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8)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28화(28/135)
그렇게 오늘, 이 회색 츄리닝.
<새벽이슬>의 임원들과 스탭들의 치열한 회의 끝에 통과된 컨셉이었다.
피부 결 표현에만 공을 들인 메이크업은 마치 맨 얼굴처럼 수수해 보이게 만들었다.
“아까와 달리 건강미와 청순함. 이게 메인이에요.”
메이크업에 공들이던 분장쌤이 해주신 말이었다.
“트레이닝복이 이렇게 예쁠 줄이야. 생기 넘치고 예쁘다.”
촬영 조수가 이쪽을 보고 웃었다.
“자, 그럼 가볼까. 편하게 해봐요, 새나 씨.”
“네!”
그렇게 세트장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테이핑된 지점에 섰다.
목재 가구와 테이블이 있는 편안한 방이 이번 세트장이었다.
창가 밖에 설치된 조명이 느지막하게 져가는 햇살처럼 쏟아져 방 안을 메웠다.
편안함이 가장 큰 컨셉이자 모두의 목표였다.
나 역시 아까와 확연히 다른 자세와 걸음걸이, 표정, 눈빛을 표현해냈다.
며칠 동안 연습실에서 몇 번이나 촬영하고, 확인하고, 수정한 내 모습이었다.
수많은 연습 끝에 다다른 결론은 그냥 나 그대로를 드러내자, 였다.
플랫슈즈의 유지안도, 라이징 스타 한새나도 아닌,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한 나.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겼다.
그리고 카메라를 보면서 생긋 웃었다.
“하이, 큐!”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켜면서 냉장고로 걸어가 소주병을 꺼냈다.
목덜미를 긁다가 테이블에 앉아 로고가 박힌 소주잔에 소주를 찰랑찰랑 따랐다.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술잔을 든 레고 인형과 짠-하고 잔을 부딪쳤다.
순간, 그걸 찍다가 내가 웃겨서 민망하게 콧잔등을 조금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고 잔을 쭉 원샷하고 크- 소리를 내며 다리를 쭉 뻗었다.
마지막으로 소주병을 들고 볼에 가져다 대고 쑥스러운 듯, 기분 좋게 웃었다.
“컷!”
감독님이 컷 소리를 내자마자 민망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스탭들의 웃음소리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와, 이거 진짜 예쁜데요.”
“생각지도 못했다, 진짜. 유지안 컨셉이랑 다른 느낌으로, 둘 다 겁나 예쁘네요.”
“새나 씨, 연습 많이 했어? 동작들이 전부 매끄럽네.”
이어지는 감독님의 칭찬까지.
“중간에 웃어서 죄송해요. 순간 너무 웃겨서.”
“아니? 새나 씨, 웃는 거 너무 좋은데?”
감독님이 진지하게 촬영본을 돌려보며 대답했다.
“저도요. 연기하는 듯 연기하지 않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뭐랄까, 편안함 안에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한새나가 그대로 보이는 느낌.”
촬영 조수도 진지하게 해석을 덧붙여 동조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번 많이 안 찍어도 되겠다. 새나 씨, 방금처럼 연기한다는 느낌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줘요. 너무 좋아.”
감독님의 지시가 떨어지자, 스탭들이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한 번 해보겠습니다!”
* * *
계속해서 광고 촬영이 진행되는 중, 스탭들 사이에서 권민영이 한새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독한 기집애.’
권민영이 커피를 홀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한새나가 카메라 앞에서 물 흐르는 액팅을 선보일 때마다 권민영의 머릿속에는 지난 며칠 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언니, 어디 긁는 게 제일 자연스러워요?’
연습 첫날, 권민영은 온몸 여기저기를 긁어대는 한새나를 보면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왜 긁어대…?”
그뿐인가.
한새나는 연습실 가운데 소파를 끌어다 놓고, 거울을 보면서 이리저리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며 뭔가에 엄청 골몰해 있었다.
대체 저게 뭔가, 싶었다.
냅다 누워서 굴러보는 한새나 앞에서 권민영이 웃어넘기기엔 너무나 열성적이었고.
그런데 이제 와 보니, 한새나는 가장 자연스럽고 편해 ‘보이는’ 자세를 연구하던 것이었다.
진짜 편한 것과 화면에 편하게 ‘보이는’ 것의 미묘한 간극을 좁히기 위해, 저렇게 열심히 연습했던 것.
게다가 권민영과 붙어 있는 며칠 내내, 한새나는 홍보팀과 전화로 의견 나누기를 반복했다.
‘예전에 새벽이슬 광고에 레고 인형 나온 적 있지 않나요? 레고랑 짠- 하면 어때요?’
‘손 클로즈업이 들어갈 텐데, 아예 새벽이슬 시그니처 컬러로 네일도 하면 어떨까요?’
등등….
오늘 아침에 만난 그 직원의 다크서클이 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새나 씨, 열정 너무 짱이에요.”
그 말과 함께 홍보 실장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어찌나 괴롭혀놓았으면.
“저 연습벌레.”
권민영이 커피를 다시금 홀짝이는 사이, 한새나가 이번에는 다소 코믹하게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권민영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광고 하나도 철저히 연기적으로 접근해서 준비해 가는 배우.
내가 여태 기다려왔던, 찾아 헤매던 배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덕분에 매일이 즐겁고 가슴 벅차다는 걸 쟤는 알까.
권민영은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이후로, 거의 처음으로 한 배우의 능력과 인간성 두 가지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것도 저렇게 젊은 배우에게.
한편, 촬영장 한구석에서 잠시 쓰러져 있던 홍보 실장 역시 한새나의 모습을 모니터링하면서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컷, 오케이!”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스탭들이 참았던 탄성을 내질렀다.
“와, 나 진짜 술 땡긴다.”
한 스탭의 말에 모두가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손도 너무 예쁜데요? 원래 이런 거 보통 손 배우 쓰는데.”
“그러니깐. 새벽이슬 진짜 모델 선정 기가 막히게 했네.”
그 말에 홍보 실장이 주먹을 쥐어 입을 가리며 슬쩍 웃었다.
“여러분, 바로 접니다. 제가 바로 한새나 씨를 모델로 밀어붙인 그 위인입니다.”
실장의 말에 또 한 번 스탭들이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측면 가볼게요.”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더 찍는다는 감독의 지시에 스탭들이 또 한 번 분주해졌다.
그렇게 또 한 번 찍는 장면에서 한새나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유쾌함이 배어 나왔다.
그야말로 기적의 츄리닝 세트였다.
“이게 되네, 이게 돼….”
홍보 실장이 넋 나간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두 번째 컨셉을 편안함으로 잡았을 때 트레이닝복을 밀고 가면서 내심 이게 잘 될까, 너무 백수 같지 않을까 싶었는데….
게다가 행여라도 이 컨셉이 가진 위험 요소가 폭발할까 봐 청순 컨셉 촬영도 추가로 대비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이젠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홍보 실장이 마음속으로 딱 한 마디를 되뇌었다.
‘다음 시즌에도 반드시 재계약이다, 이건.’
그렇게 홍보 실장이 결의를 다졌다.
* * *
그렇게 광고 촬영이 끝난 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바라시합시다!”
“모두들 고생하셨어요!”
“새나 씨, 오늘 고생 정말 많았어!”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끼리 서로 훈훈하게 말들을 주고받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곧 스탭들이 촬영본을 확인한 뒤, 세트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스쳤다.
“언니, 내 폰 좀 줘.”
얼른 민영 언니에게 다가가 폰을 달라고 보챘다.
“뭐하게?”
민영 언니에게 폰을 받아 다시 침대에 누워 초근접 셀카를 두어 장 찍었다.
“너 뭐해?”
“있어, 그런 게.”
내가 처음 광고 촬영 연습할 때처럼 ‘쟤 뭐하냐’라는 듯한 표정을 언니가 지었다.
“그렇게 가까이 찍으면 뭐가 보여?”
“안 보이라고 이렇게 찍는 거야. 아직 광고 안 나갔잖아.”
이렇게 사진을 찍어 팬카페에 올려볼까 싶었다.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와 동시에 회사를 위한 배려를 함께 계산한 사진이었다.
이런 건 내 성격상… 맞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다 해주지 않나, 보통?
“언니, 세트장 보이는 거랑 안 보이는 거 한 장씩 찍어주라. 보이는 건 나중에 풀게!”
몇 장이나 더 찍고 난 뒤, 어플로 사진을 업로드했다.
이미 2030년대의 어플을 맛보고 오니, 사진 업로드 기능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이럴 때마다 또 이런 건 불편하다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업로드할 문구를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음, 좀 귀엽게, 발랄하게, 그런 느낌으로다가….
「소주 광고 촬영! 컨셉은 비밀♡ 새나의 깜짝 변신 기대해 주세요!」
“됐다.”
민영 언니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웃어댔다.
“연예인 다 됐네, 한새나.”
곧, 사진을 올리자마자 댓글이 주르륵 달리기 시작했다.
‘귀여워!’
‘톱스타 한새나! 광고 요정 진심.’
‘진짜 빵 떴네. 앞으로 어케 나올지 기대됨. 광고도.’
‘뭐지 이거. 광고 엄청 큰 거 들어온 듯.’
그렇게 팬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지켜봤다.
“데려다줄게. 가자.”
민영 언니가 데려다주겠다며 차 키를 집어 들자, 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언니, 괜찮아. 연습실에 내려줘. 집에는 알아서 갈게.”
“또 연습이야? 너 그러다 체력 떨어져.”
곧바로 언니의 잔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잔뜩 걱정하는 말들이었다.
“너 아무리 그래도 몸은 생각하고 해야지. 빨리 성공할 생각만 하고, 오래 갈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언니, 나 너무 즐거워. 지금 너무 좋단 말이야.”
언니에게 폰을 흔들어 보이며 팬들의 댓글을 보여주었다.
“난 이거면 충분해.”
내 말에 언니가 잡아끌던 내 팔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연습실에 도착한 뒤, 간단하게 김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역시 촬영하고 오니까 허기지네.
텅 빈 연습실 안에서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흣짜-
곧장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작할 연습도 며칠 전과 같은 대사들로 메워진 장면이었다.
“사소한 허물로 고변을 일삼던 자들이 이제는 전하의 권위를 흔들고 있사옵니다. 도무지 가려 말하지 않는 자들을 어찌하여 그냥 두고자 하십니까!”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편전이옵니다. 국정과 무관한 음해는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 번은 목소리를 크게, 한 번은 높게, 다음은 낮게, 다음은 부드럽게, 그리고 강경하게….
여러 가지의 모드를 취해 소리를 내고, 대사를 읊었다.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았다.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금세 얼굴이 땀에 젖어갔다.
한참 후….
“아이고야야….”
기어이 무릎을 짚고 철푸덕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에 힘이 풀린 동안에도 대사를 읽으려 했지만, 겨우 몸을 누인 소파 위에서는 쉽지가 않았다.
대본을 바라보는데, 피곤해서 그런지… 글자가 당최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딴 생각도 잡다하고.
그나저나 진짜 문제가 뭐였을까.
이렇게나 재미있는 캐릭터와 대사들로 가득한 대본이 왜 내 기억에 없을까?
오디션 준비에 익숙해져 갈수록 이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통대본이 나오지도 않았고, 다 읽지 못했지만…
대본상으로 큰 문제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2020년대 이후와 달리, 사전제작 드라마와는 완전히 작별한 상태.
겪어보지 않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더 익숙한 지금이었다.
게다가 <플랫슈즈>와도 더없이 다른 상황.
“해결할 수 있을까…?”
힘 풀린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미리 사둔 커피를 쭉 들이켜고 다시 일어섰다.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