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apocalyptic world, I'm on a submarine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 타타르스탄(Tatarstan)
우크라이나 처지에선 OSS의 도움으로 단 7,000명의 병력으로 크림반도를 수복한 것이었다.
내 기쁨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물론 우크라이나 해병사단이 최전방, 최선봉에서 용맹이 싸워준 덕도 컸지만. OSS에선 아직 전사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오기 전에, 흑해함대를 괴멸시키고. 무엇보다. 크림공화국의 항복을 돈과 머리를 써서 받아낸 것이 뿌듯했다.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수복과 관련한 기사가 온라인 전체를 도배하고 있을 때, 특이한 제목의 추적기사가 떴다.
[ 실패 없는 군사기업, OSS ]그 기사엔 어떻게 취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OSS가 MILF 반군에게 납치된 우리 직원을 구출한 이후 응징한 작전부터, 남중국해 어딘가에서 비밀첩보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내용.
세베로드빈스크의 세브마쉬 조선소 폭파. 그리고 중국 항공모함 격침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내용.
흑해함대를 괴멸시킨 한산도 작전까지의 취재와 추측이 뒤섞여 있지만 제법 정확한 내용의 기사였다.
이쯤 되면 음지에 있다 하더라도, 양지를 지향해야만 했다.
OSS는 민간군사기업으로서 하나의 브랜드가 된 것이고, 그것이 악명이든 명성이든 이름값을 지켜야만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이름값은 ‘약속은 지킨다.’ 였다.
이번 항복의 주체가 된 사람들과 관련 지도부의 사람들을 헬기, 비행기 등의 수단을 동원해 마르마라해에 대기 중인 OSS의 병원선 Mercy 호로 이동시켰다.
다만,
그들 중 몇몇은 정보조사가 필요하다는 이 부장의 건의에 따라 OSSIA(OSS 정보국) 요원이 심문을 진행했다.
이후 그들은 돈과 함께 원하는 제3국으로 보내주었다.
또 몇몇은 OSS에 입사(입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서 OSSIA에서 신원검증을 마친 후,
타위타위의 신흥캠프로 보내서 할 일을 찾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러시아군 탈영병 중에서도 OSS 입대하겠다며 찾아오는 인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받을 수도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대안으로 그들을 OSS 크림여단에 배속시키고 점령지의 치안과 민사작전을 맡기게 되었다.
향후 OSS가 철군할 때의 처리가 고민이 되긴 하였지만. OSS의 휘장이 준 믿음을 져버리기 싫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의 전황은 답답한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의 거센 저항으로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던 것이다.
크림반도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발트 3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러시아는 동부 돈바스까지 우크라이나에 내어주게 되면.
크림전쟁 이전의 국경선으로 회복되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것이 자명했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의 격렬한 저항은 OSS 창설 이래 최초의 전사자를 발생시켰다. 충격적인 소식에 잠시 넋이 나갈 정도였지만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우리의 OSS 포병여단의 포병 3명이었다. 포격에 시달린 러시아군이 특공대를 조직해 포대를 기습한 것이었다.
우리 포병들은 비격 자주박격포를 장갑차처럼 운용하면서 부무장인 K6 중기관총으로 러시아군 특공대를 괴멸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3명의 전사자와 발생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다. 자주박격포 2문도 적 대전차 화기에 손상되었다.
의무와 항공역량을 총동원해 전사자와 부상자를 OSS Mercy 병원선으로 후송했다.
나는 최고의 예우를 다해 시신을 수습하고 그 운구를 위해서 보잉 777F 한 대를 전용기로 배정할 것을 지시했다.
전사자가 운구되는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예우를 다할 영관급 장교의 지원을 받았다.
9번 함의 신희립 대령이 자원했다. 고마운 마음이었다. 비록 그는 해군이었지만 전사한 전우를 바라보는 마음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가족들과 협의하여 장지를 타위타위의 신흥캠프로 하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전사자 3명 모두 그 뜻이 같았다.
– 한국군에서 파견된 병사였지만 현 소속은 OSS여서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하다고 했다. –
또한, 전사자의 가족들에 대한 지원은 그들이 살아있을 때와 동일하게 이루어지도록 했고, 위로금과 별도로 향후 30년간 전사자의 급여가 유족들에게 지급되도록 했다.
OSS 전사자 3인의 시신은 마르마라해에 병원선 OSS Mercy에서부터 이스탄불, 두바이, 싱가포르, 필리핀 마닐라를 거처 한국의 인천공항까지 운구되었다.
그 모든 과정에 신희립 대령이 함께했다.
전사자의 영구가 안치되거나 운구의 대열이 바뀔 때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표시했다.
그 자리엔 우크라이나 남부방면군에서 파견된 페트로비치 소령도 함께했다.
한국에 도착한 전사자의 영현은 각자의 고향에 마련된 빈소를 향했고. 정복 입은 장교와 병사가 동행했다.
한국으로 조문객을 타고 갈 올 전용기를 배정했고. 비행기를 놓치거나 시간이 부족한 조문객을 위해 2호 제트기 G700을 따로 배정했다.
그리고 장례식에 맞추어 나도 한국으로 날아갔다.
한국의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발인 행렬은 망자의 기억이 쌓인 장소 들을 두루 거치고, 유해가 된 영현은 OSS가 마련한 전용기에 올랐다.
영현과 유가족, 조문객을 태운 전용기는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타위타위 신흥캠프로 왔다.
신흥캠프에 OSS 전몰자 묘소를 마련했다.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 OSS 전사자 묘소를 만들었고 그곳에 유해를 봉안했다.
전사자 묘지의 위치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었지만.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로. 가장 잘 보이고, 매일 인사할 수 있는 정문 앞 광장에 만들자는 내 의견을 모두가 따라주었다.
이후 신흥캠프를 출입하는 모든 사람은 OSS 전사자에게 예를 표했다. 그 어떤 지시나 강요가 없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봉안된 유해를 언제든지 수습할 수 있는 절차와 장치를 마련토록 했다.
만약 OSS가 신흥캠프 기지를 이탈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도록 했다.
형식적이더라도. ‘끝까지 책임진다.’라는 것을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
…
모든 장례절차를 마치고, 유가족을 위로한 뒤 나는 흑해의 타위타위함으로 돌아왔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OSS 제1 강습 전대는 아르미안스크 해안으로 이동해서 멜리토폴 수복 작전을 지원했고.
OSS 크림여단은 크림반도의 돌발상황에 대비해 심페로폴에 주둔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해병 1사단은 케르치(kepy)로 진군했다.
케르치는 폭파된 크림 대교가 위치하고 러시아 본토가 코앞인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OSS 제2전대는 우크라이나 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흑해 남부로 전진 배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멜리토폴이 수복되었다.
이로써 크림반도는 전략적 안정성을 가지게 되었고, 러시아군은 모든 전선에서 밀려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일대의 돈바스 지역으로 위축되었다.
OSSIA의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본토의 이상징후가 감지된다고 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빼앗긴 것이 전 국민적 충격으로 다가갔고. 오랜 전쟁의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라고 했다.
그런 와중에 모스크바는 부족한 병력의 충원을 위해 소수민족과 하층민을 대상으로 무차별 강제징집을 시행했다.
그것으로 인해 러시아 연방 전체가 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불만으로 폭발 직전인 상태라고 보고서는 전했다.
트리거는 예상외의 곳에서 당겨졌다.
벨라루스군에서 집단 탈영이 발생한 것이다.
1개의 벨라루스 보병여단 전체가 폴란드로 망명을 선택한 것이었다.
단순 탈영이 아닌 보병여단의 사령부과 여단 전체가 조직적으로 국외 망명을 시도한 것이었다.
ABW 폴란드 국가 안보국의 공작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 ABW (Agencja Bezpieczeństwa Wewnętrznego)
벨라루스군의 집단 탈영을 다른 도미노를 쓰러트렸다.
반 루카첸코 세력이 벨라루스에 주둔 중이었던, 러시아 용병집단 바그너그룹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게다가 쿠데타 세력은 정부를 장악하고 나서, 단 2일 만에 루카첸코 대통령을 공개 처형했다.
30년 독재자 루카첸코의 최후는 처참했다.
루카첸코는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처럼, 총살당한 후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우크라이나 혈통이다.)
그리고 벨라루스를 장악한 (그들이 말하기를) 혁명세력은 일방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을 선언했다.
벨라루스에 주둔 중인 바그너그룹이 반 루카첸코 진영에 붙은 이유는 저마다의 해석이 달랐지만. 대체적인 해석은 이러했다.
러시아에서 축출된 바그너그룹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소득 없는 (보수 없는) 밑지는 장사였고, 그들을 수용한 루카첸코가 밥값 (참전)을 기대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바그너그룹은 댓가를 지불할 클라이언트를 찾기보다. 스스로가 클라이언트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구원이 있는 러시아는 바그너그룹을 다시 불러들이지도 못했고, 벨라루스 혁명세력은 휴전을 선언했으니.
바그너그룹은 교묘하게 전쟁의 수렁에서 발을 뺀 것과 동시에 군사기업에서 한 국가(벨라루스)의 핵심세력으로 거듭나게 된 셈이다.
벨라루스의 정변으로 북부 전선의 부담을 던 우크라이나 북부방면군은 동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 병력을 동부전선에 투입할 순 없었다.
우크라이나 병력이 한곳에 집중될수록 궁지에 몰린 러시아가 핵무기를 재사용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미국이 참전한 마당에 자멸의 길을 선택할 수 없었겠지만. 모스크바 수뇌부는 정상이 아닌 사람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와 유럽 사이 중앙아시아 한복판,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의 타타르스탄(Tatarstan) 공화국이 연방 탈퇴와 동시에 독립을 선포했다.
타타르족은 러시아 연방에서 470만이란 최대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이었다.
그 시작은 소수민족에 대한 무차별 강제징집을 거부하는 시위에 지방정부가 동조하면서 불이 붙었다. 그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은 51%의 타타르족과 30%가량의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었지만. 과거 카잔 칸국의 볼가 타타르인이 주축이 되어 독립선언을 한 것이었다.
타타르스탄의 독립이 선포되자.
러시아 연방 곳곳에 퍼져있던 타타르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시베리아 타타르, 크라셴, 나가이바크등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타타르인들까지 타타르스탄으로 모여들었다.
과거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 때문에 멀리 중앙아시아부터 크림반도까지, 러시아 곳곳으로 흩어놓은 타타르인들이 뭉치는 의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러시아의 강제징집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