시간이 어긋나면서 앞으로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위인이라고 해도 운과 시기가 들어맞지 않으면 위대한 역사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달 말에 무슨 행사 때문에 들어올 수도 있다고 하던데. 혹 돌아온다면, 대표님과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말해 둘까요?”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와 직접 만나달라고 부탁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영국에 온다면 어떤 일에 참석하는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우선은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필요했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면 상대는 그만큼 경계하고 마음을 열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미 결혼을 했으니 중매를 핑계로 만나기는 어렵고, 군에서의 명예심이 강한 점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만나서 그를 파악해 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만약 역사의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면, 그 능력을 미리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줄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