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29
29화 예고된 살인
◈ 루퍼트 윌슨 법정변호사 집무실.
“······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목에 난 경동맥의 상처 크기와 솜씨, 피해자들의 왜소한 체격과 녹색의 홍채, 몸에 부착된 단추나 브로치 등의 분실물 등. 이렇게 피해자들의 많은 부분이 신기할 정도로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온 중매 의뢰인에게서 ······”
법정변호사 윌슨 경과 메이드스톤 치안판사 로드니 경은 진지한 얼굴로 태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 그렇게 중매 의뢰인의 가족들로부터 켄트 가문에서 주최한 무도회에 의뢰인이 참석했다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윌슨 경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켄트 가문이라면, 번즈 백작 가문 아닙니까? 그럼 번즈 백작이 살해된 그 날 무도회에 샌더슨 씨의 중매 의뢰인이 참석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번즈 백작이 살해된 시각에 그 의뢰인이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는 여동생들의 진술도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진짜인지 살피기 위해, 당시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수소문해본 결과 그것이 모두 사실임이 확인됐고요.”
“······.”
“그래서 저는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9건의 살인 사건과 이번 프랜시스 번즈 백작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아우구스트 머레이 남작의 아들 개빈 머레이를 특정했습니다.”
윌슨 경이 태오에게 물었다.
“샌더슨 씨? 하지만 무도회에 참석했다 잠시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번즈 백작을 살해하러 나갔다고 단정 짓기에는 증거가 너무 빈약하지 않을까요? 그전 9건의 살인 사건이 개빈 머레이가 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는 마당에.”
“그렇습니다. 말씀처럼 물적 증거가 빈약합니다. 저는 개빈 머레이가 진범이라고 확신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고요.”
“그런데 샌더슨 씨는 왜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제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오랜 시간 공부한 것 중의 하나가 인간의 정신과 잠재의식에 관한 분야입니다. 저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가려내고 판단할 수 있는 나름의 확고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을 통해서 개빈 머레이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어렵네요.”
“쉽게 말해, 저는 드러나지 않는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을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개빈 머레이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제게 보였고, 제가 연구한 기준에서 평가해보니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살인마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살인마의 요건이라니요?”
18세기 근대사회에서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전혀 없었다.
범죄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어야 발생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살인을 즐기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그만큼 수사기관이 범인을 쫓는 데 일정한 한계에 놓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살인을 즐기는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사람이 하필 9건의 연쇄살인이 발생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하필 참석한 무도회가 살해당한 번즈 백작이 주최한 것이었고. 또 하필 그날 그 시각에 몰래 빠져나갔습니다.
제가 중매 의뢰인으로 우연히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윌슨 경과 로드니 경은 태오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9건의 살인 사건과 번즈 백작 살인 사건에서 보여준 피해자들의 모습은 태오의 설명대로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수많은 살인 사건을 다뤄 본 로드니 경이 무거운 입을 뗐다.
“흠, 30년 넘게 범죄 사건을 다뤄본 사람으로서 부정하기가 어렵군요. 솔직히 샌더슨 씨가 말하는 살인마의 기준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동일 인물이 저지른 살인이라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윌슨 경도 태오가 정리한 기록을 들춰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추리네요. 제가 만든 기록을 토대로 이런 추리를 하셨다는 것도 너무 대단하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연쇄살인마라는 대목도 샌더슨 씨의 설명이라서 그런지 상당한 믿음이 갑니다.
하지만··· 현재 왕좌재판소 내부적으로는 이미 안토니 번즈 자작의 교수형이 결정된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상원 의사당에서 며칠 뒤 열릴 귀족 배심원단의 판단이 필요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데다가 그쪽 분위기도 역시 교수형이 마땅하다고 보고 있고요.
아마도 결정되면, 번즈 자작의 교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겁니다.”
“네? 교수형을 벌써요?”
태오는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빨리 교수형 절차가 진행될 줄은 몰랐다.
“네. 게다가 샌더슨 씨가 참고한, 그러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작성한 살인 피해자 기록을 가지고서는 법적으로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안토니 번즈 자작을 살리기 위해 간교한 술책을 썼다고 오해받기 쉽겠죠.”
태오도 예상했던 바였다.
CCTV 같은 강력한 물증이 없는 사회에서 과거의 문서 기록쯤이야 얼마든지 날조했다고 치부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처럼 살인을 즐기는 정신병자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시대 아닌가.
그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자기의 만족을 위해 10건의 연쇄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이해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태오가 윌슨 경에게 물었다.
“국왕 폐하의 배심원단 평결이 정확히 언제 열리지요?”
“일주일 뒤에 있습니다.”
“음···.”
개빈 머레이가 11번째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이번 오핑턴(Orpington)지역의 무도회에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보를 토대로 분석해 봤을 때, 매너스 공작이 개빈 머레이의 표적이 될 확률은 높았다.
사이코패스는 살인이라는 극도의 흥분상태가 지나가고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이 우울증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우울함이 아니라, 자신의 판타지 실현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우울감이다. 그리고 이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반드시 새로운 사냥에 나서게 된다.
이제 안토니 번즈 자작을 살릴 시간도 기회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귀족 배심원단을 설득할만한 결정적 증거를 찾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결심을 굳힌 태오가 입을 열었다.
“조사한 범죄 간의 간격은 길게는 5개월 짧게는 2개월. 그렇다면 앞으로 곧 연쇄살인이 또다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록이나 증거를 통해 번즈 자작의 무죄를 입증할 수 없다면, 미래의 증거를 통해서 그를 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로드니 경과 윌슨 경의 시선이 태오에게로 향했다.
“네? 미래의··· 증거라니요?”
“저는 개빈 머레이가 곧 11번째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 범죄 현장에 미리 잠복해 범행하려는 그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바로 남작 집을 수색해 그동안에 숨겨 놓았던 피해자들의 유품을 찾아내는 것이죠.”
코에 올려놓았던 금테 안경을 내려놓으며 로드니 경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또 다른 살인을 언제, 어떤 장소에서 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일종의 ‘예고 살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고··· 살인이요?”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개빈 머레이는 특별한 상징과 철저한 계획에 맞춰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고된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죠.”
사이코패스는 강한 충동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범죄를 실행함에 있어서는 상당히 계획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반 범죄자의 살인 사건의 경우 절반 정도가 계획적 범행의 결과지만, 사이코패스가 벌이는 살인은 90% 이상이 계획 범행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예고된 살인을 미리 찾아내자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개빈 머레이의 심리와 움직임은 곧 살인이 발생할 것을 명확히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미리 파악해서 그보다 한발 앞서 잡아내자는 것이죠.”
윌슨 경이 난감해했다.
“허허,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예측만으로 살인을 곧 저지를 것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거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개빈 머레이는 일종의 정신병적인 증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움직임은 예측 불허가 아니라 도리어 예측이 일반인보다 훨씬 더 쉬울 때가 있습니다.
지금 개빈 머레이는 오핑턴 지역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먼저 내려갔습니다. 평소 쉽게 지루해하고, 충동적 성향이 강한 개빈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죠. 저는 내려간 이유가 바로 살인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윌슨 경과 로드니 경도 태오의 구체적 설명과 설득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그 대상이 오핑턴(Orpington) 지역에 머물고 있는 데이비드 매너스 공작이라는 것까지 밝히자, 윌슨 경이 무척 놀란 반응을 보였다.
“데이비드 매너스 공작님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초록색의 홍채를 가지고 계신 것도 맞고요.
게다가 공작님은 국왕 폐하와도 매우 가깝게 지내시는 분입니다. 허, 정말 매너스 공작님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다면 아마 왕실에서도 발칵 뒤집힐 겁니다.”
매너스 공작은 잉글랜드의 정치인으로 젊은 시절 조지 3세 국왕과 함께 공부하면서 깊은 친분을 쌓은 인물이었다.
특히 경제와 관련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조지 3세는 해외 경제정책에 문제가 생겨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부르곤 했다.
“샌더슨 씨가 보기에 지금 그놈이 오핑턴에서 뭘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개빈은 지금 공작님의 동선을 확인하며 계획을 짜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무도회가 열리는 어느 저녁 시간에 공작님의 동태를 살피다 범행을 실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턱을 매만지던 로드니 경이 물었다.
“샌더슨 씨는 정말로 개빈 머레이라는 사람이 연쇄살인범이라고 확신합니까?”
“제발 믿어 주십시오. 정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번즈 자작에게나 매너스 공작님에게나.”
“로드니 치안 판사님. 저는 샌더슨 씨의 말을 따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너무 딱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그간 인텔리젼스 클럽에서 보인 태오의 뛰어난 지성과 지혜에 감탄을 마지않던 로드니 경이었다.
“흠··· 아직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안이 급박한만큼 샌더슨 씨의 그 판단을 믿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보우 스트리트 러너’를 빨리 출동시켜 개빈 머레이를 은밀하게 살펴야 할 것 같군요.”
(**보우 스트리트 러너 (Bow Street Runner) – 1753년 설립된 경찰소속의 단체로, 6명에서 8명으로 구성된 영국 최초의 비밀 형사조직.
이 조직원들은 특이한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는데, 지팡이 위에는 왕관 장식이 있었고, 그 안에 그들의 정식 신분증명서를 말아 넣어 다니면서 비밀 형사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재판소가 있던 런던 보우 거리에서 이들을 볼 수 있어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의 활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태오가 기뻐했다.
“아, 그게 가능할까요? 그 비밀 조직을 투입할 수만 있다면 가장 빠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제가 오늘 바로 연락을 취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드니 경.”
*
윌슨 경의 집무실을 나오는데, 로드니 경이 태오를 불러세웠다.
“샌더슨 씨.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지금 저하고 같이 뉴게이트 감옥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뉴게이트 감옥이라면?”
“네. 번즈 자작 면회를 가려고요.”
지금껏 번즈 자작이 백작을 죽였다고 믿고 있던 로드니 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태오를 만나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네. 잘됐네요. 안 그래도 저도 자작님을 한 번은 뵙고 힘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개빈 머레이의 정체를 밝히는 데 실패한다면, 어쩌면 이번이 번즈 자작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제 마차로 가시죠?”
“네.”
로드니 경은 태오를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뉴게이트 감옥으로 향했다.
*
따가닥. 따가닥.
베네딕트 로드니 경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살해당한 프랜시스 번즈 백작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번즈 백작님은 제게 친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로드니 경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적,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알렉산더 번즈 백작은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에 로드니 경의 가족을 헌신적으로 돌봐주는 것은 물론 기꺼이 후원자까지 돼주었다.
그래서 로드니 경이나 그 동생들은 모두 알렉산더 번즈 백작을 아버지처럼 여겼고, 그의 아들이었던 프랜시스 번즈 백작이나 그 가족과는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만약, 샌더슨 씨의 추리대로 진짜 범인이 뒤늦게 나타나고, 안토니 번즈 자작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전 죽어서도 알렉산더 번즈 백작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침통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노신사의 얼굴에는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근심으로 가득했다.
태오의 마음도 한없이 가라앉았다.
“로드니 경의 진심을 알렉산더 번즈 백작님이 그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안토니 번즈 자작을 살려낼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고 있고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굳은 표정의 로드니 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뉴게이트 감옥
끼이익-
뉴게이트 입구가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형이 집행될 커다란 교수대가 눈에 띄었다.
안토니 번즈 자작을 비롯한 몇 명의 사형수에게 쓰기 위해 꺼내 놓은 것으로 짐작됐다.
로드니 경은 눈앞에 세워진 교수대를 보더니 마치 자신이 가져다 놓은 것처럼 괴로운 표정이었다.
“따라오십시오, 나으리들.”
문지기가 감옥으로 이끌고 가자, 곧 작고 뚱뚱한 안내인이 두 사람을 맞았다. 지난번에 보았던 그자였다.
철커덩-
“헤헤~ 저를 따라오시지요.”
지독한 악취와 메케하고 답답한 공기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어둡고 침침한 계단을 오를 때 여기저기서 들리는 수형자들의 괴성은 쥐나 벌레가 내는 소리와 뒤섞여 불쾌한 기분을 자아냈다.
철컹-
문이 열리고 감옥 깊숙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안토니 번즈 자작의 모습이 보였다.
깡마른 몸,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생기 잃은 눈동자···.
몇 주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깜짝 놀란 로드니 경이 자작의 앙상한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번즈 자작···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힘이 돼주질 못해 그저 미안할 뿐입니다.”
안토니 번즈 자작은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아닙니다···. 치안 판사님이 적극적으로 절 변호해주셨더라도 저는 살인죄를 면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죽기 전에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치안 판사님은 믿지 않으시겠지만··· 전 신께 맹세합니다. 백작님을 제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이 말만큼은 꼭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번즈 자작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았던 로드니 경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작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가득했다.
자신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백작 작위와 돈을 위해 백부를 죽인 파렴치한 살인마가 되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게 됐다는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자작은 창문도 없는 감옥의 벽을 바라보며 멍한 눈으로 물었다.
“밖에는 이미 제 목을 걸 교수대가 나와 있겠지요? 그리고 군중들은 제가 죽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거고요···.”
18세기 말 영국에서 사형판결이 내려지면 계급과 관계없이 공개적인 교수형이 거행되었다.
재밌는 볼거리가 크게 없던 이 당시에, 런던 시내에서 벌어지는 교수형은 시민들에게 서커스보다 더 재밌는 구경거리로 여겨졌다.
덕분에 교수형 소식이 전해지면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의 군중이 감옥 앞으로 모여들었다.
거기다 교수형을 당하는 자들은 대부분 살인이나 강간 등의 흉악범죄자들이었기에 대중들은 온갖 조롱과 욕설을 퍼부으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교수대에 매달리기도 전에 맞아 죽은 자도 있었다.
번즈 자작이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아마도 수많은 군중이 저를 향해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욕을 할 테고, 우리 가문을 모욕하겠지요. 그리고 사형 집행인은 제가 밟고 올라선 의자를 걷어찰지 말지 쇼를 하면서 그들과 함께 저를 조롱할 것이고요. 으흐흑.”
사형 집행인은 일부러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다, 분위기가 최고조에 오르면 사형수가 밟고 올라선 의자를 있는 힘껏 걷어찬다.
그러면 교수형의 하이라이트인 ‘스트랭글러 댄스(Strangler’s dance)’가 시작된다.
발을 받치고 있던 의자가 없어지면, 사형수는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버둥거리게 되는데, 이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해서 ‘스트랭글러 댄스’라고 불렸다.
이때 목을 조이는 올가미를 교묘하게 조절하여 사형수를 바로 죽이지 않음으로써 짧게는 3분, 길게는 15분까지 사형수는 이 죽음의 춤을 추며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중들은 열광했다.
“제가 발버둥 치고 고통으로 사색이 되면 사람들은 환호하고 기뻐하겠죠···. 그때 누군가가 허우적대는 제 발을 잡아줄까요? 오··· 하나님. 하나님이 제 발을 잡아당겨 빨리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실 수만 있다면···.”
교수대에서 버둥거릴 때, 다리를 붙잡고 아래로 힘껏 당겨주면 빨리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만큼 고통을 느끼는 시간도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사형수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사형 집행인에게 뇌물을 건네, 허우적대는 사형수의 다리를 붙잡고 당겨주기도 했다.
번즈 자작이 로드니 경에게 애원하듯 물었다.
“로드니 경께서 제 시신을 거둬 주실 수 있나요? 그 얘기를 해주기 위해 오신 거죠? 켄트 가문의 묘지에는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 춥지 않은 곳에 묻어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더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교수형에 처하고 죽고 난 뒤에도 끝이 아니었다.
시체를 차지하기 위해 사형수의 가족과 해부 실습용 시체가 필요했던 외과 의사의 조수들 사이에서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 광경을 숱하게 보아온 번즈 자작은 죽고 난 뒤에 벌어질 일까지도 걱정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태오는 절망적인 말을 끝없이 쏟아내는 자작의 얼굴에서 수많은 미세 감정을 읽어냈다.
‘감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어. 극도로 불안한 마음은 이미 자신을 교수대에 올려놓고 진짜처럼 상상하면서 비슷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번즈 자작 정도의 감정 상태에서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가 쉽다.
스스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여기겠지만, 불안에 의한 부정적인 생각은 취약한 내면의 감정을 뒤흔들면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것이다.
지금은 미래에 대한 번즈 자작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희망이 필요해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교수대에 오르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염려까지 있었다.
태오가 번즈 자작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부여잡고 말했다.
“자작님.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 얘기 잘 들으세요.”
“···?”
“오늘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작님께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번즈 자작이 눈을 크게 떴다.
“기쁜··· 소식이라니요? 곧 교수형에 처할 제게 대체 무슨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번즈 백작님을 죽인 진짜 범인을··· 찾아냈습니다.”
태오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번즈 자작이었다.
그리고 이내 초점 없던 번즈 자작의 눈에 처음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가 상체를 꼿꼿이 세워 물었다.
“그···그게 무슨 소리죠? 사실인가요? 정말, 정말 백작님을 죽인 놈을 찾았다고요?”
태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잡지는 못했지만, 개빈 머레이가 진범이 확실하다. 그리고 반드시 잡을 것이다.
“정···정말 인가요, 로드니 경?”
자작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로드니 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로드니 경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로드니 경은 태오의 추리에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었지만, 개빈 머레이가 진범이라는 주장에는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번즈 자작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태오의 마음을 읽고 거기에 동참했다.
뜻밖의 희소식에 잠시 기쁨에 찬 자작이었지만, 곧바로 어두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전 아직 이곳에 갇혀 있는 건가요? 범인을 찾았다면서··· 범인이 누구죠?”
“일정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6일. 늦어도 딱 6일만 지나면, 자작님이 좋아하시는 꽃이 핀 메이드스톤 마을의 들판 길을 따라 산책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부디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태오의 말에 다시금 기대감을 보이는 자작이었다.
“아··· 샌더슨 씨.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정말 내게 그런 날이 올 수만 있다면··· 으흐흐흑.”
희망은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도 변하게 할 수 있다.
한없는 절망에 빛을 잃었던 그의 눈빛은 다시금 생기를 얻고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