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46
46화 맥스웰 백작의 아들
◈ 5일 후, 런던 햄프스테드 태오의 서재.
태오는 결혼 중매 의뢰인들의 성향과 특징들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휴, 혼자서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게 점점 힘겨워지네.’
근래 입소문이 돌면서 상담 방문과 문의가 끊이질 않아 고생 중이었다.
일이 없는 날에는 미루어 놓은 회원 자료를 정리하느라 오후 내내 서재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는 세상에서 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똑똑똑.
“들어와.”
덜컹-
루시였다.
“주인님. 지금 헌팅던 남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뭐? 헌팅던 남작님이?”
헌팅던 남작은 인텔리젼스 클럽의 회원으로 태오와 자주 자리를 갖는 친한 사이였다.
“저녁이 다 돼가는 시간에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지? 그래 알았어. 접대실로 모셔. 곧 내려갈 테니까.”
“그런데 남작님 외에 처음 보는 두 분도 함께 오셨습니다.”
의아한 얼굴로 태오가 물었다.
“중매 의뢰로 오신 걸로 보였어?”
루시는 눈치가 무척 빨라 손님의 방문 목적을 곧잘 알아맞히곤 했다.
“그런 것 같진 않았어요. 뭔가 조급해 보이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중매가 아닌 다른 문제로 보였습니다.”
“음··· 알겠어. 고마워 루시.”
“별말씀을요.”
루시가 나가고 태오는 얼른 책상을 정리하고 서재를 나섰다.
‘헌팅던 남작까지 앞세워 오신 걸 보면 급한 사정이 있는 분들인가 본데···. 중매 의뢰 말고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까?’
태오는 서둘러 접대실로 내려갔다.
*
“남작님?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하하, 샌더슨 씨. 그저께 클럽에서 뵙고 또 뵙네요.”
접대실에는 헌팅던 남작 외에 중년의 남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런데 왠지 낯이 익었다.
‘음, 어디서 본 듯한데. 어디서 봤더라···?’
중년의 남녀에게서 나오는 감정은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생김새가 다른 중년 남녀가 동질적인 감정을 보여준다면 대부분 부부관계인 경우가 많다.
특히 사이가 좋은 부부는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표정이나 말투, 몸짓 등도 비슷하게 되는데 두 사람이 딱 그러했다.
거기다 기품 넘치는 태도와 고급스러운 옷을 보니 지체 높은 귀족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에서 묘한 걱정과 불안한 미세 표정이 여러 차례 눈에 들어왔고, 그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감정이 심상치 않았다.
‘흠···’
특히 그 불안감은 부인에게서 더 심해 보였다.
비록 티는 크게 나지 않았지만, 흰색의 론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감정의 변화가 신체 반응으로까지 전달되고 있는 듯했다.
‘중년의 부부에게 닥친 큰일이라··· 서로 의지하는 모습으로 볼 때 부부 문제는 아니고, 그럼 십중팔구 자식 문제겠군. 하지만 루시 말대로 중매 상담으로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뭘까?’
헌팅던 남작이 중년의 남녀를 태오에게 소개했다.
“샌더슨 씨, 여기는 서더크 맥스웰 백작님과 그 부인되십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 급한 일이라서, 제 얄팍한 친분을 이용해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도 없이 이렇게 찾아왔네요.”
헌팅던 남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맥스웰 백작이 먼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닥친 일에 너무 경황이 없다 보니 이런 결례를 범하게 됐습니다. 헌팅던 남작께서 샌더슨 씨의 집을 알고 계신다고 해서 이렇게 모시고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맥스웰 백작 부인도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이 시대의 백작들은 대부분이 고압적이고 고개를 잘 숙이지 않는 편이었다.
물론 급한 일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맥스웰 백작 부부의 기본적인 품성이 온화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들로 보였다.
탁-
루시가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와서 놓고 나가자, 곧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사실 저희는 샌더슨 씨를 며칠 전에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네? 아니 어디서 저를···?”
역시 태오의 느낌대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5일 전, 국왕 폐하께서 윈저성에 초대했을 때 저희도 있었거든요. 국왕 폐하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자리에 저희도 함께했습니다.”
“아··· 네.”
그제야 태오는 그들의 얼굴이 왜 낯이 익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던 데다, 가발과 진한 화장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긴가민가했던 것이다.
차를 몇 모금 마신 후, 급하게 태오를 찾아온 이유를 맥스웰 백작이 담담히 풀어냈다.
“저희에겐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그 아래로 세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3년 전에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그 일로 모든 가족이 힘들어했는데, 특히 둘째 아들 크리스핀이 많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대로 슬픔을 잘 이겨냈지요.”
그리고 반년 전, 둘째 아들 크리스핀은 한 여자를 소개받았고, 이제 열흘 뒤면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정말 기뻤습니다. 며느리 될 아이가 참 예쁘고 심성이 고왔거든요. 물론 우리 크리스핀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고요. 큰아들을 잃은 슬픔이 밝고 명랑한 그 아이로 인해 지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에 일찌감치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게 좋아졌다고 여길 때쯤 일이 터졌다고 한다.
“두 달 전에 죽은 큰아들의 2주기 추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추모식이 끝난 후, 크리스핀이 이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상 증상이라니요?”
맥스웰 백작이 대답을 망설이자, 옆에 있던 백작 부인이 어렵게 입을 뗐다.
“사실··· 작년 1주기 추모식 끝난 직후에 하루 종일 멍하니 벽만 보거나 갑자기 울부짖으며 물건을 때려 부수는 광인(狂人) 같은 이상 행동을 반년 가까이 보였어요. 그렇지만 크리스핀은 어렵게 이겨냈고, 결혼할 여자가 생기고부터는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완전히 돌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두 달 전 2주기 추모식이 끝난 저녁부터 또다시 이전 같은 무서운 증상을 보이고···흐흑···.”
백작 부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큰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인 백작 부부는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맥스웰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급한 마음에 수없이 많은 의사를 수소문해 보고, 각종 치료 방법을 반복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상 증상은 더 심해져만 갔고요.”
“······.”
“영적 능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한 신부님을 찾아갔더니, 추모식 예배당에서 떠돌던 악령이 크리스핀의 머릿속으로 들어간 것이라며 악령 퇴치 의식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따라 큰돈을 들여 며칠 동안 퇴마 의식을 행해봤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빙의나 악령 퇴치 등을 위해 이상한 노래를 부르거나 주문을 외우면서 주술 의식을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식을 주도하는 주술사가 환자에게 악령이 머릿속에서 떠났다는 ‘암시’를 주어 낫게 하는 방식이었는데, 일종의 최면 치료였고 더러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괴이한 치료방식으로 도리어 몸을 상하게 하거나,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저희는 고민 끝에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혼할 집안과 예비 며느리에게도 사정을 솔직하게 전하고 용서를 구했고요. 결혼을 없던 걸로 하든지, 아니면 아들이 깨끗이 낫고 나면 그때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며느리가 될 아이가 우리 아들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나 봅니다. 지난번처럼 자기가 정성껏 옆에서 돌보면 나을 거라면서 무조건 결혼하겠다고 울면서 매달리더군요. 집안 어른들의 허락까지 받았다며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저희는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며칠 전에도 아들을 보러 오겠다고 눈물로 애원하는 걸 저희가 말리느라 고생했습니다. 아들이 행여나 또 폭력적으로 변해 그 아이에게까지 무슨 해를 끼칠까 너무 겁이 났거든요.”
국왕의 초청을 받을 정도의 백작 가문이라면, 꽤 이름난 명문 가문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집의 귀족 작위를 상속받을 아들이라면, 조금 흠이 있다고 해도 서로 결혼하려 들겠지만, 정신병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런데도 결혼을 강행하려고 부모의 허락까지 받아 낸 것을 보면, 며느리 될 여자가 백작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다 정략결혼 중심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결혼이 점점 대세가 되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으리라.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던 맥스웰 백작이 말을 이었다.
“후··· 겉으로는 멀쩡한데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 이토록 부모 마음을 새까맣게 타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후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적인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던 중, 국왕 폐하의 부름을 받고 잠시 윈저성에 가게 됐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샌더슨 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백작 부부가 직접 경험한 태오의 치료 효과는 아들의 회복에 골몰하고 있던 부부에게 어떤 작은 희망을 주었다고 했다.
이상한 곡을 연주한다든지 괴이한 주문을 외치는 의식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온히 숨 쉬고 태오의 말을 따랐을 뿐인데도, 자기들이 가진 근심과 불안감이 확실히 사그라드는 느낌에 굉장히 놀랐다는 것이다.
더구나 며칠 만에 급격히 호전되고 있다는 조지 왕의 상태를 전해 들은 백작 부부는, 태오의 정신치료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결혼식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낫지 않는다면, 저희는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며느리가 될 아이는 절대 고집을 꺾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날 결혼식을 올리지 않더라도 무조건 우리 집으로 들어와 아내로서 아들을 보살필 거라고 하더군요.”
“······.”
“하지만 그게 말이나 됩니까? 아리따운 아가씨가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시댁으로 들어오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끝까지 결혼하겠다면 결혼식만이라도 제대로 올려주고 싶습니다.”
“······.”
“테오 샌더슨 씨! 샌더슨 씨는 국왕 폐하 앞에서 ‘마음의 병’을 알아낼 수 있고, 심지어 약한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그 말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분은 이젠 샌더슨 씨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발 저희 아들의 마음에 난 병이 무엇인지 살펴봐 주시기를 이렇게 간절히 빌겠습니다.”
사연은 딱했지만 난감한 태오였다.
환자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뭐라고 확답을 줄 수 없었다.
얘기만 들어보면 소위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빙의’나 ‘해리성 장애’의 일종 같아 보였지만, 또 한편으론 단순히 심한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로 보이기도 했다.
만약 정신 분열의 증상까지 갔다면, 약물도 없고 제대로 된 의료 기구도 없는 지금의 시대에서 치료 기간이 상당히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영영 고치기 힘들 수도 있었다.
‘음··· 그래도 최근까지 매우 정상적이었는데, 일시적으로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심리요법을 통한 치료가 생각보다 잘 먹힐 수도 있는 상황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직접 만나 봐야지만 결정 내릴 수 있는 문제야.’
열흘밖에 남지 않은 결혼이라면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되든 안 되든 노력을 해서 도움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태오가 백작 부부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늦었고 내일 오전 일찍 제가 직접 방문해서 살펴보도록 하죠.”
태오의 말에 맥스웰 백작 부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샌더슨 씨. 정말 감사합니다···.”
◈ 다음 날. 런던 서더크 맥스웰 백작의 저택.
따그닥. 따그닥.
오전 런던 거리에 깔린 안개는 지나가는 마차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짙게 뒤덮여 있었다.
안개 때문에 조심스럽게 거리를 누비던 마차는 곧 맥스웰 백작 저택으로 들어갔다.
워- 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가 달려 나왔고, 문 앞에는 맥스웰 백작 부부가 친히 마중 나와 있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샌더슨 씨.”
“안개가 너무 짙어서 많이 늦었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태오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작님, 지금 바로 아드님을 만나보고 상태를 알아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까요.”
“아···네, 따라오시죠.”
맥스웰 백작 부부는 태오를 이끌고 2층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 앞에 선 백작 부인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할 만큼 폭력적이더니, 지난주부터는 애가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태입니다. 부모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예요. 평생 저런 지경으로 있을까 봐 이젠 너무 두렵습니다. 흐흑.”
백작 부인은 자식의 피부에 작은 생채기만 생겨도 큰일 난 것으로 생각하는 성격으로 보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갑자기 사람도 구분 못 하는 듯한 아들을 보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미국에서 수많은 정신질환자를 만나고 그들의 부모와 상담해 본 태오로서는 안타까운 백작 부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상태를 직접 보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어두운 얼굴의 맥스웰 백작이 조용히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덜컹-
노크도 없이 들어간 방에는 촛불 몇 개가 덩그러니 켜져 있었다.
커튼이 활짝 열려있음에도 안개 낀 흐린 날씨 때문인지 방안은 어둡게만 느껴졌다.
잘 꾸며진 방의 구석에는 고급스럽고 육중한 마호가니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한 청년이 걸터앉은 채 창밖을 초점 없는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청년은 사람들이 방으로 몰려왔음에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다가간 백작 부인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부드럽게 등을 어루만졌다.
“크리스핀, 네 아픈 곳을 살펴 봐주실 아주 특별한 분을 모시고 왔어.”
그러나 별 반응이 없었다.
태오는 흔들리는 양초의 불빛에 비친 크리스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잘생긴 청년이었다.
백작 부부의 좋은 유전자만 골라서 물려받은 것처럼 수려한 외모였다.
‘······.’
하지만 잠깐 살펴본 그의 얼굴 표정과 경직된 몸에서, 태오의 걱정대로 심상치 않은 감정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깊은 슬픔, 주체하지 못하는 불안, 두려움, 강한 분노···’
온갖 불안과 분노, 슬픔 등이 한데 섞여 폭발할 듯 그를 몰아세웠다.
그 속에는 자기를 향한 끝 모를 분노도 있었고, 어떤 대상에 대한 서운함과 한없는 슬픔의 감정도 느껴졌다.
그 감정의 격정이 너무나 커서 지금 저렇게 조용히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도 백작 부부가 말한 광인(狂人)의 모습이라는 것은 저 감정을 못 견디고 순간 폭발해서 나올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았다.
‘······.’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걱정했던 빙의나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Disorder)의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그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수도 없이 진료해보았던 태오에게 그들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감정선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흠···’
사실 크리스핀에게서 풍기는 감정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크게 상처받은 아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한 후, 그 상처를 해소하지 못한 경우에 보이는 감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태오가 살펴본 맥스웰 백작 부부는 크리스핀이 느끼고 있는 지금의 감정을 만들 사람들은 분명 아니었다.
‘다른 뭔가가 있어. 백작 부부도 모르는, 아니 어쩌면 크리스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상처받은 감정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현재 드러내는 감정은 단순히 지금 만들어진 감정이 아니다.
그 감정의 선을 따라 계속 들어가다 보면 그런 감정이 만들어진 시작점이 반드시 있기 마련.
태오는 크리스핀의 공허한 모습에서 상처 입은 어린아이의 감정이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린 시절의 감정에 상처가 나고 흠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성인이 된 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 감정이 어린 시절 가슴에 담아두기엔 너무 커서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도 어린아이의 감정 세계에서는 큰 트라우마처럼 상처 입고 아물지 못한 채 덮여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타고난 성격과 맞물리면, 성인이 돼서 예기치 않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돌아선 태오가 백작 부부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가시죠?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크리스핀의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은 태오가 백작 부부에게 물었다.
“크리스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얘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형의 죽음과 관련해서요. 그래야 치료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
xx 이 내용은 실제 심리치료 사례를 소설에 맞게 각색한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