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간곡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쩌그렁- 덜커덩.
태오는 안내인의 뒤를 따라 여러 개의 철문을 거쳐 감옥 깊숙이 올라갔다.
안내인은 어둠 속에서도 작은 램프 하나에 의지해 미로 같은 복도와 계단을 요리조리 잘도 찾아갔다.
그런데 뒤에서 본 안내인의 옷이 특이했다.
안내인은 각설이 타령을 하는 거지들처럼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옷들을 여러 겹 껴입고 있었다.
‘감옥 안이 추워서 저렇게 입은 건가?’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옷들은 교수형 당하기 직전의 사형수들로부터 사들인 옷이었다.
교수형을 앞둔 사형수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죽는 것이 억울해, 곰팡이가 피지 않은 깨끗한 빵이나 썩지 않은 신선한 과일 등을 자기 옷과 맞바꾸곤 했다.
“으흐흐흐-.”
계단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 또 다른 철문 앞에 선 안내인은 태오를 힐끔거리며 이유 없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하나를 찾아 커다란 자물쇠를 열었다.
텅- 철커덩. 끼이익-.
“여깁니다, 나으리.”
1.5평이 조금 안 되어 보이는 공간에 죄수 십여 명이 꽉 들어차 있었는데, 어둡고 습기 찬 방안에 몰려 있는 그들의 눈빛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죽어가는 짐승에 가까웠다.
퀭한 눈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죄수들이 비좁은 문 앞을 가로막고 앉아 있자, 안내인은 사정없이 발길질해댔다.
“비켜!”
퍼억-
“비키라고!”
퍼퍽-
걷어차인 죄수들은 힘없이 고꾸라져서 감방 구석으로 처박히거나 스스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안토니 번즈 자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안내인을 쳐다보니 연결된 다른 통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으리, 이쪽 입니다요.”
“더 들어가야 합니까?”
“네. 다 왔습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작은 방이 나왔고, 그곳에 네다섯 명의 죄수가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안내인은 맨 구석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이보슈. 지금 당신을 만나겠다고 어떤 나으리가 왔소이다.”
태오는 다리 사이에 머리를 푹 처박고 있는 남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번즈 자작이 아닌 것 같았다. 남자의 행색이 너무나 더럽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정말 번즈 자작이 맞소?”
“버즈인지 번즈인지는 모르겠지만, 켄트 가문 백작 살인범은 확실합니다.”
안내인이 이번에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 면회 왔다고! 내가 말하는 거 안 들려?”
반응이 없자, 안내인은 갑자기 험악한 눈빛으로 돌변해 발을 높이 쳐들었다.
“정신 못 차리지?”
“잠시만요!”
태오는 걷어차려는 그를 말리면서 은화 한 닢을 얼른 손에 쥐여 주었다.
“잠시 자작과 단둘이 있게 나가주시오.”
그러나 안내인은 여전히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았다. 돈이 부족하다는 눈치였다.
태오가 품에서 반짝이는 은화를 한 닢을 더 꺼내 들자, 그것을 잽싸게 받아든 안내인은 그제야 몇 개 남지 않은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연신 허리를 수그렸다.
“헤헤~ 그럼, 일 보십시오, 나으리. 하지만 규정 때문에 너무 길게는 안 됩니다요. 헤헤~. 물론 뭐··· 특별히 중요한 얘기가 더 있다면 제가 편의를 조금 더 봐 드릴 수는 있습죠. 헤헤헤~.”
태오가 돌아서려는 안내인의 팔을 붙잡았다.
“그 램프도 놔두고 가시오.”
안내인이 손에 든 램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말입니까?”
태오가 은화 하나를 꺼내자 안내인은 잽싸게 램프를 바닥에 내려두고 냉큼 돈을 챙겼다.
“헤헤헤~ 그럼 말씀들 나누십시오. 저는 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내인이 자리를 비키자, 아래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누구시오?”
분명 안토니 번즈 자작의 목소리였다.
“자작님, 접니다. 테오 샌더슨.”
샌더슨이라는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작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아··· 와주셨군요··· 샌더슨 씨···.”
안토니 번즈 자작은 태오를 보는 순간 와락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프랜시스 번즈 백작의 갑작스러운 죽음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백부인 백작을 살해한 범인으로 내몰린 현실이 너무나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자작이었다.
번즈 자작은 곧 자신의 억울함이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재판정에서 열심히 항변했다.
그러나, 배심원단들의 증오 어린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단단한 올가미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누명을 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경황이 없는 백작 부인도, 로드니 치안 판사도, 켄트 가문의 전속 사무변호사들이나 주변의 친구들도··· 그가 백작의 살인마로 몰렸을 때, 의심스러운 눈초리만 보낼 뿐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았다.
기가 막히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한없는 절망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절박한 순간에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엉뚱하게도 테오 샌더슨이었다.
똑똑한 인사들로 넘쳐나는 인텔리젼스 클럽에서 어느 날 불쑥 나타난 테오 샌더슨은 가히 압도적인 지성과 판단력으로 클럽 사람들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테오 샌더슨은 단순히 지식이 풍부하고 말을 잘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같이 얘기를 나눌 때면 상대의 마음속을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는데, 그것은 번즈 자작뿐만 아니라 클럽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평소 테오 샌더슨의 이런 통찰력과 판단력을 흠모하던 안토니 번즈 자작은, 어쩌면 그라면 이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낼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되었고, 그렇게 백작 부인을 통해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털썩-
번즈 자작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태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날씨가 아주 따뜻해졌습니다. 지금 밖에는 자작님이 좋아하는 앵초도 여기저기 많이 피었더라고요.”
“······.”
예상치도 못한 태오의 첫 마디에 안토니 번즈 자작은 자기도 모르게 울컥했다.
몇 주째 창문 하나 없는 어둡고 음침한 감옥 안에서 점점 메말라 가던 마음이, 태오가 건넨 그 말 한마디에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에 어루만져진 기분이었다.
앵초는 영국의 4월에 피는 하트 모양의 분홍색 야생화였는데, 번즈 자작이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 때문에 좋아하던 꽃이었고, 그 얘기를 기억하고 있던 태오였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자작을 보자마자 그가 정말 백작을 죽인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로 산책로를 따라갔는지 등의 정보를 캐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지난번에 들렀던 켄트 가문의 사무변호사들도 끊임없이 그런 사실을 묻기에 바빴다.
분명 자작을 도우러 온 그들이었지만, 안토니의 마음은 알 수 없이 더 답답하고 옥죄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더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태오는 달랐다. 어둠 속에서도 자기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억울한 심정을 이미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사실 태오는 정보가 아닌 감정의 교류를 먼저 시도했고, 자작의 미세한 표정을 읽으면서 심리 상태를 파악했던 것이다.
상대가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감정이 아닌 정보를 캐려고 덤비는 것은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해 입을 닫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태오였다.
또 설사 답을 억지로 듣는다 해도, 그 속에서는 그만큼 진실한 정보를 얻기도 힘들다.
현대 시대의 수사관들이 본격적인 조사 전에 범인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원하는 음식을 배달시켜 주는 것도 그런 감정 교류의 일환이다.
번즈 자작과 제대로 된 감정 교류를 나누지 못한 사무변호사들은 자작의 억울한 호소를 그저 변명으로 치부하고, 백작을 죽인 이유를 알아내는 것에만 매달렸다.
이에 감정이 격해진 안토니 번즈 자작은 입을 꾹 다물게 된 것이다.
인간의 감정에는 그 고유한 에너지가 존재한다. 그래서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달라도 같은 감정을 전달받을 수가 있다.
태오는 자작의 얼굴과 몸짓에서 나오는 감정의 무의식적 신호로 그가 얼마나 슬픈지, 또 얼마나 억울해서 분노에 차 있는지 바로 읽어 낼 수 있었다.
안토니 번즈 자작의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태오는 본격적으로 사건 얘기로 들어갔다.
“그동안 혹시 백작님이 다른 사람이 모르는 원한 관계 같은 것이 있었을까요?”
번즈 자작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전혀 없었습니다. 백작님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 평생 애쓰셨던 분이세요. 저를 혼내실 때도 마지막에는 항상 화내서 미안하다며 따뜻하게 안아주셨죠.”
“자작님이 백작님의 뒤를 밟아 산책로로 들어갔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은 어떻게 나온 걸까요?”
자작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뒤를 밟은 것이 아닙니다. 무도회를 살펴본 후에 함께 식사하자고 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돌아오시지 않는 게 이상해서 제가 나가 본 것이었죠. 한 번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었기에 그날 이상할 정도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산책로를 따라 여기저기 살핀 것이었고요.
그러다 피투성이가 된 백부님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업고 뛰었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보았지만, 절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저는 그저 백작님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아무 생각 없이 업고 뛰기만 했죠.
나중에 지역의 배심원단에서 목격자로 증언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그들이 당시의 제 행동에 의심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태오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번즈 자작의 미세한 눈동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사람의 눈동자는 보통 실제 있었던 일을 회상할 때는 왼쪽 위를 향하고, 상상으로 지어낼 때는 오른쪽 위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에 따라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 태오가 기억하는 자작의 눈동자는 분명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자작의 눈동자는 이야기하는 내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낼 때 왼쪽 위를 향하면서 진짜 본인의 기억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번에 결혼한 백작님이 아들이라도 낳게 된다면, 백작의 후계자 지위를 잃게 될까 봐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태오의 말에 자작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들리면서 그의 송곳니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스콘(scone)···.’
스콘은 인간이 얼굴 표정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인 미세표정 중의 하나로, 마치 늑대가 송곳니를 드러내듯이 강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안토니 번즈 자작은 자신이 지위를 물려받기 위해 프랜시스 번즈 백작을 죽였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에 굉장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작은 백작을 죽이지 않았어.’
태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느끼면서 그 사람의 거짓말을 구분해 낼 수 있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거기다 오랜 심리학 연구와 임상 경험을 통해 그 깊이는 더해 있었다.
직접 마주해 번즈 자작의 숨겨진 감정 메시지를 읽은 태오는 그가 범인이 아님을 확신했다.
번즈 자작이 힘겹게 입을 뗐다.
“샌더슨 씨. 간곡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저는 지금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변호사들은 저를 잔혹한 패륜 살인범으로 단정 짓고, 그저 수임료나 챙기려 형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샌더슨 씨··· 샌더슨 씨가 변호사를 대신해 저를 이 함정에서 구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제가요?”
“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샌더슨 씨만 허락한다면 백작 부인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솔직히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정말 그것보다는··· 백작님의 명예와 저의 명예, 켄트 가문의 명예가 손가락질받고 더럽혀지는 것이 너무나 괴롭습니다. 제발 이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자작님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진실을 가릴 수 없지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그 진실을 밝히고 이곳에서 하루빨리 나올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태오의 힘찬 약속은 끝 모를 절망 속에 허우적대던 안토니 번즈 자작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다.
“고···고맙습니다···흐흑···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태오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부여잡은 채 서럽게 흐느끼는 안토니 번즈 자작이었다.
◈ 다음 날. 햄프스테드(Hampstead), 태오의 집.
‘흠···.’
태오는 아침부터 서재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책상에 올려진 종이에는 프랜시스 번즈 백작의 살인사건과 관련해 그동안 들었던 얘기와 치안판사 로드니 경이 건네준 자료를 손으로 정리한 메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때였다.
똑. 똑. 똑.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뭐? 손님이라니?”
“예약한 아우그스트 머레이 남작이라고 전해주면 알 거라는 데요?”
태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레이 남작이라니? 누구시지? 그런 예약 손님은··· 아··· 이런!”
뭔가 생각이 난 태오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토니 번즈 자작의 문제에 빠져 있다가, 그전에 약속했던 중매 예약 건을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아우그스트 머레이 남작은 인텔리젼스 클럽의 회원은 아니었다. 클럽에 있던 다른 귀족의 소개로 상담 의뢰를 알려온 사람이었다.
연락받았을 당시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약속을 잡았는데, 갑자기 생긴 번즈 자작의 일 때문에, 오늘 오전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