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안토니 번즈의 눈물
재판이 시작되자, 하얀 가발을 쓰고 고급스러운 검은색 실크 법복을 입은 법정변호사 윌슨 경이 증인석에서 자기 기록물에 대해 증언을 했다.
그리고 뒤이어 증인으로 호명된 태오가 9건의 살인 사건과 프랜시스 번즈 백작의 살인자로 개빈 머레이를 지목한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 마지막으로 번즈 백작의 시신 옆에 나 있던 신발 발자국까지 피고 개빈 머레이의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참고로, 최초 번즈 자작의 신발과 같은 발자국으로 조사가 되었던 것 역시, 재조사 결과 신발 끝부분의 모양이 미세하게 달랐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렇듯 모든 증거물이 개빈 머레이의 살인 행각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태오의 설명이 끝나자 개빈 머레이를 잡을 때 함께 있었던 ‘러너스’의 형사들이 잇달아 당시 현장에서의 상황을 증언하였고, 머레이 남작 집에서 가져온 피해자들의 단추와 브로치, 머리카락 등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번즈 백작의 단추는 백작의 것으로 확인됐고, 추가로 9건의 미제 살인 사건 중에 5건에서 피해자의 물품임이 확인됐으며, 나머지 4건도 확인 중에 있습니다.
조사 결과 그간 개빈 머레이는 12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였고, 범행 후 수집한 피해자들의 부착물을 박제된 여우 안에 은밀히 숨긴 채, 살인 당시의 흥분을 즐겨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타운센드 반장의 진술과 증언이 끝나자 조용하던 배심원단이 술렁였다.
이날 안토니 번즈 자작의 교수형을 예측하고 나왔던 귀족 배심원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크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배심원단 뒤에 자리를 잡고 있던 상류층 귀족 부인들은 그동안 억울한 누명과 옥살이로 피폐해진 번즈 자작의 모습에 안타까움과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마지막 법리 적용에 관한 주장이 길게 오고 간 후, 드디어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번즈 자작과 개빈 머레이의 최후 진술이 있었다.
“안토니 번즈! 일어나서 최후 진술을 하시오!”
옥살이로 쇠약해진 몸에다 긴장된 재판 전개에 진이 다 빠진 탓인지, 번즈 자작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저는··· 처음부터 말했듯이, 절대로··· 프랜시스 번즈 백작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말을 마친 번즈 자작이 비틀거리듯 자기 자리에 앉았다.
“개빈 머레이! 반박할 내용이 있다면 일어나 진술하시오!”
입꼬리를 올린 채 피고석에서 당당히 일어서는 개빈 머레이를 보면서 태오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또 무슨 거짓말을 지어내려는 걸까.’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에 아주 능하다.
이런 성향을 알 리 없는 귀족 배심원 중에는 그의 거짓 증언에 현혹되어 엉뚱한 판단을 내릴 염려도 있었다.
“크크··· 푸하하하.”
피고인 최후 진술을 위해 일어선 개빈 머레이가 느닷없이 허리를 꺾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상원 의사당에 앉아 있는 이백여 명의 귀족 결정권자들과 왕실집사장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큭큭, 이 쓰레기 같은 놈들아!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났나 싶어 아침부터 밀가루를 처바르고 기어 온 거냐? 어서 빨리 내 목을 달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들도 백작처럼 내 손에 목이 잘려 죽을 테니. 크하하하.”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그의 눈빛과 행동에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그러나 태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행여나 현란한 거짓말로 상황을 피하려 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개빈 머레이는 거짓말 대신 자기 행동의 합리화로 방향을 잡은 것 같았다.
범죄형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범죄가 명확히 드러나고, 더는 거짓말로 모면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 범죄를 정당화하거나 과시하려는 욕구를 보인다.
타인의 고통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자기애는 무척 강하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 중의 하나였다.
연쇄살인범이었던 유영철이 여성들에게 함부로 몸을 놀리지 말라거나, 부유층들이 각성해야 한다고 호통을 치며 자기의 살인 행각을 합리화하려던 모습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며 귀족들을 향해 거침없는 욕설을 내뱉던 개빈 머레이가, 순간 말을 멈추고 태오를 광기 어린 눈으로 사납게 째려보았다.
“테오 샌더슨!”
법정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이름을 외치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태오에게로 쏠렸다.
“네놈이 나를 고발해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거 다 알고 있다! 너를 만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어. 너만 아니었으면 난 이 나라를 위해 훨씬 많은 쓰레기를 지워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네 놈만 아니었으면, 난 우리 영국을 더 위대한 국가로 만들 수 있었다고! 샌더슨, 네가 이 나라의 역적이다, 민중의 배반자다!”
확실히 개빈은 자신이 행한 잔학무도한 일조차도 대의명분을 찾고, 모두를 위해 앞장선 위인이라는 망상에 빠진 듯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거짓말로 혼선을 줄 여지는 없어졌고, 개빈 머레이의 범행이 확실해진 이상 안토니 번즈 자작의 무죄를 쉽게 끌어낼 수 있게 됐다.
*
“모두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법정변호사 윌슨 경이 태오를 비롯해 타운센드 반장과 러너스 형사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제가 법정변호사를 하면서 이렇게 극적으로 판결을 뒤집어 본 것은 처음이네요. 그것도 사형집행을 앞둔 억울한 사람을 말이죠. 이게 모두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윌슨 경이 태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테오 샌더슨 씨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 뭐, 사실을 전달하고 도움을 청했을 뿐이죠. 만약 윌슨 경의 그 자세한 기록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고, 여기 계신 보우 스트리트 러너스 형사님들이 없었더라면 잡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야말로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네요.”
타운센드 반장이 평소에는 보기 힘든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제 형사 생활 수십 년 중에 이런 검거 경험은 정말 처음입니다. 너무도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샌더슨 씨께 정말 많이 배운 기분이었습니다. 하하.”
태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그레이 형사님은 상태가 어떠신가요? 상처가 꽤 깊어 보였는데.”
콜링우드 형사가 웃으면 대답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제 집에 갔더니 침대에 누워있는데 얼마나 말이 많고 잘 먹던지, 하하.”
그때 윌슨 경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데이비드 매너스 공작 님이 샌더슨 씨와 여기 러너스 형사님들을 집으로 특별히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제게 전했습니다. 적당한 시간을 알려주시면 제가 말씀드리지요.”
그의 말에 힐 형사와 콜링우드 형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와, 정말인가요? 그때 개빈 머레이를 잡는다고 무도회 음식이 눈에 안 들어왔는데, 끝나고 보니 어찌나 생각이 나던지. 이번에 초대되면 마음껏 먹어야겠네요, 하하.”
태오는 흐뭇한 얼굴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오늘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안토니 번즈 자작은 교수대에 매달려 억울한 죽임을 당했으리라.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모두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드는 태오였다.
*
그날 오후 늦게 번즈 자작이 전격적으로 석방되었다. 예상보다 이른 출소였다.
절차상 다음 날 오후쯤에 석방되리라 여겨졌지만, 사안의 중대성과 자작의 건강을 염려한 매너스 공작의 청으로 조지 왕이 내린 특별명령이었다.
개빈 머레이에 대한 심리는 제출된 증거를 바탕으로 모레 다시 모여 최종 심리를 확정하기로 하였다.
한편, 이날 상원 의사당에 참석했던 귀족들 사이에서는 개빈 머레이라는 잔혹한 연쇄살인마보다, 엉뚱하게도 그가 그토록 절규하며 외치던 ‘테오 샌더슨’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돌았다.
뛰어난 지략으로 억울하게 교수형을 당할 뻔한 번즈 자작을 구해준 소설 같은 뒷얘기와 인텔리젼스 클럽에서의 활약이 다시금 알려지면서, 런던 상류 귀족층 호사가들 사이에 테오 샌더슨의 이름이 급속하게 퍼져나간 것이다.
그리고 태오의 놀라운 추리력으로 데이비드 매너스 공작의 목숨을 구했다는 소식은 권력의 최정점인 조지 3세 영국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 일주일 후
번즈 자작의 무죄 판결이 내려진 다음 날, 상원 의사당의 법정에서는 개빈 머레이에 대한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이례적으로 빠른 사형 판결과 교수형 집행이 진행된 것이다.
사건의 엄중성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이 자칫 사회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한 신속한 결정이었다.
머레이 남작은 자기 아들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명백한 증거들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개빈 머레이는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마지막 순간까지 입에 담지 못할 저주의 말들을 쏟아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악마 같았는지,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 크게 회자될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 런던 햄프스테드, 태오의 집
똑똑.
“들어와.”
덜컹-
하녀 루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인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태오는 루시가 건네준 편지를 건네받았다.
편지에 새겨진 문양을 본 태오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안토니 번즈 자작의 편지였다.
‘서신까지 보낸 걸 보니, 이제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셨나 보군, 후후.’
태오는 가벼운 마음으로 켄트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편지지의 밀랍을 뜯었다.
『··· 지난 몇 달간 폭풍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프랜시스 번즈 백작님이 돌아가신 것만으로 힘들 때, 제게 닥친 살인자라는 누명은 저를 버티게 할 힘마저 잃게 했지요.
그렇게 백부를 살해한 패륜범으로 정신없이 내몰릴 때, 왜 갑자기 테오 샌더슨 씨가 떠올랐는지 지금도 그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운명 같은 신의 은총이 아니었나 합니다.
감옥으로 두 번째 면회를 오셨을 때, 이제 곧 아름답게 꽃이 핀 메이드스톤의 산책길을 걸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때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감옥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평소 기분 좋은 산책길 정도로만 여겼던 그곳이, 그토록 사무치게 그립고 다시 가고 싶은 소중한 곳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모욕과 험담으로 무너져 내린 자존심에, 귀족 배심원 앞에서 받을 치욕에, 그리고 교수대 앞에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조롱거리가 될 저 자신이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여겨 몹쓸 생각마저 했던 저였지만, 이상하게도 샌더슨 씨의 마지막 그 말이 저를 끝까지 버틸 수 있도록 단단히 잡아 주었습니다.
석방된 후, 윌슨 법정변호사님과 로드니 치안 판사님으로부터 샌더슨 씨의 활약을 소상히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듣는 내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더군요.
마지막까지 저를 살리기 위한 샌더슨 씨의 고군분투로 마침내 더러운 누명을 벗고 이렇게 가문의 명예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존경하고 존경하는 샌더슨 씨.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꽃이 핀 메이드스톤의 산책길을 걷는 순간, 정말 간절히 원했던 일이 실현됐다는 벅찬 감정에 부끄럽지만 저는 또다시 눈물을 펑펑 흘려야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강하게 다짐해 봅니다.
어쩌면 다시는 밟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이곳을 그 어디보다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 보자고요.
그리고 샌더슨 씨가 삶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주셨던 만큼, 저도 언젠가는 그 신뢰에 보답할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몸을 추스르는 대로 직접 찾아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동안 몸 건강히 계십시오.
당신의 진정한 벗,
안토니 번즈 백작 』
태오는 편지의 마지막에 쓰인 ‘백작’이란 칭호가 새롭게 다가왔다.
안토니 번즈 백작은 타고난 성품이 프랜시스 번즈 백작과 마찬가지로 어질고 현명하다.
젊은 시절의 실수는 이번 사건이 약이 되어 그를 크게 변하게 하고 성장시킬 것이다.
그리고 프랜시스 번즈 백작이 그러했듯 주민들의 칭송을 받으며, 영국 최고의 백작 가문의 하나답게 훌륭한 귀족으로 자리매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태오는 편지를 곱게 접어 서랍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텅-
창문을 열어젖히자 시원해진 저녁 공기가 기분 좋게 태오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