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1)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21화(21/135)
간만에 찾아온 학교 앞 카페.
창밖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커피 마시기 좋은 날이네.
그러고 보니, 나 비 오는 날 되게 좋아했는데.
20대로 돌아오자 그때 가지고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점차 이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잊고 살았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실감이 났다.
내가 젊다는 게, 다시 산다는 게 조금씩 즐거워졌고.
여전히 치열하지만 이전과는 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한숨을 조금 돌리지만, 다시 플랫슈즈를 시작하고 나서 숨 쉴 틈 없이 달려오긴 했다.
때때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녀 연기에서 벗어나 여러 역할을 맡으려면, 그만큼 나 역시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겪어봐야 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다른 장르를 떠올려보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딱히 없었다.
대중적인 장르인 로맨스는 당연히… 연기에서도 일상에서도 할 줄 모른다.
남주한테 꼬리치는 여주 뺨 때리는 역할이면 또 모를까.
절절하게 남주를 사랑하는 법은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그 평범한 엄마 역할도, 철부지 딸래미 역할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대론 안 되겠는데.
생각해보면… 이전 삶에서조차 이렇다 할 친구도 딱히 없었고, 취미는커녕 여행도 가본 적이 없었다.
또 워낙에 많은 사람이 내 이미지 때문에 날 어려워하기도 했고.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인생을 헛살았다는 기분에 허무해지고는 했다.
흠….
그렇게 창가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드는데, 바로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깜짝아!”
놀라기도 잠시, 케이크용 폭죽이 눈앞에서 뻥 터졌다.
“뭐야!”
심장이 철렁했다.
유석아, 누나 나이가 생각보다 많다만.
“누나, 팬카페 생긴 거 축하해요!”
“어…?”
선유석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팬카페가 생긴 줄도 몰라…? 누나, 진짜 빨리 소속사 만들어야겠네요.”
선유석이 폰을 꺼내 들어 인터넷에서 내 팬카페를 들어가 보여주었다.
회원 수 1,192명.
선유석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두 가입했어요, 누나. 잘했죠.”
머리가 멍해졌다.
예전에 플랫슈즈 찍었을 때만 해도 화제성이 있긴 있어도, 팬카페가 생기진 않았었는데….
정말 예상외의 결과였다.
폰을 건네받아 게시글을 살폈다.
유지안 캐릭터에 대한 분석글 및 망상글, 플랫슈즈 작품 이야기, 선공개된 잡지 화보 이야기, 인터뷰 및 잡지 캡쳐글 등.
하룻밤 사이 올라온 게시글만 50개가 넘었다.
조회 수가 가장 높은 글은 보통 유지안에 대한 회원들의 해석과 공감이 실린 얘기였고, 팬미팅에 대한 언급도 반응이 뜨거웠다.
– 팬미팅 언제 하나요?
– 유지안 굿즈 팔아주세요.
내 소속사가 하루빨리 정해지기를 기다리는 팬들의 염원이 꽤 많았다.
팬미팅….
순간 내가 숨을 참고 있는 줄도 몰랐다가, 뜨거운 공기를 훅 뱉었다.
그런 거…
나도 해보고 싶었어.
얼굴이 빨개졌다.
40대가 되어서도 내 또래 배우들이 팬미팅에서 팬들에게 ‘내 새끼’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경하면서도 부러웠었다.
허물없이 팬들이랑 친구처럼 장난도 치고.
나에겐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벌써부터 팬미팅 얘기가 나오다니.
선유석이 날 쳐다보며 큭큭 웃었다.
“누나,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고개를 돌려 대답을 피했다.
“아 참, 이제 곧 한호예술대상이잖아요.”
“응?”
아, 지금 3월이었지.
벌써 한호예술대상 할 시즌이구나.
“아깝다. 플랫슈즈 좀 더 방영된 후였으면, 누나 무조건 신인상 노미네이트 됐을 텐데.”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감히 그런 걸 평생 바라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내년으로 밀리면, 직전에 쏟아져나온 다른 작품들한테 밀려서 불리할 텐데.”
나 대신 별걸 다 걱정해주는 모습에 풋, 웃음이 나왔다.
“난 괜찮아. 참, 권 실장님 소개시켜줘서 고마워.”
“소속사 말이 나와서 말인데, 누나. 진짜 뭐예요? 왜 저 빼고 자꾸 권 실장님이랑만 만나요?”
선유석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아, 그게. 나 권 실장님이 따로 차리는 회사에 들어가기로 했어.”
그 말에 선유석이 눈을 치켜떴다.
“권 실장님 회사 차리신대요?”
선유석이 이마에 턱 손을 얹었다.
맙소사, 이런 느낌.
“나만 왕따네, 그쵸. 응? 나만 왕따야….”
선유석이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두었다.
좁은 틈으로 보이는 케이크 위로 웬 공주 인형과 가지런히 놓인 핑크구두 한 쌍이 보였다.
귀여운 데코레이션이네.
내 나이에….
플랫슈즈 찍었다고 정성스레 골라온 눈치였다.
“왜 저한테 말 안 해줬어요?”
선유석 목소리가 제법 무거워졌다.
“야… 너 계약 이미 묶여있잖아.”
“그래도 말 못 해주나?”
흠.
우리 회사로 오고 싶은가?
하긴, 연기 연습을 잘 도와줘서 나도 따르고 있고, 권민영 능력은 그동안 눈앞에서 지켜봤으니.
“내가 권 실장님 많이 꼬드겼어. 너무 좋은 분이라.”
“아 나, 소속사 계약 괜히 했어.”
선유석이 대답하면서 말끝을 웅얼댔다.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피식 났다.
“유석아, 걱정 마. 너 연기 연습 계속 도와줄게.”
내 말을 듣더니 선유석이 한숨을 쉬었다.
“얘가 한숨은. 너 큰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얼마나 많을 건데. 계약되어있는 동안, 회사 컨택 능력 많이 필요할 거야.”
이런 내 속도 모르고, 계속해서 툴툴대는 선유석을 올려다봤다.
“권 실장님이랑 누나만 있어도 트루 액터스보단 나을 텐데!”
어우 진짜.
“얘가 진짜 왜 이렇게 떼를 써!”
선유석이 내 높아진 목소리에 잔뜩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은근히 몰려오는 귀찮음을 뒤로하고, 선유석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그러자 선유석이 토끼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유석아, 누나랑 권 실장님이 너 많이 도와줄 테니까, 거기서 좋은 배역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넘어올래?”
내 나긋나긋한 말투에 선유석의 귀가 붉어졌다.
“나, 진짜. 나 엄청 떠서 몸값 어마어마하게 부를 거예요!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는다, 누나.”
황당한 앙탈이었다.
귀는 왜 빨개지는 건데?
선유석 얼굴을 보고 두 눈만 끔뻑거렸다.
“아! 몰라!”
선유석이 성큼성큼 카페를 빠져나갔다.
어이가 없네.
반말 쓰지 마, 새끼야….
* * *
왁자지껄한 종방연 회식 자리.
드디어 길고 길었던 플랫슈즈의 여정이 끝이 났다.
지글지글 익는 소고기 소리, 술잔끼리 부딪치는 소리,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게를 가득 메웠다.
가게 중앙, 술이 잔뜩 오른 문 감독님이 건배사를 외친다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술잔을 잡고 서서 주절주절 말을 끌었다.
“내가 진짜! 내 감독 생활 중에 최고 좋았던 드라마야. 정말로 내가 우리 어? 스탭, 배우진, 우리 작가님까지!”
이시영 작가님이 감독님을 보며 슬쩍 웃고는, 한 잔을 슥 비우셨다.
의외로 말술이셨다.
작가님과 지은 씨가 계속해서 묵묵히 폭탄주를 벌컥벌컥 입에 털어 넣었다.
스텝들의 만류에도 작가님이 손길을 뿌리치셨다.
지은 씨도 지지 않는 주당이었다.
모두가 제법 지칠만한데도, 신난다는 듯 웃었다.
정말로 이만한 분위기의 촬영장은 보기 어려웠다.
내 연기 생활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나도 박훈 선배님과 유리 씨 사이에서 간만에 술을 홀짝였다.
원래 술 되게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먹으니 금세 술이 올랐다.
감독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 막내 스탭들, 어? 내가 많이 구박해서 서러웠으면 미안해. 내가 따로 용돈 챙겨줄게, 다들. 이따 줄 서.”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정채성이 대뜸 일어나 감독 앞에 가서 섰다.
“야, 너 안 들어가?!”
당황한 감독님이 손을 내젓자 회식 자리가 웃음바다가 됐다.
계속 주절대던 감독님의 말이 거의 끝나갈 때쯤 사람들이 잔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때,
“한새나 씨?”
어디선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가게 문 쪽을 쳐다보니…
양의철이었다.
양의철을 발견한 문 감독이 딸꾹질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양 실장님이 여긴 웬일이야?”
감독님이 양의철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양의철이 다가와 문 감독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아, 나도 여기 근처에서 회식 중이었거든. 여기 감독님 종방연 회식한다길래 축하해주러 왔어.”
꽤나 친분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껄껄 웃었다.
양의철이 몇몇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유리 씨는 볼 때마다 더 예뻐지네.”
“아유,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박훈 배우님도 간만입니다.”
“어이구, 실장님. 잘 계셨어요?”
그러다가 양의철이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새나 씨, 다른 회사랑 계약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니죠? 이러면 배신이야.”
양의철이 작정한 듯 말을 던졌다.
그 한 마디에, 순식간에 고깃집 분위기가 싸해졌다.
감독님이 벌게진 얼굴로 분위기를 살피더니 잠자코 앉았다.
“실장님. 회식 자리에서 이런 얘기는 좀….”
애써 미소 지으며 양의철에게 대답했다.
“연락도 잘 안 받으시길래요, 배우님이. 바쁘셔서. 그런데 제가 새나 씨한테 투자한 게 꽤 많잖아요? 이제는 회수를 좀 해야겠는데.”
양의철의 웃는 표정 아래 묘하게 깔린 섬뜩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순간, 직감했다.
양의철, 완전히 열 받았다.
주위에 둘러앉은 배우와 스탭들이 짐짓 모른 척 다시 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이제 촬영 끝났으니까 실장님께 따로 연락드릴게요.”
“오늘 확답은 못 받으려나?”
양의철이 웃음기를 좀 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대로 압박하려고 맘먹고 온 모양이었다.
제법 골치 좀 아프겠는데.
사람들이 흘끗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양의철이 조만간 찾아와 난리 칠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때 박훈 선배님이 입을 여셨다.
“양 실장님, 컨텍 어필하러 오셨나 봐요. 그쵸.”
애써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시도처럼 느껴졌다.
“네. 컨택하려고 제가 수없이 새나 씨 요구사항 들어줬거든요. 그런데 다른 소속사 간다는 소문이 돌잖아요. 그럼 또 이렇게, 제가, 애걸복걸하러 와야죠.”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