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48
48화 형과의 조우 1
백작 부부로부터 사연을 전해 들은 태오는 크리스핀에게서 보이는 이상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됐다.
‘해소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 입은 감정 때문에 마음이 닫혀 버린 것 같아. 봉합되지 못한 그 상처로 인해 스스로 너무 괴로워하고 있지만, 원인을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상태야. 저 감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살펴보고 응어리를 풀어줘야 치료가 될 수 있어.’
사람은 떠올리기 싫거나 심한 상처로 남은 기억은 지울 수가 있다.
하지만 그 기억과 관련한 감정만큼은 지울 수가 없어 그대로 흔적처럼 남게 된다.
결핍되거나 상처 입은 감정은 일정한 과정을 거쳐 스스로 이해할만한 결과를 얻어야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만약 이런 상처 입은 감정을 해소 과정도 없이 그냥 방치해 버리게 되면, 그 감정은 더는 성장하지 못한 채 무의식 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
마치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처럼,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성인이 된 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작처럼 나타난다.
몸은 성장해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상처받고 버려진 감정이 어느 날 불쑥 솟구쳐 올라와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크리스핀 맥스웰의 경우처럼 말이다.
미국병원에서 태오는 환자 내면의 상처를 최면으로 찾아내 치료하는 방식을 자주 택했다.
많은 환자가 태오의 치료법으로 빠르게 완치가 되었고, 그만큼 태오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일부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는 태오의 그런 치료 결과를 두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정신과 과장은 태오의 놀라운 치료 결과를 믿지 못해 자주 설전을 벌였다.
사실 최면을 통해 상처받은 지점을 찾아내 치료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인정되고 있는 정상적인 치료법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좋은 치료 결과가 문제였다.
표준의학의 기준으로 볼 때, 태오의 치료 결과는 이해되지 못할 정도로 훌륭했다.
의사들은 어떤 약물을 썼거나 우연의 일치, 혹은 가짜 환자를 동원한 쇼로 의심했다.
이들이 이렇게 의심하는 데는 최면 의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있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점은 최면을 통해 환자의 무의식 세계로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환자가 실제로 무의식 상태에 들어갔는지는 의료진도 환자 본인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치료를 위한 진짜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한 것인지, 환자의 상상 속의 무의식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나 측정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전설적인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가 최면기법의 강력한 치유력을 잘 알면서도 최면을 포기하고 자유연상 기법을 통해 정신분석학으로 나간 것도, 결국 최면이 가진 객관화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에 타고났던 태오는 환자가 치료에 필요한 무의식의 세계에 접근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환자의 무의식 속에 상처 입은 감정을 누구보다 빠르게 잡아냈고, 그 결과 치료에 최소 1~2년이 걸리는 환자를 단 며칠 만에 깨끗이 완치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 주위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
덜컹-
백작 부부와 함께 크리스핀의 방에 들어간 태오가 그의 옆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그러나 크리스핀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넋을 잃은 눈으로 창밖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핀은 조현병은 아니었지만, 현재 그와 비슷한 유형의 감정 상태에 빠진듯했다.
보통 신체적으로 정상적이었던 가족이 정신적으로 이상 행동을 보이면, 가족 구성원들은 누구보다 빨리 눈치채고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가족들의 감정이 환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면서 환자의 감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 쉽다.
따라서 이런 환자를 대할 때는 뭔가 문제가 생긴 사람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지우고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평소와 같은 따뜻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극단적일 정도의 편안함을 줄 수 있어야 비로소 그 환자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늘 함께하면서 작은 표정조차 기억하고 있는 가족에게 갑자기 변해버린 환자의 모습은 당황스럽고 무섭기만 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편안한 감정을 만들어 환자를 살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놀라는 마음으로 꽉 차게 되고, 그 감정은 그대로 환자에게 전달되기 쉽다.
따라서 환자와 대화를 시도하려면 그러한 불안한 감정을 품지 말고, 간단명료한 대화 주제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깊은 혼란 상태에 빠져있는 환자이기에, 조금만 추상적이고 복잡한 주제를 던져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환자는 대화 자체보다는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자신에게 우호적인지 아니면 적대적인지를 매우 민감하게 살피기 때문에, 최대한 호의적이고 따뜻한 감정으로 다가서야 한다.
하지만 크리스핀에게 말을 걸었던 가족들은 놀라고 두려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을 테고, 집으로 방문한 의사나 약제사들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감정을 더욱 격앙시켰을 것이다.
아물지 못하고 상처받았던 감정으로 인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크리스핀은 자신도 제어 못 할 폭력성과 주변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면서 서서히 입을 닫았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크리스핀에게는 진정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품고 다가서야 한다.
또한 그가 비록 평소 볼 수 없던 행동이나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절대 놀라거나 이상하게 보지 말고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어야 했다.
감정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치료는 이렇게 그 사람에 대한 존중과 편안한 접근이 전제되어야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툭-
태오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있는 약봉지를 들면서 크리스핀과 부드럽게 시선을 마주쳤다.
“여기. 약봉지가. 있네요?”
태오는 천천히 또박또박 끊어서 말을 했다.
하지만 태오의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편안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정말 그 어떤 문제도 없는 것처럼 평온함이 가득했다.
수많은 환자를 치유하고 그들의 감정을 읽으면서 자기감정을 누구보다 잘 컨트롤 할 수 있는 태오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대로 크리스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순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했던 크리스핀 맥스웰의 눈썹과 눈의 미세표정이 태오의 목소리에 반응해 움직이는 것이 포착됐다.
“저는. 맥스웰 경이. 약을 먹지 않아서. 마음이 무척. 놓입니다.”
이런 환자에게 감정이 실린 말을 할 때는 반드시 1인칭의 주어를 통해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또한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환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분명하고 천천히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하는 말을 이해했는지 면밀히 체크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태오는 크리스핀의 눈빛을 통해 감정을 읽어 내려갔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 조금씩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고.’
약봉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태오가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저런 약들을 먹으면. 머리가 아프고. 배까지 아팠거든요. 그러니. 맥스웰 경이. 먹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드디어 크리스핀이 태오의 말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됐다! 지금부터다!’
크리스핀의 감정의 변화를 잡은 태오가 재빨리 말을 건넸다.
“형 다니엘이. 자꾸만 생각나죠?”
“······.”
“그런데 형 생각만 하면. 미칠 듯이 감정이 널뛰고. 한없이 우울하고.”
“······.”
“하지만 이 이상한 감정이 왜 그런지. 도무지 모르겠고?”
그 순간이었다.
그 누가 불러도 꼼짝하지 않던 크리스핀이 태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많은 환자를 치료했던 태오에겐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백작 부부로서는 정말 깜짝 놀랄 일이었다.
“아··· 이럴 수가, 우리 크리스핀··· 크리스핀의 눈빛이 또렷해지고 있어요. 아···”
2주기 추모식 이후 무서울 정도로 난폭해지나 싶더니, 지난주부터는 가족들의 물음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온 의사의 진찰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태오의 평범한 말 몇 마디에 사람다운 반응을 보이니, 백작 부부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태오의 목소리는 일반인이 듣기에는 평범한 음성에 불과했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감정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강한 힘이 있었다.
상대의 감정을 읽는 타고난 감각을 충분히 발휘해, 환자가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선에서 접근하는 데다, 오랜 시간 심리치료를 해오면서 훈련된 태오의 에너지가 크리스핀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어요? 어때요? 이제 혼자서 고민하지 말고. 저와 함께. 고통을 나눠보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면. 크리스핀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태오의 목소리에 크리스핀의 표정과 몸짓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태오는 그런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현대에서 행했던 치료법이 통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상처의 근원을 파헤쳐 볼 시간이다.
*
“침대에 편하게 누워보실래요?”
육체에 병이 들면 상처가 난 몸을 들여봐야 하듯이, 정신에 병이 들면 상처 난 마음을 들여봐야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환자가 가지는 의식을 밀어내고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 감정을 읽는 것이 우선이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한 방법의 하나가 최면.
심리치료를 위해 최면을 걸어 직접 감정을 살펴보는 작업은 태오가 즐겨 쓰던 방법이기도 했다.
거기다 크리스핀은 최면감수성까지 높은 편이라 최면을 걸기가 더 수월했다.
백작 부부는 순한 양처럼 행동하는 아들의 모습을 그저 신기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백작님. 그럼 지금부터 아드님의 마음의 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네, 네. 그럼요, 그럼요.”
21세기에서 심리치료를 하는 경우, 간혹 최면 치료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이 있었다.
최면을 주술이나 미신처럼 여기는 탓이었다.
그러나 신과 영혼, 그리고 악마가 실제 주변에 돌아다닌다고 굳게 믿는 18세기라 그런지 오히려 태오의 최면 치료에 더 신뢰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21세기보다 18세기에서 최면 치료 적용이 훨씬 더 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 크리스핀.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최대한 천천히 뱉어냅니다. 온몸에 힘을 쭉 빼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고 생각하세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입니다. 지금 당신의 눈 앞에······”
자라지 못한 감정은 어린 시절에 쌓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태오는 크리스핀을 어린 시절로 유도했다.
“자, 이제 당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딱-
태오의 경쾌한 핑거스냅 소리와 함께 크리스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종일관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옅게 퍼졌다.
“앞에 뭐가 보입니까?”
이제는 입까지 벌려 아이처럼 웃고 있는 크리스핀이었다.
“형이 저를 찾고 있어요. 하하, 내가 숨은 곳을 지나쳤어요.”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나 보죠?”
“네. 형이 제 이름을 불러요.”
“몇 살쯤으로 보입니까?”
“다섯 살인 것 같아요.”
행복한 감정이 그의 표정과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를 지켜보는 백작 부부는 아들의 환한 미소에 입을 틀어막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달 가까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해맑은 모습이었다.
이후에 계속된 크리스핀의 말속에는 형이나 부모님, 그리고 여동생들과 보냈던 즐거운 시간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었고, 느껴지는 무의식 속의 감정도 행복으로 충만했다.
아무래도 강한 무의식이 불행한 기억은 억누르고, 행복한 기억만 떠오르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상처를 찾아낼 수 없다.
슬프고 가슴 아픈 기억을 집중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태오가 크리스핀의 이마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자, 이제 셋을 세면 행복했던 기억보다 슬프고, 억울하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곧장 가게 됩니다. 하나, 둘, 셋.”
딱-
미소 짓고 있던 크리스핀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먹이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내 숨죽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흐흑”
“왜 울고 있나요?”
“흐흑···.”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죠?”
깊고 슬픈 감정이 그의 얼굴에 묻어 나오면서 태오의 감정까지 움직였다.
“울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일이 생긴 것인지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울음을 꾹꾹 참던 크리스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이··· 제 잘못을 대신 뒤집어썼어요. 저는 비겁하게 형 뒤에서 모른 척하고 있고요. 저러면 안 됐는데··· 부모님께 지금 형이 혼나고 있어요. 무서워요···.”
“당신은 몇 살로 보이나요?”
“다섯 살인 것 같아요. 아··· 바보처럼 더 멀리 도망가서 혼나는 형을 지켜만 보고 있어요.”
크리스핀은 정말 몰래 숨어 지켜보는 듯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거머쥐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도망가서 지켜보니 눈앞에 뭐가 보이나요?”
“형이 한참을 혼나고 뒤돌아섰어요. 표정이 많이 안 좋아요.”
“형에게 다가가서 미안하다고 해보세요.”
크리스핀이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 못해요! 형 표정이 너무 무서워요. 그래서 지금도 바보처럼 숨어 있어요.”
“숨지 말고 형한테 다가가 보세요.”
“너무 미안해요. 그리고 짜증을 낼까 봐 두려워요.”
“자, 저를 믿고 한 번 가보세요. 그리고 말해 주세요.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태오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한 표정의 크리스핀이 무의식 속에서 형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의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형 다니엘에게 다가서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