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18th century, he founded a marital information company in London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에반스 자작 집으로
태오는 팔머 남작의 총관리인인 마틴 씨를 통해 에반스 자작 댁에 방문을 의뢰했다.
자메이카 마당발로 이름난 마틴 씨 인지라 어렵지 않게 자작 부인에게 태오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마틴 씨는 결혼 관련해서 태오가 할 말이 있다는 식으로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에반스 자작 부인은 바로 다음 날 저녁 식사에 태오를 초대했다.
마틴 씨의 말에 따르면 샌더슨 경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작 부인이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고 한다.
‘다행이긴 한데···.’
원수지간이 돼버린 집안 사이를 중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18세기에서 가문 간의 대립은 목숨을 건 갈등이었다.
하지만 그냥 손 놓고 있기에는 엘리사의 상태가 너무 우려스러웠다.
일단은 에반스 자작 집안의 분위기를 보고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판단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다음 날, 제이콥 에반스 자작의 저택.
태오의 연락을 받은 에반스 자작 집에서는 직접 마차까지 보내주는 정성을 보였다.
아마도 자작 부인은 결혼 상담을 위해 태오가 오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각. 따각.
에반스 자작의 집은 인근의 다른 농장들과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외딴곳에 있었다.
보내온 마차를 타고 1시간 정도를 지나, 좁고 긴 언덕길로 한참을 올라가서야 큰 규모의 저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허- 잘 살기는 잘 사나 보구나.’
에반스 자작의 저택은 그레이 경이나 버틀러 경의 집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에 웅장함을 자랑하는 신식 석조건물이었다.
저택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으로 펼쳐진 농장의 크기도 광활했다.
얼마나 큰 규모의 농장인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농기구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앞마당 한편에 세워둔 마차도 종류별로 여러 대였다.
‘대단하네. 자메이카 전체에서도 부자로 손꼽힐 만해.’
그런데, 입구로 들어서면서 조금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마차를 몰고 온 젊은 흑인 노예도 그랬지만, 농장 주위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옮기고 있는 흑인 노예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노예들의 감정이 무척 안 좋아 보이네.’
물건을 이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흑인 노예들의 표정이 어둡다 못해 살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얀 흰자위를 번득이며 태오를 훔쳐보는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과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허공 사이를 가르는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들렸다.
휘이익- 쫘악-
“크아악-”
비명에 놀란 태오가 반사적으로 소리 난 곳을 찾았다.
멀리 보이는 커다란 창고 앞이었다.
쉐에엑- 쫘악-
“크악!”
한 젊은 흑인 노예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근처에서 덩치 큰 백인 관리인이 긴 채찍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이고 가던 포대와 함께 쓰러진 노예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휙 – 쫘악-
지켜보는 동료 노예들의 표정에는 증오심이 가득했다.
태오도 바로 느껴질 정도로 그들이 가진 분노의 깊이는 강렬했다.
‘무역선에서 막 도착했을 때의 공포심이나 두려움 같은 성격이 아니야···.’
그들의 감정은 울분과 분노가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조절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해 보였다.
백인 관리인의 행동을 당장에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사실 저런 모습들은 노동강도가 높기로 유명한 18세기의 자메이카에서는 너무나 흔한 일상이었다.
‘제이콥 에반스 자작의 성격이 포악해 노예들을 너무 심하게 다룬다더니··· 그 사람 때문에 관리인들까지 저 모양이구나.’
태오는 괴로운 마음에 도망치듯 현관으로 올라섰다.
*
“어서 오세요. 샌더슨 경.”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작 부인.”
귀족 작위를 가진 남편이 사망해 큰아들이 작위를 물려받게 되면, 사망한 남편의 아내 역시 작위 명칭을 며느리에게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큰아들에게 아직 배우자가 없다면, 어머니는 죽은 남편의 귀족작위 명칭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에반스 부인 역시, 큰아들인 제이콥 에반스 자작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관계로 여전히 자작 부인으로 불렸다.
“아닙니다. 샌더슨 경께서 우리 집에 오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 감사하네요.”
집에는 에반스 자작 부인과 둘째 아들 레오나드, 셋째 아들 헨리, 그리고 막내딸 그레이스가 있었다.
레오나드는 태오의 방문에 긴장한 기색이었다. 엘리사 문제로 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이콥 에반스 자작님은 안 계시나 보네요?”
“네, 자메이카 귀족회의에서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다고 해서 나갔습니다. 제이콥이 그곳에서 의장직을 맡은 터라 반드시 참석해야 하거든요. 호호.”
자메이카의 농장주 중에는 평민 신분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자작이라는 신분이 이곳에선 공작 가문처럼 대접받는 듯했다.
자작 부인은 유명 인사인 태오가 먼저 연락한 이유도, 자기들의 좋은 신분과 재력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태오는 그들과 함께 거실과 바로 연결된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다양한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식사가 시작되자 자작 부인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 집 큰딸이 작년부터 런던의 친척 집에 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한 클럽에서 샌더슨 경을 몇 번 봤다고 어찌나 자랑하던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 이렇게 샌더슨 경이 오셨다는 걸 안다면 아마 놀라서 까무러칠 거예요. 호호.”
여성들이 드나드는 클럽이라면 알맥스 클럽일 것이다.
“클럽이라면··· 혹시 알맥스 클럽인가요? 그럼 제가 얼굴을 알 수도 있겠네요.”
“아! 맞아요, 맞아. 알맥스 클럽. 하지만 샌더슨 경은 기억 못 하실 거예요. 애가 워낙 부끄러움이 많아서 감히 다가서지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호호.”
에반스 자작 부인은 신이 나 있었다.
그동안 딸의 편지를 통해 들은 런던 사교계 이야기를 주변의 부인들에게 자랑하듯 떠들고 다녔었다.
런던 사교계에 관심이 많은 자메이카의 부인들은 에반스 자작 부인의 색다른 얘기에 큰 흥미를 느끼고 경청하곤 했다.
그러다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큰아들까지 무모한 결투로 다리에 장애를 입자 자작 부인은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주변 사람들이 은근히 자기 집안을 깔보고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작 부인은 딸들을 런던에 유망한 귀족 집의 아들과 결혼시켜, 자메이카 부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런던 최고의 중매 사업가인 샌더슨 경이 찾아왔으니, 자작 부인으로서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저택이 참 훌륭하군요?”
“네. 원래는 다른 곳에 살다가, 저희 남편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곳에 완공했답니다. 이 집을 짓는다고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가셨네요.”
“아··· 네.”
분위기가 처지자 자작 부인이 화제를 음식으로 돌렸다.
“샌더슨 경, 이것 좀 드셔보세요. 카리브해에서 건져 올린 가재인데, 갓 잡아온 것이라 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자작 부인. 음식들이 정말 정갈하고 맛있네요.”
“그래요? 호호. 입맛에 맞는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특별히 신경 썼으니 많이 드세요.”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셋째 아들인 헨리 에반스가 물었다.
“샌더슨 경, 제가 듣기론 이곳에서 커피 농장을 하실 예정이라고 하시던데요?”
“네, 그렇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런던에서 사업을 하시다가 이곳에서 커피 농장이라니요.”
“우연한 기회가 생겨서요, 하하.”
에반스 자작 집안의 사람들은 생각과 달리 그렇게 유별나 보이지 않았다.
이 시대의 귀족이 가지는 특유의 거만함은 있었지만, 상대를 무시한다거나 도를 넘은 이기적인 성향 같은 것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의 에너지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러 면에서 버틀러 경의 집안사람들과 꽤 잘 어울릴만한 성격들이었다.
아이작 에반스 자작이 살아 있을 때 두 집안이 친하게 지냈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흠,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제이콥 에반스 자작이 좋지 못한 상황을 만드는 주범이라는 건데···.’
가족 중에 부정적인 감정을 퍼트리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전체 가족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쉽다.
더구나 그 사람이 가족의 가장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커진다.
‘아이작 에반스 자작이 돌아가신 이때, 그나마 제이콥 에반스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작 부인밖에 없어···.’
일단은 자작 부인을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였다.
태오는 기회를 엿보다, 에반스 자작 부인에게 엘리사의 얘기를 꺼냈다.
“부인. 실은 제가 버틀러 경의 부탁으로 그 집 막내 따님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버틀러 경의 막내 딸이라면···”
“네. 엘리사 버틀러 양입니다. 최근에 몸이 무척 좋지 않거든요.”
엘리사가 아프다는 얘기에 자작 부인을 비롯해 다른 가족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이미 알고 있어. 그리고 걱정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생각하고 호의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저도 둘째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하던 아이인데 어디가 그렇게 안 좋은 거죠?”
“사실 제가 마틴 씨에게 부탁해서 자작님 댁에 오게 된 것도 엘리사 버틀러 양의 문제 때문입니다.”
순간 자작 부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아이의 문제 때문에 우리 집에 들렀다니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엘리사의 치료를 위해 레오나드 경을 버틀러 경의 집으로 부르게 했던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런데 자작님께서 레오나드 경을 더는 부르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자작 부인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저는 우리 아이들을 회원으로 기록해 런던 귀족 집안과 연결해 주려고 찾아오신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게 아니었나 보군요.”
그러나 그녀의 싸늘한 기운과는 달리, 엘리사와 레오나드의 관계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 그들의 애틋함을 인정하고 있는 눈치였다.
더구나 장애를 입은 제이콥의 일로 폭발할 것 같았던 분노도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식어버린 모습이었다.
결국, 지금 그녀가 보여주는 반감은 자신이 가졌던 애정에 관한 섭섭함이었지, 엘리사 양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아니었다.
‘엘리사 양을 자작 집에서도 꽤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어떻게 잘하면 설득이 될 것도 같은데?’
자작 부인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의 엘리사에 대한 좋은 감정은 태오에게 밀어붙여 볼 자신감을 주었다.
“저는 런던에서 중매 소개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당사자들의 성향과 실제로 만났을 때 어우러지는 두 사람의 결합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결과로 맺어진 커플들은 결혼하고 나서도 서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았고요.”
차를 한 모금 마신 태오가 말을 이었다.
“자작 부인.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저 지참금이 많고 신분이 높으면 좋은 배우자감이었지만, 지금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태오는 잠시 레오나드를 바라보다, 자작 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 양과 레오나드 경은 제가 지금까지 성사했던 어떤 커플보다도 서로에게 잘 맞는 상대입니다. 당연히 결혼 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고요.”
“하지만···”
말을 흐리는 에반스 자작 부인이었다.
태오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집안 사이의 문제를 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전쟁을 벌이며 원수처럼 싸우던 국가 간에도 결혼을 통해 서로 화해하면서 이전보다 더 돈독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게다가 엘리사 양과 레오나드 경은 정략적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애초에 서로가 강하게 원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결합으로 그동안의 갈등이 봉합되고 화합을 하게 된다면 두 집안으로서도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태오의 말대로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부족한 일손을 보충해주고, 농사에 필요한 물자도 교환하면서, 두 집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크게 흥했었다.
새로 지은 저택 역시 버틀러 경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빨리 완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자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엘리사 양을 한때는 며느릿감으로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역시 그들이 엘리사의 몸 상태를 들었을 때 안타까워하는 이유가 있었다.
“돌아가신 우리 남편도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엘리사를 무척이나 아꼈습니다, 엘리사가 레오나드의 짝이 되면 참 좋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제게 말씀하셨죠.”
딸들은 런던으로 시집보내고 싶었지만, 아들들은 자메이카의 대농장의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던 부부였다.
그런데 마침 근처 농장에 무척 마음에 드는 적당한 신붓감이 있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자작 부인. 지금 엘리사 양이 많이 아프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레오나드 경을 만나지 못해서 생긴 병이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네? 설마요.”
자작 부인은 거기까지는 몰랐던 눈치였다.
“사람이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억지로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힘들어지고 못 견디게 됩니다. 그 마음의 짐이 병이 되어 신체로도 나오게 된 것이고요. 심한 경우 눈이나 귀까지 멀 수 있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환자들을 보기도 했었죠. 지금 엘리사 양이 그렇습니다.”
“······.”
자기 아들을 사랑해 그런 큰 병이 들었다는 말에 가엾어하는 표정의 자작 부인이었다.
“지금 당장 엘리사 양과 레오나드 경의 결혼을 생각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엘리사 양의 건강 회복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레오나드 경이 버틀러 경의 집에 방문하는 걸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결혼은 그 이후에 생각하셔도 되니까요.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레오나드 경을···”
그때였다.
꽝-
곰같이 커다란 덩치의 낯선 사내 하나가 다이닝룸으로 불쑥 들어섰다.
성난 표정의 그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려찍으며 고함쳤다.
꽝- 꽝-
“더러운 버틀러 집안에 레오나드를 보내라니? 그게 뭔 해괴한 소리요?”
제이콥 에반스 자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